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목판화가 김준권(1956- )이 보낸 두툼한 화집 한 권을 받았다.『김준권의 국토-板刻長征(판각장정)』. 가로 세로가 30cm에 두께가 무려 4cm에 달하는 크고 묵직한 책이다. 내용을 살펴보니 각력(刻歷)이 어느덧 40년에 달한 김준권 목판화 세계의 변천이 꼼꼼하게 편집돼 있어 이 책 한 권이면 그의 목판화 세계를 명료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이 화집은 전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전시장 전관에서 《2025 신년기획초대전 김준권의 국토 板刻長征(판각장정)》(1.17-3.30)전에 맞춰 발행된 것이다. 전시의 규모나 내용 면으로 볼 때 목판각백(木板刻佰: Master of woodcut) 김준권의 지난 판각 40년의 세월을 돌아보는 회고전으로써 손색이 없다. 이번 전시에 1985년부터 작년까지 김준권이 제작한 목판화 250점이 출품됐는데, 흑백 목판화 25점(1985-1991), 유성 목판화(1992-2024) 125점, 수묵·채묵 목판화 100점(1995-2024)에 달한다.

『김준권의 국토-板刻長征(판각장정)』, 2025
화집의 후반부에 수록된 도판 목록을 살펴보면 1985년 채색 고무판에서 시작한 김준권의 판화 세계는 이듬해에 목판으로 전환, 현재에 이른다. 그 세월이 무려 40년이다. 그렇다면 수묵목판, 유성목판, 채묵목판, 단색목판, 다색목판 등 다양한 판법을 보이고 있는 김준권의 목판화는 과연 어떻게 해서 추동(推動)된 것일까? 여기서 잠시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목판화 전문 작가로 살게 된 건 전교조 결성과 활동으로 인해 해직되어서다. 자연스레 재야단체인 ‘민족미술인협회’ 상근 활동가로 지내면서 본격적으로 전업 판화가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김준권은 해직 뒤 자유인이 돼 바람처럼 떠돌며 오로지 판화 만을 위한 유랑의 세월을 보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눈과 발로 사생한 작업”의 시기를 거쳐, 목판화를 배우기 위해 국내는 물론, 중국과 일본 등 목판화의 전통과 역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발품을 팔고 다녔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용주사의 부모은중경, 인사동의 고판화, 중국의 수인(水印) 목판화,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 등등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는 훗날 김준권의 목판화에 훈습돼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는 저변이 되었다.
김준권의 목판화는 ‘마음’의 예술이다. 그는 마음을 다해 “우리 땅-우리 시대의 진경”을 찾고자 했으나, ‘단순한 목판화 기법’으로 담아내기에는 부족하여 목판화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판각기법을 연마해 나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에 대한 문제에서 ‘자연’에 대한 관심으로 소재의 폭을 넓혀 나갔다. 조국의 산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991년에 제작한 〈붉은 산〉(목판에 채색)은 김준권 판화세계의 분수령이 되는 작품이다. 나는 1993년에 쓴 글에서 이 작품을 가리켜 “해남의 바닷가 한 모퉁이를 무심하게 담아낸 이 한 폭의 풍경화는 실로 만 점의 작품에 필적할 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조선의 역사를 함축해서 보여주며, 나아가서는 역사 자체를 환기시켜 준다. 붉은 산은 침묵하되,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발가벗기며, 메마른 들판은 헐벗었으되, 능히 ‘이성의 간계’를 꾸짖을 만하다.”고 썼다.
2021년에 제작한 〈청산에 살어리랏다〉(채묵목판, 90×336cm)는 대작이다. 청색 단색조를 띤 높고 낮은 산등성이들이 겹쳐 일망무제로 펼쳐진 영락없는 조국 산하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 관객은 마음속에서 이는 미묘한 파동에 접속돼 이 풍경이 곧 몸의 요람임을 느낀다.
40여 년간 갈고 닦은 김준권의 목판화에 대한 애정이 물감과 나무, 종이를 통해 ‘물질의 정신적 전이’를 체험하게 만든 까닭이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흐르는 이심전심의 미묘한 경지, 그것을 칼 한 자루에 승부를 건 시대의 낭인(浪人) 김준권이 고된 여행 끝에 지금, 우리에게 되돌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