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원의 문
한나 허(Hanna Hur) 전(11. 13일—12. 21, 두산아트센터 두산갤러리)
LA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한나 허(Hanna Hur)의 국내 첫 개인전은 전시장 가운데 마치 태극기의 궤처럼 마주보게 배치한 구조가 인상적이다. 가벽 안팎에 같은 크기의 그림 8개가 걸린다. 바깥은 회오리형 이미지와 나선형 이미지가, 안쪽은 같은 구조의 화면 위에 다른 크기의 하얀 면들이 있는 화면 4개가 순차적으로 배치되어 자못 엄격한 느낌이다. 두산 갤러리의 벽은 넉넉했지만 [Threshold]로 일괄 붙여진 작품들은 그림처럼 건 것이 아니라 설치형식이어서, 관객은 천정까지 이어진 건축적 규모의 가벽 안에 들어가거나 나올 때 일종의 보이지 않는 ‘문턱’을 넘는다. 밖은 무채색이 안은 유채색이 주조 색으로, 차이를 두었다. 종교시설이나 마법의 원에 들어서는 순간 그곳을 통과하는 의례자처럼 변화하는 것이다. 고정되어 있는듯하지만 잠재적 움직임이 있는 추상적 패턴으로 덮인 곳은 현대적 모스크같으며, 여기에 들어선 자를 긴장하게 한다. 최소한의 구조적 장치의 연출을 통해 시선에서 몸으로, 대상에서 상황으로 방점을 이동시키는 연극적 효과는 그림 안에 모든 것을 넣으려 했던 모더니즘적 추상을 넘어선다.


전시전경, 두산 갤러리, 서울, 2024, 사진 이의록(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두산갤러리)
서양 장기판 패턴처럼 나뉜 그리드에 명도가 다른 두 무채색이 교차로 칠해진 판은 일종의 기본 구조로 보인다. 색은 완전히 평면적으로 칠한 것은 아니지만, 그리드 구조는 그것이 평면임을 기하학적으로 확정한다. 화면의 중심에서 회오리가 시작된다. 가운데의 하얀 구멍은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이라면 소실점에 해당된다. 원근법적이지 않은 평면이지만 시선을 빨아들인다. 그리드 바탕에 얹혀 있던 다소간 불규칙적으로 칠해진 또다른 그리드는 펼쳐진 크리넥스가 말린 듯한 모습이 되어 나선형으로 배치되는데, 마치 사람들처럼도 보인다. 여기에서 보이던 형태는 저기에서 변화하며 그리드 구조는 미세한 변형도 파악할 수 있는 모눈종이 같은 역할을 한다. 구멍은 [Threshold]라는 키워드와 관련되어 차원을 달리하게 하는 통로로 생각된다. 윈도우갤러리에는 한나 허가 초청한 동료 작가 나미라(Na Mira)의 작품인데, 여기에도 구멍이 있다. 뭔가 금지된 붉은 방을 들여다 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매춘이 합법화된 네덜란드의 홍등가처럼 대로로 나 있는 붉은 창 옆은 거울의 방이다.
시선을 흡수하는 붉은 방과 달리 거울의 방은 그곳을 바라보는 자를 되비친다. 사각형 가운데의 구멍은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 기대되는 지점이다. 한나 허의 작품에서 물결인지 구름인지 알 수 없는 결이 느껴지는 어두운 바탕을 구획하는 것은 그리드다. 그리드 위에 허연 얼룩이 나선형으로 줄지은 사람처럼 배열되어 있다. 그들은 저편의 하얀 구멍에서 나오거나 그리로 가는 듯이 보인다. 마주보고 있는 4개 화면의 하얀 사각형의 크기를 달리해서 마치 차원의 문이 열리는 듯하다. 물론 반대로 보면 닫히는 중일 수도 있다. 만약 관객이 계속 안쪽을 돌면 열리고 닫힘은 계속될 것이다. 어떤 창/문의 크기가 달라진다 함은 차원 이동에 대한 기대치를 보여준다. [Threshold]라고 붙여진 제목은 정지된 구조가 변환하는 문턱을 가리킨다. 필립 볼의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임계질량에서 이어지는 사건들]에 의하면 어떤 문턱 값(threshhold)을 넘어설 때 상전이(phase transition)가 일어난다. 그에 의하면 상전이는 수많은 구성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거동의 갑작스럽고 전체적인 변화이다.

한나 허, 〈Threshold〉, 2024, 판넬 위 캔버스에 색연필, 아크릴, 플래시, 안료

한나 허, 〈Threshold〉, 2024, 판넬 위 캔버스에 색연필, 아크릴, 안료

한나 허, 〈Threshold〉, 2024, 판넬 위 캔버스에 색연필, 아크릴, 플래시, 안료

한나 허, 〈Threshold〉, 2024, 판넬 위 캔버스에 색연필, 아크릴, 플래시, 안료

윈도우 공간 설치, 나미라, 〈Chord〉, 2024, 한나 허 개인전 《한나 허 8》 전시 전경
창 크기의 변화는 컴퓨터 화면과도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마우스로 드래그를 잘하면 여러 파일을 한 번에 옮길 수도 있고 화면을 이동할 수도 있지 않은가. 붉은 바탕 위에 얹힌 화이트는 일률적인 바탕색과 달리 차이가 있다. 가벽의 배치를 포함한 기하학적 구조의 형태는 질서도가 최고조에 이른, 요컨대 에너지가 집약된 상태를 말하며, 이후의 물리적 과정은 에트로피의 변화를 예기한다. 고체에서 액체, 기체로 변환되는 통상적인 물리적 과정에도 문턱이 있다. 하지만 그 순간을 육안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분자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은 사실 그자체가 아닌 실재에 대한 모델이며, 진리에 도달할 수는 없고 그에 최대한 가까워지려는 노력이다. 그조차도 통계학적이다. 과학은 추상이며 추상미술이 실재로부터 정신적인 가치로 방점을 이동시켰을 때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한나 허의 [Threshold]는 양이 질로 전화하는 시점/지점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인 셈이다.
출전; 아트인컬처 2024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