유혜리/ 우화 혹은 삶의 서사, 물고기를 통해 본 현대인의 초상
고충환 | 미술평론가
우연의 일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죽은 날 집에서 키우던 열대어도 죽었다. 그날 이후 나에게 물고기는 특별한 이미지로 각인되었고,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매개체로서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었다...물고기의 이미지에 우리 인간의 모습을 대입해 현대사회의 다양한 구조와 현대인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작가 노트)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일 수 있다. 저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저만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 이야기의 세목은 다르지만, 대개 삶을 이야기하는 형식 그러므로 삶의 서사이기 쉽다. 삶을 되비치는 거울이라고 해야 할까(반영이론). 그렇게 이야기하는 형식이 다르고 세목이 다르지만, 그 와중에서도 일정한 유형화는 가능할 수 있다. 그 전형적인 경우로 치자면, 나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고 어디에 있는지와 같은 존재의 유래를 묻는 존재론적 서사가 있을 수 있고, 자기 정체성을 찾아 길을 나서는 와중에 장애물에 맞닥트리기도 하고 예기치 못한 조력자를 만나기도 하는 성장 서사가 있을 수 있다.
실제 현실은 은폐돼 있다는 사실에 착안해 행간읽기와 이면 읽기에 치중할 수도, 실제 현실은 억압돼 있다는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역설적 현실(아이러니)에 몰입할 수도, 저것에 빗대어 이것을 이야기하는 유비적 어법을 매개로 은폐되고 억압된 현실(현실 인식)을 증언하고 확장할 수도 있다. 이런 유비적 어법 중 하나로 우화가 있다. 동물에 빗대어 인간을 이야기하고, 사람이 사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작가 유혜리의 그림이 그렇고, 작가가 말을 걸어오는 방식 그러므로 서사가 그렇다.
작가는 이런 유비적 어법 이전에, 우화 이전에 원래 일상적 서사를 그렸었다. 의자에 앉아 책을 보는 사람, 침대에 누워 책을 보는 사람, TV를 보는 사람, 책장을 정리하는 사람,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 마주 앉아 담소하는 사람들,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다. 자기 자신일 것이다. 주변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 모두일 것이다. 일상이 그렇듯 덤덤하고, 사건이랄 만한 일도 없고, 약간은 공허하고, 반복적인 느낌이다.
질 들뢰즈의 차이 나는 반복이, 차이를 생성하는 반복이 이런 반복적인 일상을 깨운다. 반복적인 일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반복되는 일상은 없다. 여기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회화란 매 순간 재현 불가능한 일회적 사건이라고 했다. 회화에 일상을 대입해 보면, 일상이란 매 순간 재연 불가능한 일회적 사건이 된다. 반복적인 일상을 사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말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반복적인 일상 속에 삶의 의미가 있음을 일깨우는 말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차이를 발견하는 창조적인 일상을 일깨우는 말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작가는 일상을 그리면서 사실은 이처럼 차이를 생성하는 반복을 그린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돼지를 그렸다. 일상을 사는 돼지를 그리고, 하늘을 나는 돼지를 그렸다. 그 결에 차이가 있지만, 마찬가지로 일상을 사는 사람 사는 세상을 돼지에 빗대어 그렸다. 그런데, 돼지가 하늘을 난다. 하늘을 나는 돼지? 하늘을 날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돼지에 빗대어 그린 것일 것이다.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을 나르는 돼지에 빗대어 그린 것일 터이다. 여기서 작가는 욕망 서사와 영웅 서사를 도입한다. 욕망 서사가 그렇다면, 영웅 서사는 또한 어떤가. 그림 속 돼지는 영웅처럼 망토를 휘날리며 하늘을 난다. 그렇게 날아다니면서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하느라 바쁘다. 이 우화에 무슨 숨은 뜻이라도 있는가. 혹 정작 자유롭지 못한 현실, 억압적인 현실, 그리고 영웅이 사라진 시대 감정을 증언하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읽을 수는 없는가. 아마도 무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영웅 서사를 이데올로기 장치라고 비판하는 일부 담론도 있지만, 그럼에도 여하튼.
그리고 여기에 어항이 있고, 수조가 있고, 아쿠아리움이 있다. 물고기가 사는 집이다. 혹자는 물고기가 사는 집은 바단데,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작가는 수조에 사는 물고기들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사는 사회를 보고 세상을 본다.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한데 모여 살지만, 그중 같은 물고기는 하나도 없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어울려 살지만, 그중 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물고기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세상 속에서 하늘을 날고 숲속을 유영한다. 마치 물속에서처럼. 물고기도 저만의 삶이 있고 세상이 있을 것이다. 저들만의 하늘이 있고 숲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하늘은, 숲은, 세상은 원래 물속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물속의 하늘이, 숲이, 세상이 땅 위의 하늘로, 숲으로, 세상으로 전치되었다. 상상력이 현실이 되었다. 동화적 상상력이라고 해야 할까. 초현실적 상상력이라고 해야 할까.
주지하다시피 사물의 전치 그러므로 데페이즈망은 초현실주의의 상상력 중 전형적인 경우로 알려져 있고, 상상력을 매개로 현실 인식을 확장한 경우로도 알려져 있다. 가시적인, 비가시적인, 유형의, 무형의, 감각적인, 관념적인, 실재적인, 허구적인, 육체적인, 정신적인, 영적인 것들이 존재를 일구고, 그대로 현실이 된다. 생각할 수 있는 것,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현실이 된다. 존재론적 현실이라고 해야 할까. 예술이 상상력을 매개로 현실 인식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여기에 사물의 전치는 사물의 위치가, 배치가, 배열이 달라지면 그 의미 또한 달라진다는 의미를 의미한다. 맥락이 달라지면 그 의미 또한 달라진다는 후기구조주의의 맥락 결정주의를 예비한 경우로 보이고, 현대미술에서 배열과 배치를 매개로 한 창작방법론이 그리고 전시공학이 원래 어디서 어떻게 유래했는지 말해주는 대목으로도 보인다.
그렇게 작가는 동화적 상상력, 초현실적 상상력을 매개로 물속과 물 밖의 경계가 허물어지는(그 자체 아와 타, 주체와 타자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계기를 예비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탈경계 속에서 물고기와 사람이 어우러지는, 물고기의 삶이 사람 사는 세상을 증언하는 또 다른 세상을 열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근작에서 물고기를 소재로 한 작가의 그림은 일정한 변화를 보여준다. 원근감이 있고, 공간감이 있고, 공간적 깊이감이 있던, 그렇게 배경 화면과 모티브가 어우러져 유기적인 전체를 일구던 화면에서 이 모두가 사라지고 마치 평면 위에 모티브를 콜라주 한 것 같은, 현저하게 평면적인 화면으로 변화한 것이 그렇다. 색채 역시 파스텔 톤의 부드럽고 우호적인 것에서 원색이 강조되는 색채감정으로 변화가 엿보인다(물론 흑백 모노 톤으로 감각보다는 관념을 강조한 일부 드로잉과 그림이 없지 않지만, 대개는).
여기에 전작에서 물고기는 하늘을 날고 숲속을 유영(그러므로 산책)하는 정도였지만, 근작에서 물고기는 한눈에도 사람의 삶의 방식을 닮았다. 꽃을 든 물고기, 왕관을 쓴 물고기, 중절모를 쓴 물고기, 밀짚모자를 눌러 쓴 물고기, 축제에서처럼 고깔을 쓴 물고기, 목도리를 두른 물고기, 가방을 메고 출근하는 물고기, 핸드백을 들고 퇴근하는 물고기, 장바구니를 들고 장을 보는 물고기, 앞치마를 두른 채 프라이팬으로 요리하는 물고기, 택배에서처럼 선물상자를 나르는 물고기, 화분을 옮기는 물고기, 풍선을 든 물고기, 잠수 안경을 쓴 물고기, 선글라스를 쓴 채 한껏 멋을 낸 물고기, 비행선을 타는 물고기, 담배를 피우는 물고기가 그렇다.
마치 일상과 가사, 축제와 휴가, 그리고 여기에 일부 선인장으로 표상되는 장애물과 가시밭길을 아우르는, 그러므로 사람 사는 세상을, 그 모든 삶의 방식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물고기를 빌려 사람 사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유비적 표현이, 우화적 표현이 더 힘을 받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여기에 작가도 밝히고 있는 것이지만, 물고기 개개의 개성이 돋보인다. 아마도 어우러져 살아가는 개별주체들의 상황 논리를, 저마다의 삶의 방식을 강조하고 있을 것이다. 이로써 종래에는 주연과 조연이 따로 없는, 존재하는 모두가 주연인 사해동포주의를 표방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 신의 손길이 있다(애니메이션). 화면 속으로 신의 손길이 등장한다. 하늘에서 씨앗을 뿌린다. 씨앗은 땅에 떨어져 자라 집이 되었다. 집 주변으로 물고기들이 모여든다. 물고기들이 한 집에서 서로 어우러져 살아간다.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보듬으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이상사회(파라다이스)를 말하고 싶은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런 해피앤딩과는 다르다. 혹 실제로는 차별과 다툼이 있는 현실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현실과 이상의 차이처럼 양가적이라고 해도 좋고, 그 표면(이상)과 이면(현실)을 함축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여기서 신이 씨를 뿌려 가꾸는 집은 다만 집일 뿐이라기보다는 정체성의 집이다. 모든 집은 정체성의 집이다. 집이 곧 정체성이다. 작가의 그림은 이런 정체성과 정체성이 서로 충돌하고 화해하는, 애와 증의 양가감정이 교차하는 현대인의 삶의 방식을, 현대인의 초상을 예시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