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시작  

서울 오후 3시 전 (2024.11.7.—2024. 12. 8, 성곡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서울 오후 3시’는 2000년대 이후 새로운 감수성으로 주변을 바라봤던 작가들의 회화 전시이다. 참여 작가들은 거의 70년대 출생으로, 그 시기에 30대 작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세대에 속한다. 이 전시의 기획자인 이은주(독립 기획자, 미술사가)는 ‘2000년대 초 한국 미술계에는 이전 시대의 민중미술이나 극사실주의와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를 달리하는 신세대 구상미술 작가들이 대거 등장했다’고 진단하면서, 이 전시는 ‘2000년대 참여정부 시기의 대안공간이나 신진작가 지원제도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2000년대 한국 구상미술의 경향을 조명’한다고 밝힌다. 80-90년대 같았으면 30대는 이미 ‘잔치가 끝난’ 세대지만, 2000년대부터 청년기는 훨씬 더 늘어난다. 사회의 제도화가 더 진척된 탓이다. 그 시기는 각지의 문화재단의 설립과 더불어 문화예술 관련 공공지원이 확대되기 시작한 시기로, 젊은 작가들에게는 미술시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공간이 펼쳐진 셈이다. 



김수영(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성곡미술관에 있음)


그 시기에도 여러 뜨거운 문화적, 사회적 사건들이 있었지만, 제도화, 관료화의 국면은 더욱 강해졌다. 일상은 더욱 차가운 자본/노동의 질서에 의해 규정돼가고 있었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기획자가 주목한 것은 매체적 환경으로, 디지털 카메라의 일반화이다. 사진은 19세기에 발명된 이래 미술과 긴밀한 상호관계를 가져왔지만, 디지털 국면을 통해 질적인 변곡점이 이루어진 것이다. 2010년 이후부터는 스마트폰의 업그레이드로 사진의 대중화는 더욱 날개를 달게 된다. 미디어의 편재와 체화가 보편화된 지금이 시작된 시기다. 하지만 모든 시작은 애매하며, 그것이 끝나갈 쯤에야 처음이 소급된다. 21세기의 1/4이 지난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닐까. 우리와 풍경의 근저를 바꾸어 가던 근본 동력은 경제성장이었는데, 이제 그 끝이 보이기 때문이다. ‘서울 오후 3시’라는 시적인 전시 부제의 영문해석 ‘Cloudy 3pm’은 50여 점의 작품이 걸린 전시의 전반적인 느낌을 요약한다. 그들의 서울은 굉장히 쓸쓸한 곳으로 다가온다. 


작가들은 홀로 조용히 무언가 끝없이 사라지고 생겨나는 거리를 지나치며 사냥꾼처럼 꺼리를 찾아다녔다. 누군가 3시는 무엇인가 새로 시작하기도, 끝내기도 애매한 시간대라고 말한 적이 있다. 2000년대 이후 거의 서울에 있었던 필자에게도 오후 3시는 갤러리들이 문 닫기 전에 작품을 보러 가야 하는 시간대이기도 해서 왠지 익숙하다. 출퇴근 시간대의 서울은 3시와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 풍경들이 과거처럼 보이는 것은 이제 그런 느릿했던 시간은 가고 극단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착취가 더 가속도가 붙으면서 각종 사건사고의 규모가 달라지고, 집단 간의 이해관계도 보다 즉각적으로 파악되고 첨예해졌다. 전쟁의 폐허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한국은 기술이나 속도에 대해 매우 민감하고 이것이 물질적 발전은 물론이고 ‘K컬쳐’를 비롯한 일련의 성과를 낳았다. 하지만 이 전시의 작가들은 광란의 속도가 지체되는 부분, 알고 보니 발전도 아니었던 현상들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노충현



이제



이문주


기획자가 이 전시의 작품들을 이전 시대의 민중미술이나 극사실주의와 비교하면서 좌표를 설정한 것은 설득력 있다. 특히 사진의 경우, 이전 시대는 주체와 매체에 방점을 찍었다.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 1980년대는 역사의 주체로 민족과 민중이 거론되었고, 극사실주의는 매체의 중성적인 즉물성에 주목했다. 비판과 운동의 주체인 전자는 뜨거웠고, 후자는 차갑게 물화된 질서의 표면에 탐닉했다. 그 두 기준과 비교하자면 ‘Cloudy 3pm’의 온도는 미지근하다. 디지털 국면으로의 전환을 통해 누구나 사진을 장난감처럼 다루면서 이미지를 손쉽게 소통할 수 있게 되자, 화가는 새삼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고민했다. 작가는 주체도 객체도 아닌 그 사이를 자기 영역으로 삼았다. 누구도 사진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로운 육안을 자신할 수 없고, 사진을 매개로 한 스펙터클은 ‘화가’의 영역을 넘어선 곳으로 빠져나가 외재적 환경으로 되돌아왔다. 하지만 객관적인 대상은 여전히 중요했다. 


객관적 대상은 주체와 연동된다. 결코 독립적이지 않다. 과학기술 분야만큼은 아니어도 객관적 대상은 변형을 위한 기본 축이며, 차이를 가늠하는 기준이다. 사진은 기록적인 면에서 경쟁력이 있다. 예술이 있는 한 예술가적 주체는 여전히 중요했지만, 그들은 더이상 시대를 이끈다고 믿어지는 전위도 아니었다. 인터넷을 비롯한 정보화는 주체의 해체까지는 아니어도 재구조화를 가속시켰다. 1990년대 대중문화와 신선하게 만났던 ‘신세대 문화’가 있었지만, 일제히 화려하게 피었다가 세기말 1997년 외환위기는 모든것이 뛰쳐나와 흥청대는 듯한 시대의 풍요와 자유를 주춤하게 했다. 수출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주변 정세에 늘 출렁거렸다. 최경영 전KBS 기자는 [프레시안](11.30)에서 ‘2000년대 이후 IT 붐과 중국의 WTO 가입으로 중국 시장이 커지면서 한국 경제도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최근 정부의 미국에 기울어진 경제정책으로 한국 경제가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고 말한다. 


박주욱



서동욱



이광호


디지털 타임스 12월 1일자 기사는 ‘한국 경제가 1%대 성장률인 저성장 문턱에 섰다’는 진단을 내놨다. 한국은 2000년부터 동력을 바꿔가며 발전을 지속했지만, 작가의 감식안으로 읽은 시대의 징후는 난무하는 가상현실과도 거리를 두고 무언가 훅 빠져 나가는 듯한 현실을 직시했다. 그들의 그림에 등장하는 광경이나 인물이 공허해 보이는 것은 더이상 민중도 시민도 대중도 곁에 없는 단독자들이어서 아닐까. 이전 보다 많은 것이 자본으로 순식간에 결정되는 시대, 공동체나 인간적 체온은 찾기 힘들다. 전시는 크게 3개의 장으로 구별된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일상을 그린 ‘서울에서 그리다’, 서사를 이끄는 잠재적 주인공이 있는 ‘풍경 안에 그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진과 그림이라는 매체의 관련에 주목한 ‘사진에서 그림으로’가 그것이다. 물론 3개의 장은 서로 겹치기도 한다. 그들에게 도시는 건물, 시장, 공원 등 여러 폭을 가지면서 보다 먼 거리에서 포착된 심미적 풍경이다. 


먼 풍경을 쭉 당겨오면 그 풍경을 만든 이들이자 그 산물인 사람들이 나타난다. 사진과의 관계는 연속 촬영, 네가티브, 트리밍, 플래쉬 효과 등 여러 예시가 등장하며, 그림의 원천이 된 사진 아카이브를 함께 제시한다. 사진 또한 대부분 해당 작가가 찍은 것이지만, 양자 대조의 관계 속에서 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김수영의 [동부화재 건물](2009)은 숨막힐 듯 똑같은 구조지만 해가 비치는 수많은 창은 하나도 반복되지 않는다. 작가는 획일성 속에서 무한한 차이의 계열을 찾아내 회화로 옮긴다. 그것은 한국의 근대화(모더니티)와 모더니즘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노충현의 [놀이방](2006)은 대초원을 떠올리는 녹색 바닥, 좁은 창으로 들어오는 바깥의 빛과 공기, 갇힘을 잊기 위한 초라한 오락거리 등이 있다. 그가 관찰한 동물 우리는 가짜들로 이루어진 세계다. 그의 작품에서 시뮬라크르는 아직 인간적 시선이 남아있지만, 인간적 온기가 부재한 텅 빈 무대는 이후 대세가 된다. 



박진아



강석호


이제의 [금호 터널](2005)은 도로를 내고 산의 아랫자락을 뚫었을 때 그것은 자연의 심각한 변형이었지만, 변형된 굴곡 위에는 또 나무들이 자라고 집들이 자리함을 보여준다. 그것들은 또 사라질 것이다.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그 동네는 그 시기의 공기를 오롯이 담아낸다. 사진은 세계를 채집하며 한 장으로 응결된 시공은 단절과 연결을 반복한다. 이문주의 [유람선](2009)은 금호동 철거 장면을 출발로 한다. 파괴와 관광이 건설과 노동보다 더 부가가치가 커지는 사회의 초상이다. 전쟁과 재난의 현장을 관광하는 ‘다크 투어리즘’은 모든 것이 공개 영상의 소재가 되는 시대에 각광받는다. 작품 속에서 사진의 흔적을 굳이 지우지 않은 작품은 현실을 낯설게 하는 또 다른 효과다. 사진기 앞에 정면을 취한 젊은 남자를 그린 서동욱의 작품에는 후레시가 터진 흔적이 역력하다. 박주욱은 네가티브 필름의 색채 반전을 유화로 옮겼다. 


흔한 일상을 살짝 비트는 반전의 기술이다. 사람들은 자연이나 환경, 인간 보다는 주로 기계에다 말하고 듣고 본다. 이광호의 인터뷰 시리즈는 작업실의 지인들을 사진으로 찍고 인터뷰하면서 유화로 정밀 묘사한다. 대상과 그에 대한 사진을 동시에 놓고 그리는 이광호는 사진의 광학적 표면을 회화의 촉각적 언어로 번역한다. 박진아의 [김밥 먹는 Y](2004)는 일상의 소소함을 연속 사진처럼 담는다. 찍은 것보다 더 많이 삭제하고 제대로 정리도 못할 만큼 쌓이는 사진들은 무의미한 찰라의 순간들 또한 축적한다. 결정적 순간이 이전 시대 리얼리즘의 핵심이었다면, 이제 코드화된 현실에는 잡음 또한 가득하다. 강석호의 작품은 사진 특유의 단편적 시점이 두드러진다. 시사 잡지의 일부에서 선택된 부분은 정치판같은 공적 무대에 선 인물임을 말한다. 맞잡은 손이나 넥타이는 공적인 신뢰를 기대한다. 회색빛 관료주의의 표현에 사진적 관점만큼 적절한 것이 없다. 


출전; 월간미술 2025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