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주, 지속되는 도시 


고충환 | 미술평론가


쓰레기 산수. 문명은 쓰레기를 생산한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쓰레기도 발생한다. 화석연료와 화학물질이 산수를 오염시키고, 무분별한 난개발과 재건축 현장에서 발생한 건축물 쓰레기가 산을 이루면서 새로운 풍경을 그린다. 그렇게 도시의 풍경은 목하 변신 중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사회적 풍경이라고 해도 좋고, 분쟁과 갈등을 조장한다는 점에서는 정치적 풍경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쓰레기는 문명의 척도라고 해도 좋고, 문명의 그림자라고 해도 좋고, 문명의 역설이라고 해도 좋다. 문명과 쓰레기의 관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는 쓰레기 산수를 빌려 문명화된 도시를 그린다. 다크투어리즘이 유행이지만, 문명이 발달한 도시를, 폐기물 쓰레기로 황량한 도시의 변방을 순회 관광하는 크루즈 선을 그리기도 한다. 문명의 역설을 그리고, 도시의 그림자를 그린다고 해야 할까. 

그곳에도 지금 여기처럼 사람들은 산다. 전작에서는 주로 무분별한 난개발로 어수선한 도시를 그리고 재개발 현장을 그렸다면, 근작에서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다. 거시적 관점에서 미시적 관점으로 시점 이동했다고 해야 할까. 그 삶에 사연이 없고 서사가 없을 수가 없다. 덩달아 서사가 확장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여기에 손에 손을 맞잡고 포크 댄스를 추는 노인들이 있다. 팬데믹 시기에 자칫 소외되기 쉬운 노인들의 정신건강을 위해 관에서 마련한 수업을 수행 중이다. 허물어진 벽돌벽과 블록 파편이 아무렇게나 흩어진, 천지개벽하기 전 옛 진관동 화훼농원을 그린 그림도 있다. 농원에는 주인아저씨가 애써 키웠을 분재가 전시돼 있다.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 라고 적힌 문구가 작업에 대한, 작품에 대한, 예술에 대한 정의를 재정의하게 만든다. 

작가의 그림은 주로 재개발 현장에 초점이 맞춰지는데, 외환위기로 건설사가 도산한 이후 중단된 채로 방치된 아파트 공사 현장(대천)을 그렸다. 잿빛 아파트 뒤로 붉은 노을이 아름답기도 암울하기도 한, 양가적인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그네와 풍선으로 장식한 터널 등 원래는 없는 그림을 덧그려 사람들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실과 또 다른 현실이 중첩된, 그렇게 현실을 확장하는, 편집되고 재구성된 풍경이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는 홍연동 철거 현장 담벼락에서 쉬고 있는 노동자들을 그렸고, 공사 현장의 가림막 곁을 지나치는 아이들과 같은, 이제는 일상이 된 풍경을 그렸다. 응암동 철거 현장 혹은 재개발 현장에서는 허물어진 빌라들 사이로 쓸만한 뭔가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그렸고, 채석장 밑 텃밭(행신동)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노는 아이들을 그렸다. 재개발 현장을 소재로 한 것이면서, 동시에 특정 지역 리서치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기록적인(아카이브) 의미와 함께 장소 특정성 작업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는 뒤편으로 축하 화환이 도열 해 있는, 입장하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모델하우스(부산 해운대)를 그렸다. 모델하우스도 그렇고 재개발 현장도 그렇지만, 일시적으로만 존재하는 풍경, 잠정적인 장소란 점에서 헤테로토피아를 떠올리게 된다. 미셸 푸코에 의하면, 실제로는 있는데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지워진 장소로 군대, 감옥, 기숙사, 그리고 여기에 의외로 휴양지를 포함한다. 사람들의 욕망이 억압되면서, 그렇게 억압된 욕망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적인 에너지가 축적 생성되는 장소다. 슬라보예 지젝이라면, 실재계의 돌발적인 출현을 예고하고 있는 장소라고 했을 것이다. 재개발 현장은 사회적 풍경이면서 정치적 풍경이기도 하다고 했다. 사람들의 욕망이 충돌하고 부침하는 곳, 욕망에 따라 있다가도 없고, 없던 풍경이 새로 생기기도 하는 장소로, 도시의 또 다른 얼굴 아니면 도시의 민낯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는 코스모폴리탄이란 말도 있지만, 도시와 도시는 점차 서로 닮아있다. 유형화된 문명화의 과정도, 도시화의 과정도, 도시가 슬럼화되는 과정도, 그렇게 쓰레기를 생산하는 것도 그렇다. 한때 자동차의 도시로 유명했던, 지금은 슬럼화된 디트로이트가 그렇고, 보도블록이 널브러진 베를린 공사 현장이 그렇고, 중동의 건설 현장이 그렇다. 작가는 계곡에 소파와 매트리스와 같은 생활 쓰레기가 버려진 을씨년스런 풍경 속에 원래는 없던 아이들을 그려 넣었다. 허물어진 빈집과 함께 기울어진 채 서 있는 어린이 주의 팻말이 이곳이 한때 사람들이 살았던 곳임을 상기시켜 그려 넣은 것이라고 했다. 그때를 지금 위로 소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곳을 통해 지금 여기를 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게 현실과 또 다른 현실을 매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알레고리로 서사를 확장하는 부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