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은오/ 숭고한 자연, 투명한 깊이로부터 시적 울림을 자아내는 


고충환 | 미술평론가


산수화와 화조화의 소재와 내용적인 측면이 기본을 이루는 전통 위에 실제와 가상이 혼재돼 있다. 작품에 나타난 새와 꽃은 자연생명의 이치를 드러내는 생명체로 보았고, 먹의 부드러운 농담으로 정적인 분위기를, 평온함과 명상의 계기를 제공하고자 하였다...생성소멸의 순환성과 상생의 관계 그리고 생태미를 생명 본질로 인지하며, 여기에 사계절과 비, 안개, 바람, 눈과 같은 자연현상을 반영한다...이로써 나의 작품세계는 주체의 주관적인 심경과 객체의 객관적인 사물 인식이 융합된 생명 공간이자 심리투영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작가 노트) 

만개한 매화나무 위로 새들이 날아오르는, 금붕어가 물속인 양 유유하게 허공에 유영하는, 수초가 끝나는 자리에 새 한 마리가 앉아있는, 그림 밖 허공을 향한 새의 시선이 그림을 그림 바깥으로 확장하는, 새가 앉은 자리가 원 안에 들어있어 후광처럼도 보이는, 지는 해가 빛으로 물을 물들이면서 수면과 하늘을 가름하는, 꽃을 보고 오는지, 열매 때문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새들이 과실수 주변으로 모여드는, 고요한, 정적인, 평화로운 풍경이다. 

새가 아니어서 모를 일이지만, 멀리 그림 밖을 쳐다보는 새의 시선이 생각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아마도 자기 생각에 빠져있을 것이다. 혹, 자기연민에 빠져있을지도 모른다. 허공을 쳐다보면서, 사실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 속에서 자기 내면과 만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자기반성적인 생각에 빠져있는 새가 그림을 정적으로 만든다. 반면, 하늘을 날아오르는 새는 분주할 것이다. 바쁜 새의 날갯짓이 화면을 움직이게 만든다. 생각이 흩어지지 않게 공기마저 흐름을 멈춘 듯 정적인 화면 속에 분주한 날갯짓을 가두어 놓은 것이 정중동의 미학을 실현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적요한 화면이 극적 긴장감을 품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이 그림들은 실제를 그린 것인가, 아니면 관념을 그린 것인가. 적어도 감각적 실제를 닮아있는 것이 실제를 그린 것 같다. 그러나 이런 감각적 닮은꼴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관념을 그린 것이다. 실제를 빌려, 감각적 닮은꼴을 빌려 작가 자신이 자연에 투사한, 그러므로 작가에게서 자연으로 건너간, 그렇게 자연과 작가가 상호작용하고 교감한, 작가 자신의 자연관과 세계관과 우주관을 그린 것이다. 현대인이 상실한 자연을, 자연감을, 자연의 성정을 그린 것이고, 이상향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 회화적 사실주의가 있다. 감각적 실제와는 무관하게 회화 속에서 실제를 얻고, 사실을 얻고, 현실을 얻는다. 그렇게 회화를 통해 새로운 실제가 열리고, 사실이 열리고, 현실이 열린다. 결국 회화란, 그러므로 그림을 그리는 행위란 그림 밖에 존재하는 감각적 실제를 소환해 편집하고 재구성하는 행위일 수 있다. 그렇게 저만의 세계관을, 우주관을, 자연관을 표현하고 표상하는 행위일 수 있다. 그렇게 화면 밖에 있을 보이지도 않는 허공을 쳐다보는 새의 시선이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의 시선이 될 수 있었고, 그림을 보는 우리 모두의 시선이 될 수 있었고, 존재의 시선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자연의 외관을 한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 될 수가 있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감각적 실제를 닮은 관념을 그린 그림, 그러므로 관념적인 그림이다. 작가의 그림을 관념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요인, 그러므로 관념적 장치를 보면, 우선, 작가의 그림은 흑백 모노 톤의 수묵이다. 흑백 그림(그리고 이미지) 자체가 어느 정도 관념적으로(그리고 내면적으로) 보이는 부분이 없지 않은데, 아마도 감각적 실제로부터 색채를 제거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수묵으로 자연을 그리는데, 사물 대상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그린다. 이런 정치한 묘사가 자칫 자연 도감에서나 볼 법한 판에 박힌 이미지로 흐를 수도 있는 일이지만, 내적 울림이라고 해도 좋을 서정적 아우라가 받쳐주면서 그렇게 빠지지는 않는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사실적인 묘사와 서정적인 아우라가 날실과 씨실처럼 하나의 결로 직조된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들숨과 날숨처럼 긴밀하게 상호작용하면서 유기적인 전체를 일구는 그림이라고 해야 할까. 

여기서 결정적인 것이 내적 울림이고 서정적인 아우라일 것이다. 그림을 시적으로 만드는 것도 그렇고, 유기적인 전체를 일구는 것도 그렇다. 그게 뭔가. 생명이다. 생명성이다. 생명력이다. 재현적인 묘사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감각적 실제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전통으로 치자면 정적인 가운데 동적인 정중동이, 기운생동이, 일본의 경우에는 하이쿠가, 그림자 속에 숨기면서 드러내는 음예(음영의 예술)가, 그리고 서양에서는 원래 멀리 있는 것인데, 마치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을 의미하는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가 이런 생명력의 표현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일조하는 것, 그러므로 어쩌면 결정적인 것이 먹의 운영이다. 먹은 아무리 짙은 먹색도 그 속에 투명한 깊이를 내장하고 있다. 언제나 어느 정도의 빛을 자기 속에 흡수하면서 투명한 범주를 포함하고 있는데, 그 자체 균일하지 않은 투명한 범주가 울림을 만들고 서정적 아우라를 만든다. 작가의 그림에서 보면 투명성을 머금은, 비정형의 얼룩들이 수놓아진 바탕화면이 그렇다. 그 얼룩들이 사계절의 변화를, 비, 안개, 바람, 눈과 같은 자연현상을, 그리고 들숨과 날숨의 상호작용과 같은, 그 자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러므로 감각적 실제의 바깥 아니면 그 속에 있을 생명력을 실현하게 해준다. 

그리고 여기에 먹색도 일종의 색으로 본다면, 또 다른 색으로 도입된 것이 금색(금박)이다. 그림에서 금박은 우선은 해와 달, 노을 그러므로 빛과 수면이 희롱하는 물비늘과 같은 자연현상을 정의하기 위해 도입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고려 불화에서의 장엄과 같은 위치로 자연의 지위를 승격시키는 의미도 있다. 원래 장엄이란 향이나 꽃 따위를 부처에게 바쳐 장식하는 일을 의미하는데, 자연으로 치자면 사람의 인식과 감각을 초월한 숭고에 해당한다고 해도 좋다. 작가가 자연에서 발견한 자연의 성정이 발현된 또 다른 한 경우라고 해도 좋고, 자연의 생명력이 자기표현을 얻는, 그러므로 생명력의 표상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먹그림이 화면 안쪽으로 투명한 깊이를 만들면서, 표면 위로는 금박이 숭고한 자연을 표상한다고 해도 좋다. 

자연의 성정이 사람의 인식과 감각을 초월한다고 했다. 그렇게 자연은 다만 자신의 부분을 내주어 그 부분으로 사람과 교감하는 것인데, 그러므로 그 교감에는 현실을 넘어서는 부분이 있고, 초현실적인 부분이 있다. 작가의 그림이 관념적인 그림이고, 그런 한에서 현실을 소환해 편집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현실 혹은 또 다른 현실을 여는 경우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림에서 보면 새와 함께 금붕어가 하나의 공간에 등장하는 것이 그렇고, 허공인지 물속인지 모를 경계 넘나들기가 그렇다. 

초현실주의로 치자면 사물의 전치(데페이즈망)에 해당하고, 후기구조주의의 논법으로는 맥락 결정주의에 부합하는 부분이 있다. 사물 대상의 의미는 사물의 본질 그러므로 사물에 고유한 성질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사물이 어떤 맥락에 속하는지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맥락이 달라지면 사물의 의미 또한 달라지는 것이며, 그렇게 재구성된 현실이 또 다른 현실을 열 수 있게도 되는 일이다. 그렇게 작가는 전통적인 화조화의 형식을 빌려 사람과 자연이 경계를 허물어 서로 동화하고 상생하는, 사람과 자연이 같은 방향을 쳐다보는, 자신만의 이상향을 그려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