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타자와의 공존을 위한 조건
이선영(미술평론가)
미지의 길을 가는 자의 고독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에서 ‘간첩’은 지금도 금기다. 이응노는 1967년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부당한 옥살이를 했지만, 이후 더 단단한 작가로 거듭났다. 그가 감옥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작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인들의 경우 글을 쓰기 위한 몰입의 시간을 ‘글감옥’이라고도 표현하지만, 물질적 재료를 다루는 미술은 문학보다는 몸의 자유가 더 필연적이다. 먼지로 사라진 당시의 권력자들과 달리, 이응노의 의지는 예술작품을 통해 시간의 시험으로부터 살아남았다. 이응노라는 거목과 함께 숲을 이룰 작가들을 모은 이응노 미술관의 기획 전시는 감옥에서의 시간에 먼 미래였을 ‘서기 2000’년도 사반세기가 지나가는 즈음, 작업에 몰두하는 이의 조건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묻는다. 굳이 감옥에 있지 않아도 작가들은 고독하다. 작업하는 삶이 가난해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 가능하든 불가능하든 전례 없던 미지의 길을 가는 예술의 본질 때문이다.
작가뿐 아니라. 작품 자체가 홀로서야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창조의 유일한 법칙은 구성물이 혼자 힘으로 버텨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저 홀로 서게 만드는 일, 그것이 예술가에게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말한다. 예술가는 대개 동일한 목표와 수단을 전제하는 지름길을 위한 경쟁 대신에, 자신만의 감각을 발휘하여 길을 간다. 그 길은 대개 우회로나 오솔길이다. 세상은 고속도로가 아니라 미로이기에 어느 편이 더 지름길인지는 모른다. 작업을 방해하는 수많은 잡다한 일들 외에, 작업은 그 자체가 보이지 않는 문턱을 넘는 행위다. 예술은 먼 희망 또는 욕망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목표를 위한 자기만의 방법을 가진다. 사회의 지배적인 수단은 효율적이지만 소외를 야기한다.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근대사회에서 때로는 수단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무엇을 위한 경쟁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빠진다. 계몽도 마찬가지지만, 도구적 합리성에는 부조리의 가능성이 내재한다.
예술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매번 새로이 시작한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작품은 입문이며 창시라고 말한다. ‘예술은 우리를 세계 이전, 시작 이전으로 인도한다. 예술은 우리를 내밀성도 공간도 휴식도 없는 외곽지대 쪽으로 향하게 하였으며, 실수와 방황 속으로 발을 들여놓게 한다...작품은 그 자체가 시작의 경이로움’(블랑쇼)이다. 목표설정이나 이를 위한 수단의 차이 때문에 예술가는 고독하지만, 동시에 그 조건 때문에 또 다른 고독한 인간과 소통하게 한다. 고독은 서로를 연결시키는 인터페이스가 되는 것이다. 정보혁명을 통한 소통의 인플레 속에서 고독의 그림자는 더욱 짙어진다. 소소한 나르시시즘의 거울이 된 SNS, 그리고 고장난 녹음기 같은 설전의 반복이 공식적 소통인 양 행세한다. SNS를 비롯한 정보혁명은 소통에 대한 엄청난 가능성을 열어주었지만, 디지털 알고리즘의 독재로부터 자유롭기 힘들다. 미시적, 거시적 차원에서 웅웅거리는 소음이 가득하다.
예술에 우호적일 수 없는 환경에서 예술적 역량을 최대한 펼치려면 현실 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활동은 최소화된다. 하지만 이러한 일보 후퇴는 압축되어 있던 용수철처럼 더 큰 에너지로 분출된다. 자신을 갈아 넣은 작품을 통한 소통에서 고독은 필요조건인 셈이다. 작가는 자신으로부터 출발하고 다시 자기로 회귀하지만, 자기동일성을 확인하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동어반복이 아닌 차이를 위한 그들의 시도는 타자를 중시한다. 자기 안의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 타자와 대안적으로 소통한다는 점에서, 그들의 고독은 전방위적으로 뚫린 소통의 실핏줄을 활성화시킨다. 작업을 통해 자신과의 대화에 열중하지만, 그 대화는 열려있음으로 인해 사회적 메시지까지 울려 퍼질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김명주와 박운화는 전자에, 김병진과 김윤경숙은 후자에 속한다. 겉보기의 다양함의 연결망은 치열한 작가 의식으로부터 비롯된 공통된 감각이다.
모든 것을 쏟아야 하는 작업이라는 큰 투자에 앞서 홀로 선택하는 자의 고독이 있다. ‘고독;문이 닫히고, 또 다른 문이 열릴 때’(이응노 미술관 관장)라는 표현처럼 이 전시의 작가들은 작업을 통해 스스로를 유폐시키지만, 작품이라는 또 다른 문을 통해 세상으로 나온다. 나오기 위한 조건은 들어가기이다. 거짓 풍요의 포만감으로 가득한 시대 작업 안에 들어가야 가능한 몰입은 더욱 어렵다. 예술은 ‘나는...’이라는 주어로 시작되는 확실한 소통과 거리가 있다. 세상이나 내가 확실하다면 재현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전시의 작가들은 재현이 아니라 생성을 통해 스스로를 갱신해 나간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예술가는 자기의 삶과 자기의 일에서 자신을 아직도 도래할 존재로 느낀다고 말한다. 그것은 단순한 머뭇거림이나 의심이라기 보다는 ‘이 세상은 항상 세계의 현실화, 실현’으로 보는 관점의 결과다. 작품이 미래에 속하기 때문에 작가는 스스로를 부재로 느낀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불확실성 속에서 ‘우연에 속하는 것을 법의 영역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블랑쇼) 작업한다.
1. 김명주; 극도의 소진을 통한 도약
크든 작든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관객 앞에 서있는 존재는 시각적 관습상 인간이다. 게다가 작품 [Homme Plante](2020)에는 사람(Homme)이라는 키워드도 있지 않은가. 식물(Plante) 또한 태양을 향한 지향성 때문에 서있는 인간을 반향 한다. 식물이 걸쳐있는 삼계(三界)처럼 서있음은 서로 다른 계를 연결하는 조건이 된다. 김명주에게도 식물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자연을 대표한다. 작가는 이국땅에서 홀로 작업할 때 ‘어머니같은 자연의 풍성한 형태와 다양성의 비옥함에 드넓은 위로를 받았다’고 말한다. 지금도 유럽 여러나라에서 전시를 계속하고 있는 그는 ‘유럽의 땅을 밟았을 때 보았던, 다른 모습을 한 산의 생김새, 땅, 하늘, 나무들, 식물들은 자연에 매료된 또 다른 자아를 일깨워 주었다’고 말한다. 그는 어디에나 있으며 더 근원적인 실재인 녹색 자연과 계속 접촉했다. 떠남을 통한 고립은 그러한 접촉에 필연성을 주었다.
익숙하지 않은 또 다른 계에 스스로를 던진 정체성은 더 출렁거렸다. 김명주의 작품은 제목을 통해서도 마주한 형상과 대화를 개시하는 힌트를 준다. 부드러운 흙은 의도와 무의도가 함께 하여 형상이 만들어지고, 도자의 단순한 후처리 방식이 아니라 표현적인 물감의 역할을 하는 유약은 아래로 줄줄 흘러내리는 형상을 통해 지상에 발 딛고 서있는 존재의 운명인 삶의 중력을 표현한다. 그의 작품은 흙이나 유약 같은 원재료의 속성을 최대한 활용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재료가 감각이나 지각 혹은 정서 속에 완벽하게 스며들지 않고서는 감각이 재료 안에서 실현될 수 없다’고 말한다. 체액처럼 흘러내리는 이름붙일 수 없는 색, 그리고 이미 체액도 다 빠져나간 듯한 밝은 형상이 마주한 작품은 극도의 소진에 따른 반등의 순간을 암시한다. 작가의 고독도 마찬가지다. 고독은 타자와의 진정한 소통을 위한 조건이다. 홀로 서있을 수 있는 자만이 공동체와 함께 할 수 있다.
제작하는 수고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유의 시간들은 작가로 하여금 두상에 주목하게 했다. 그의 작품은 숙고 속에서 생겨났다 스러지는 것들은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극히 일부만이 현실화 되는 과정을 말한다. 간밤에 꾸었던 꿈에 대해 우리는 일부만 기억하고 해석해 낼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시간이 부재한 무의식은 어딘가에 잔여물로 남아 상층부의 의식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현실성을 위한 더 거대한 잠재성은 늘 적정한 한계를 넘쳐 흐른다. 넘침만이 한계를 확실히 한다. 예술은 한계를 가로지른다. 전쟁이나 축제, 혁명을 제외한다면 현실에 한계를 가로지를 수 있는 여유는 많지 않다. 바타유가 주장했듯 예술은 사치이고 낭비이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강렬한 소통이 가능하다.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바타유를 참고하면서 작품은 ‘죽음의 쾌활한 긍정 속에서 태우고 소멸시키고 소비하는 기호들의 포트래치의 일종, 요컨대 희생이요 도전’이라고 말한다.
데리다는 블랑쇼 또한 바타유의 사유를 공유한다고 보는데,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진정한 예술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생명을 소진하고, 리듬 있게 스스로를 발산하여 공간을 증대시킨다’고 말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작가의 삶은 ‘정복하기 위해서 혹은 획득하기 위해서 어떤 결과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소비 속에 희생된다’ 작가는 ‘존재의 행복한 소진을 통해서 변모’(블랑쇼)한다. [생각에 잠긴 두상VI](2023)은 부풀어 올랐다 흘러내렸다 하는 사고 과정을 담은 두상이다. 작가는 ‘작업이 무아지경에 이르면 그 형태 자체가 주는 우연을 따라가는 알레아토릭적 방법으로도 하며 내적으로 유영한다’고 말한다. 불에 구워져 단단하게 고정되기 전에 최대한 과정을 향유한다. 김명주의 작품을 하나의 기능을 향해 형태를 마감하는 작업과 달리 매우 복잡해서 완성된 작품도 과정적이다. 색감뿐 아니라 형태 또한 보는 방향에 따라 모두 다르다.
작품 [어둠 속을 뚫고 가는 마음의 빛](2018)은 [오즈의 마법사], [행복의 파랑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주인공들 같이 온갖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나아가는 소녀의 여정이 떠오른다. 정해진 안전한 길이 아니라 온갖 모험과 시험으로 가득한 길이다. 머리, 또는 얼굴의 경계는 없다. 죽음 또는 광기의 상태다. 하지만 예술은 광기도 질병도 무의식도 아니다. 그것들과의 대화 또는 극복이다. 경계 위에 존재하는 예술가의 정체성은 직선이든 미로든 끝없이 나아갈 수 밖에 없다. 몸이 아니면 마음이라도 나아간다. 그때 필요한 것은 어둠의 영역에 잠겨있는 것들을 비추는 빛이다. 그 빛은 어디선가 조명되는 것이 아니라 자체 발광해야 한다. 몸의 기관에 조명을 진화시킨 심해어처럼 ‘어둠 속을 뚫고 가는 마음의 빛’이다. 작가는 ‘생명의 에너지, 이해 너머의 신비로운 영역까지 흙을 통해 표현’한다. 작품은 ‘나를 떠나 새로운 세계의 주체로 다시 태어나는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
2. 박운화; 오래된 기억과의 대화
사진으로 일순간 찍히거나 붓으로 한 번에 그려지기 보다는 여러 겹의 과정이 필요한 판화는 흔적이나 기억의 형상화와 어울린다. 박운화의 작품은 ‘어렴풋한 윤곽만을 품은 희미한 기억들’을 담고 있으며, 이는 작가 안의 풍광들이다. ‘손은 내밀어 말을 걸고 싶은 형상들은 시간의 저편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작품 [Memento](2022)에서 텍스트처럼 짜여진 형상들 내부는 또 다른 선들로 빼곡하다. 작가는 바람이나 물결처럼 또 다른 주름을 추가함으로서 시간의 힘을 암시한다. 생로병사나 기승전결처럼 시간은 변화의 추동력이다. 변화는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다. 구조처럼 모든 것이 동시에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축을 따라 기억하고 쓰고 변화시킨다. 구조를 강조하는 현대사상의 경향이 시간성을 억압한다. 구조주의는 시간의 단면을 물신화한다. 그것이 주는 영원함과 부동성은 나름의 장점이 있다.
가령 정물을 완벽하게 재현하고서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고 말하는 바로크 시대의 그림들은 재현적 동일성에 부재한 것을 암시한다.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구조적 동시성 자체는 안도감을 주지만, 결국 동시에 존재하는 것도 하나씩 차례차례 기술해야 한다고 말한다. 박종화는 글을 쓰듯이 이미지를 만든다. 그의 작품에서는 어느 요소도 다른 것으로 변모할 수 있다. 그 어떤 칸들도 열리면 저 너머로 가는 통로가 된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변태하는 종인 나비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하나 드러나는 미지의 길 그것이 인생이고 예술이다. 현대사회는 자동화 기술과 관료적 형식주의를 통해 그 과정을 단축시키려 하지만, 그 지름길의 끝이 어떨지는 알 수 없다. 작품 [어간](2025)에서 그릇 모양의 식물은 무엇인가를 담는 그릇이기도 한 예술이 자연스럽기를 기대한다. 식물이 성장하거나 시들면서 무엇을 어떻게 담는가도 달라질 것이다.
심연에 뿌리를 두고 빛을 향하는 식물, 그 과정 중에 생겨나는 기운들을 오롯이 모으려는 이상적인 그릇(器)인 예술과도 유사하다. 화면을 가르는 수많은 선들, 겹겹의 공간은 작업의 길이 자유로움과 불확실성을 동시에 가짐을 알려준다. 예술은 일방적 방향성에 기초한 기계적 확실성과 거리가 있다. 박운화의 작품에서 책자 이미지는 겹쳐쓰고 거듭해서 해석해야 하는 텍스트가 된다. 그는 ‘내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혼잣말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말이 되든 안되든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주는 비망록같은 작품이다. 작가가 담아낸 것들은 ‘책상 위에서, 책갈피마다 끼워 둔 어떤 순간의 채집과 시간의 기록’이며, ‘변용된 내 모습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흔적의 기록’, ‘채집’의 행위는 그의 작품을 ‘자화상’으로 만든다. 이미지와 텍스트의 근접성은 문예사조사에서 최초의 인쇄물이 가졌던 혁명적 잠재력이나 동양에서 시서화 일체의 전통과 조응한다.
그가 제작한 책들도 같은 맥락이다. 작품 [책상 위의 기억](2020)에서 떠나는 배, 날아가는 나비, 자라나는 식물, 흐르는 음악 등은 모두 시간이라는 매개로 한다. 기억 또한 시간이다. 시간적 과정 속에 생멸하는 존재들은 시간의 축을 따라가는 서사를 가진다. 시간의 시험은 무한회귀 사상처럼 필연적인 것만을 되돌아오게 한다. 같은 책을 다시 읽을 때의 경험처럼 반복은 차이를 가져온다. 작가는 ‘판화의 매력에 빠져 작업하다 보면, 가끔 평면에서 벗어나고 싶은 때가 있다. 반복의 반복과 그 속에서의 변주’이다. 그가 손수 만든 책들은 평면이 풍부한 부피를 갖춰 현실로 나온 것이다. 주어진 코드를 선택하는 것에 더 익숙해진 정보 소비사회에서 책이 주는 촉감은 그 자체로 심미적 체험이 된다. 미디어 기기로 빠르게 내려받아 읽고 쓰는 시대지만 정독해야 할 때 우리는 종이로 프린트한다. 즐겨 듣는 디지털 음원 또한 소장용 앨범으로 따로 구입하기도 한다.
예술은 단지 정보가 아니라 정보를 가능하게 하고 정보를 변형시키기도 하는 과정에 방점이 찍힌다. 현대사회는 전/후의 과정을 생략한 채 완제품만을 소비하도록 유도한다. 그 모든 과정을 생략해 나가는 시대에 인간은 주어진 자극에 반응하는 단말기같은 모습으로 퇴행한다. 책을 만들고 읽고 쓰는 것에는 그것이 가졌던 최초의 종교적 동기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새겨져 있다. 책은 그의 작품의 내용과 형식 모두와 친근하며, 초창기의 개인전인 ≪내 안의 풍경, 책 속의 풍경≫(2009)과 ≪날아오르는 꿈≫(2010)을 한밭 도서관 갤러리에서 열기도 했다. 텍스트라는 형식은 텍스트주의자들의 비유처럼 시작도 끝도 없이 서로를 참조하는 끝없는 사전찾기와 같은 시간적 과정을 함축한다. 자신과의 대화나 기억을 중시하는 그의 태도 또한 그렇다. ‘낡은 기억 속을 오래도록 걷는’ 작품은 관객에게도 이러한 느릿한 사유의 운동을 권유한다.
3. 김병진 ; 죽음의 문명을 극복하는 긍정의 힘
김병진의 작품 [LOVE LOVE LOVE No. H-24034](2024)에서 한칸 한칸이 세포나 감옥같이 구획된 공간에는 무엇인가 하나씩 자리한다. 명확하지 않은 외곽선임에도 각각이 한 사람의 이미지도 다가온다. 그들 각각은 온전한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애쓴다. ‘2019년도부터 이어지는 작품의 내용에는 반복된 지장 하나의 표현에 한 명의 인류란 의미를 부여하였고, 수많은 작은 공간 속에 한 알의 밀알처럼 정해진 공간에 손도장을 찍어넣어 단 하나의 존재, 인간이 삶과 죽음으로 희생된 모습’으로 보았다. 그가 직접 밝히는 표현기법은 ‘농묵을 붓으로 거칠게 반복적으로 화면에 칠하거나 먹을 뿌리고 하는 행위를 반복 중첩해 거친 화면을 만들고 주된 형상의 이미지를 뜯어내기와 스크래치로 표현하고 화면을 뜯어낸 작은 사각 공간에 손가락으로 지장을 찍기를 반복한다.’ 화면에 구획된 사각 공간들에 수묵 손도장으로 찍은 형상들은 생과 사의 기록이 되었다.
우주가 먼지로부터 태어나고 먼지로 사라지듯이, 인간은 얼룩에서 얼룩으로 이어진다. 작가가 전쟁하는 세계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던진다는 맥락에서 보자면 개인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는 각자의 방은 감옥이나 관으로 변할 수도 있다. 또한 그것은 무인기가 도망가는 이를 겨누는 시점 일 수도 있다. 생존을 위한 움직임들은 무심한 기계 눈에 포착된 살아있는 과녘이 된다. 작품 [LOVE LOVE LOVE No. H-24068](2024)에서 여려 겹으로 작업하여 깊은 공간감을 주는 어둑한 배경 위의 사람 ‘인(人)’자와 손바닥 이미지가 죽 배열된 듯한 화면은 비밀스러운 상징으로 다가온다. 두 이미지의 조합은 사람에게 있어 손의 상징성을 말한다. 대지에서 앞발을 해방시킨 인간은 도구와 노동을 통해 엄청난 발전을 이루어왔지만, 도구는 동시에 무기였고, 노동은 동시에 착취였다.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노동에서 발생하는 잉여가치 분배의 문제는 역사의 진보를 가늠하는 잣대가 됐다.
하지만 극단의 경쟁을 요구하는 노동의 사회에서 전쟁과의 거리는 매우 가깝다. 그의 작품 속 손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자율화시킨 위대한 인간성보다는 그 부정적인 결과인 고통과 단절을 떠올린다. 어두운 심연 속에서 떠오르는 상형문자와 손은 ‘더 이상은 안돼!’라고 경고한다. 전쟁은 현대의 생산력과 관련된다. 파괴하고 다시 건설하는 무한 반복이 자본의 이해관계에 들어맞기 때문이다. 소수의 이익을 위해 국민 다수를 동원하는 전쟁은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와 관련된다. 각자의 개성을 추구하는 예술과 반대편에 있을 수 밖에 없다. 작품 [LOVE LOVE LOVE No. H-24081](2024)에서 역사적 연도를 알리는 숫자의 열과 문자, 그리고 손바닥의 이미지가 심연 저편에서 떠오른다. 계몽의 빛을 받고 있지만 각기 불완전한 형태는 서로를 의지하면서 의미의 퍼즐을 맞춘다. 순환적인 해석의 회로에 참여하는 관객의 시선이 더해져 작품의 메시지가 풍부해진다.
작품 [LOVE LOVE LOVE No.H-16016](2016)에서 둥근 형상들과 얼룩으로 어지러운 화면 속 수수께끼처럼 산재 된 하얀 점들을 이어보면 모래시계같은 형상이 추출된다. 모래시계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묵시록의 기호로 다가온다. 작품 [LOVE LOVE LOVE No.H-16094](2016)은 지상에 유폐된 수인(囚人)을 떠오르게 한다. 작가는 더 많은 발전과 진보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는 고통에 대해 생각한다. 이해관계가 더욱 첨예해지며 급격하게 다가온 위험사회는 지옥문을 열어 젖힌다. 도처에서 생태학적 재난부터 전쟁에 이르는 참상이 전해진다. 지금은 아니어도 언제든지 그 불행한 순서가 닥칠 수 있는 임의성이 더 불안하다. 그의 작품에서 화면 한가운데 찍힌 손자국은 고독하게 죽어갔을 누군가의 부질없는 행위가 남긴 수직선들이 감옥의 창살이다. 직립보행 이후 수직은 살아있음의 특징인데, 죽어가는 이는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흔적을 남긴다.
멀게는 아우츠비츠의 가스실, 가깝게는 대구 지하철 화재를 비롯한 참사의 현장에서 빠지지 않는 마지막 단말마적인 생존의 몸짓이 바로 손자국이다. 김병진의 간명한 표현은 고통의 표현이 굳이 복잡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준다. 총체적 난국에 대한 작가의 대안은 ‘사랑’이다. ‘Fingerprints는 온 인류가 평화를 위해 서명한다는 평화운동’이라고 말한다. 꽉 채워져 있는 그의 화면은 전쟁 종식을 포함한 메시지의 절박함을 표현한다. 하지만 어떻게 만들어졌지 가늠할 수 없이 복잡한 그의 작품은 단순히 정치적 견해로 읽히는 것을 거부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예술은 견해를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거기에 언어의 자리를 대신하는 지각들, 정서들, 감각의 집적들로 구성된 하나의 기념비를 들어앉힌다. 지각 작용들로부터 지각을, 감정들로부터 정서를, 견해들로부터 감각을 떼어내기 위해 작가는 언어를 뒤틀고, 진동시키며 부둥켜 안고 쪼갠다.’ 예술가란 단지 주장하는 자를 넘어서 ‘그가 우리에게 제공하는 지각들과 시각들에 관한 한 정서들의 제시자요 창안자이며 창조자’이다.
4. 김윤경숙 ; 빛과 어둠의 싸움
최근 대한민국을 강타한 이슈가 떠오르는 제목 [왜 어두운 역사가 반복적으로 되풀이 되는가](2025)는 빛이 가득하다. 바닥까지 늘어지는 원통형 구조물 표면에는 하얀 전구들이 박혀있고, 위에서 내려오는 전선에는 시간 타이머 콘센트 설치해서 빛의 움직임을 제어한다. 이 전구는 그가 2014년에 발표했던 [하얀 비명]과도 관련된다. [하얀 비명]은 천정에서 내려오는 알전구들이 설치된 것으로, 어두운 망망대해에서 오징어 떼를 유혹하는 집어등같이 기이하면서도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작가는 이번 전시 작품에서 ‘[하얀 비명]에서 사용되었던 전구들 약 1000개를 가지고 반복되는 역사를, 그 속에서 빛의 연대를 표현 한다’고 말한다. ‘빛의 연대’라 함은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대중들이 들었던 응원봉을 떠올린다. 그 반대편은 붉은 경광등으로 응수했다. 빛은 누구에게나 강력한 상징이다. 어둠을 밝히는 빛은 그자체로 메시지가 된다.
작은 빛 하나하나가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빛나는 장관을 이루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절박한 소통을 위한 실천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상호적인 끌어당김과 밀어냄에 의해 의사전달이라는 환하고 강렬한 빛이 솟아나는 것’에서 진정한 소통을 보며, 이는 예술에서 늘 일어나는 사건이다. 하지만 김윤경숙은 빛의 시각성 뿐 아니라 소리의 측면을 강조한다. 어디선가 초월적으로 비추는 한줄기 빛이 아니라 단자들처럼 모인 빛의 무리는 대화와 함성이 함께한다. 플라톤주의에 선명하듯이 시각성에 국한된 빛은 초월적이며 형이상학과 연관되었다. 그러나 소리는 늘 주변에서, 바깥에서 들려오는 공동체의 현존을 암시한다. ‘하얀 비명’은 ‘햐얗게 질린다’는 일상적 표현을 떠올린다. ‘하얀’은 백색 소음처럼 크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너무나 경악스러워 입도 빠져 나오지 못한 소리다. 배색인 붉은색과 더불어 조형적인 형식으로 메시지를 암시한다. 이러한 난감한 상황은 최근 사건에서 어두운 역사가 반복됨을 목도해서이다.
큰 트라우마를 남겼던 근대사의 사건이 21세기에도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강한 의구심이다. 그동안 피 흘려 쌓아온 진보가 하얗게 휘발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다. 우리가 당면한 현실은 허구처럼 느껴질 정도로 극적이며, 이 역사적인 드라마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작품 [빛소리_연대의 빛](2025)은 거대한 역사의 퇴행이 이루어졌던 지난 연말연초에 우리는 촛불에 이은 빛의 혁명이 이에 저항하고 있음을 목도했다. 광장에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자발적 상상력은 다양한 표현을 낳았다. 작가는 ‘2025년 1월3일부터 2박3일 영하의 강추위 속에서 한남동 집회 5일 오전 폭설 은박 덮개를 쓴 집회 참석자 우주 전사 아니면 키세스단의 모습. 이러한 내용을 작품으로 표현’하려 한다. 결정의 시간이 한없이 미뤄지거나 결정 불가능한 사안을 결정해야 하는 과도적이며 역동적인 시기를 통과하는 와중에 운동하는 대중들의 모습, 특히 젊은 여성들의 참여가 매우 높아진 점도 작가에게 큰 영감을 준다.
작품 [진실의 무게](2013)에서 천정을 이용하여 균형을 맞춘 작품은 ‘진실의 무게’를 가늠한다. 저울대를 쥐고 있는 진실의 법정을 상징하는 여신도 떠올린다. 진리가 너무 무거워서 가벼운 춤같은 유희를 택했던 철학자도 있지만, 그것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나 ‘권력에의 의지’와 결합 될 때 맹목과 야만으로 퇴행할 수도 있다. 요즘 우리는 진실을 가늠하는 법정에서도 말꼬리를 잡으며 거짓말과 궤변을 늘어놓는 권력자를 바라보고 있다. 권력자의 사익에 부역하는 시스템도 진실에 목마르게 한다. 계몽과 함께 시작된 근현대사는 미몽이 되려한다. 역사의 역설을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제어할 진실의 무게는? 작가가 묻는 ‘왜 어두운 역사가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가?’는 질문은 한국뿐 아니라, 대량 학살과 파괴가 벌어지고 있는 전 세계에 해당한다. 민주주의는 후퇴하고 강자의 논리가 강요되는 반동의 시대다. 민주주의는 결코 그저 주어진 적은 없다는 점을 역사는 증명한다.
작품 제목에 등장했던 키워드인 ‘망상’이나 ‘비명’ 등은 비극의 원인과 결과를 예시한다. 우연찮게도 계엄을 계몽이라고 우기는 주장은 단순한 말장난에 머물지 않는다. 계몽은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계몽의 한편에는 이성의 맹목성과 망상적 유아론이 있다. 자크 데리다는 [글쓰기와 차이]에서 ‘유아론은 착란도 궤변도 아니다. 그것이 바로 이성의 구조이다’(레비나스)와 ‘이성은 역사 가운데 산출되는 로고스’라고 말한다. 로고스에는 자기지시적이고 자기애적인 면이 있다, 데리다는 ‘로고스로서의 자신을 말하고 자기를 듣기 위해 존재를 관통한다. 로고스는 자기애로서의 파롤이다. 요컨대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기’(후설)임을 인용하면서, 이성의 동어반복을 비판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독백이 아닌 대화이다. 대화는 독백과 달리 열려있다. (왜곡된)이성의 독단성에 기초한 망상은 개인을 넘어 시스템을 통해 확대 재생산된다. 수많은 빛의 연결망으로 연출된 김윤경숙의 작품은 현실적 실천의 한가운데서 상상과의 거리를 좁혀나간다.
출전; 이응노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