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 심의적인, 어쩌면 원형적인 풍경


고충환 | 미술평론가

물은 흐르고 씨앗은 깨어난다...그림을 그릴 때 나는 더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작업은 직관적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상상의 풍경 속에서 걷고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죽음의 강박적 현존으로부터 도망친다.
- 작가 노트


네 번째 물이라고 했다. 네 번째 물? 이전에 이미 첫 번째 물이 있었고, 두 번째 물이 있었고, 세 번째 물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지금 비로소 네 번째 물이 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무슨 말인가. 그동안 작가는 흙과 물의 상호작용을 형식 실험했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바싹 마른 흙바닥 위로 비가 내리면 움츠러든 생명이 소생한다. 그러므로 흙은, 흙바닥은 생명의 근원이다. 그리고 종이와 물의 상호작용을 형식 실험했다. 종이에 물(물에 간 먹)이 닿으면 부풀어 올랐다가 습기가 빠지면서 바싹 마른다. 그렇게 바싹 마른 채로 물의 흔적을, 물과 종이가 상호작용한 흔적을,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의 흔적을 남긴다. 물을 통해 생명을 얻고, 물의 부재로 인해 생명을 잃는다. 그러므로 물은 생과 사가 순환하는, 생사 순환을 주관하는 생명의 원천이다. 그리고 천과 물의 상호작용을 형식 실험했다. 천에 물이 닿으면 천은 저항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를 맡기면서 물의 흐름에 순응한다. 그러므로 생명은 흐르는 물과 같고, 그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작가는 숯과 물의 상호작용을 형식 실험한다. 숯은 불의 소산이고, 불(파토스?)은 물(에토스?)을 만나 정화된다. 그러므로 숯은 존재를 정화한다. 

네 번째 물이라고는 했지만, 단계적으로 작업이 변화해 온 과정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선후 과정 없이 지금까지 작가의 모든 작업이 함축된 결과를 예시해준다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이전 작업에서도 이미 숯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그을린 먹 자체가 이미 숯이기도 하지만, 여하튼) 근작에서 유독 숯에, 숯과 물의 상호작용에 주목했다기보다는 다만 주제의 방점이 숯으로, 숯이 내재한 생명 기능과 정화작용 쪽으로 옮아갔다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여기에 물질과 물질의 상호작용을 형식 실험했다고는 하지만, 정색하고 그렇게 했다기보다는 지난한 작업 과정을 통해서 저절로 체득된, 그러므로 반무의식적인 상태에서 몸의 한 부분으로 흡수되는 과정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 모든 상호작용에 물이 있고, 형식실험에 물이 있다. 그리고 그 상호작용에, 형식실험에 흙이 부수되고, 천이 부수되고, 숯이 매개된다. 그런 만큼 작가는 진즉에 생태에 관심이 많고,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생태학에 연장된다고 해도 좋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서는 흙, 물, 천, 숯과 같은 물질 간 상호작용이 밑바탕이 된다. 작가의 작업을 지지하는 4 원소라고 해도 좋다. 화학작용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으나, 화학의 모태에 해당하는 연금술에 연유한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 자체 흙, 물, 불(작가의 경우에는 숯), 공기로 나타난 물질 간 상호작용으로부터 세계가 기원했다고 보는 세계 4 원소설을, 연금술을, 그리고 좀 더 현대로 오면 가스통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몽상의 시학을 위한 모태가 되는)을 관통하는, 물질과 시(그러므로 예술), 물질과 감각(그러므로 몸)이 상호작용하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이런 평소 관심(유물론적 세계관과 생태학)과 관련해서 무관하지 않은 것이 작가는 오랫동안 습관처럼 해온 일이 있다. 바닥에 종이를 깔고, 그 위에 흙이며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어 키우는 일이다. 그리고 씨앗이 발아하고 성숙하고 죽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다. 생과 사가 순환하는 과정을 함축하고 있는 일종의 인공텃밭을 조성한 것인데(예술도 인공이다. 최소한이라고는 하지만 자연에 간섭하고 자연을 매개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어쩌면 일종의 유사 자연을 만들고 제안하는 일일 수도 있다), 지금도 어쩌면 작가의 작업실 한쪽에 자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종이는 생명을 위한 터가 된다. 생사 순환을 증언하는 현장이 된다. 존재가 살고 죽으면서 남긴 고스란한 흔적이 된다. 보통의 종이가 예사롭지 않은 종이가 된다. 그렇게 예사롭지 않은 종이가 흥미롭다. 아마도 작가 역시 흥미로웠을 것이다. 생명의 존재 방식에 대한 평소 관심과 함께, 작가의 오랜 일과 중 그 부분도 결정적인 동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존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종이, 존재의 흔적을 환기하는 터, 그림, 이미지, 일루전, 타블로, 오브제를 향한 관심 말이다. 그림으로 인해 어떻게 존재의 흔적을 환기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 말이다. 그 관심이 알게 모르게 작가의 작업을 위한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작가가 작업 외적으로 해온 또 다른 일과가 있다. 생태 관찰(그러므로 생명 공부)만큼이나 오랫동안 해온 일이고 지금도 하는 일이다. 서예다. 드로잉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본격적인 작업에 임하기 전 손 풀기며 몸풀기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마음공부며 감각 공부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공부를 위한 것인 만큼 그림이든 글씨든 쓴 위에 또 쓰기를 거듭하면서 여백이 없이 종이를 채우고, 마침내 종이는 새까매진다. 보통은 그렇게 다 쓴 종이를 옆으로 치우기 마련인데, 작가는 무슨 연유인지 다 쓴 종이 위에 다른 종이를 붙여서 덮었다. 그렇게 쓰고 붙이기를 거듭하면서 제법 두툼한 종이 패드가 만들어졌다. 돌이켜보면 결과적으로 바탕재를 만드는 일이기도 했고(엄밀하게 작가의 그림에서는 바탕이랄 만한 것이 따로 없는, 바탕이 그림이고 그림이 바탕인, 그림과 바탕이 한 몸인 일종의 오브제 회화를 예시해주고는 있지만, 여하튼) 지금과 같은 그림이 나오기 전 일이지만, 뭘 그려야 할지 어떻게 그려야 할지 막막한 마음을 잠재울 수 있었고, 언젠가는 저게 뭔가 될 수도 있겠다, 싶은 작가로서의 본능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작가의 작업은 이 과정에서 유래했는데, 종이에 종이를 겹쳐 붙이다 보면 균일하게 붙지 않고 부분적으로 들뜨거나 공기층이 생긴다. 그래서 문지르기 시작했고,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잘 붙지 않을 때는 빳빳한 철 솔로 긁기도 했다. 단순히 잘 붙이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막연하게나마 작가가 생각하는 감각적인 어떤 지점을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원하는 색감이, 질감이, 색감과 질감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문지르고 두드리고 긁기를 거듭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쓰고 그리는 과정에 먹물이 동원되고, 숯가루가 동원되고, 숯 알갱이가 동원되고, 이후 점차 크고 작은 숯덩어리가 동원되면서 종이와 종이 사이에 숯이 갇히고 먹이 갇히는, 종이와 숯과 먹이 분리 불가능한 유기적인 전체를 일구는, 지금 보는 것과 같은 화면이 열리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종이와 종이 사이에 숯이 갇히고 먹이 갇힌다고 했다. 여기서 숯은 뭐고 먹은 또한 뭔가. 작가가 종이에 쓴 글씨고 그린 그림이다. 종이에 종이를 덮는다고 했다. 자기가 쓴 글씨를, 자기가 그린 그림을 덮어서 가린다. 서예는 마음공부라고도 했다. 자기가 쓴 글씨가, 자기가 그린 그림이 곧 자기 마음이고 자기다. 그렇다면 여기에 작가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자기는 어디에 있는가. 마음을 표상하고 자기를 증언해줄 글씨는 그리고 그림은 어디에 있는가. 

작업이 진행되면서 종이와 종이 사이에 자기가 쓰고 그린 글씨가 갇히고 그림이 갇힌다. 마음이 갇히고 자기가 갇힌다. 자기부정이고 자기의 무화다. 마음이 갇히고 자기가 가려지는 과정을 통해서, 마음을 지우고 자기를 무념무상의 상태로 되돌려놓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서 지금 보는 것과 같은, 작가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작가가 되는, 작가와 그림이 경계를 허물어 혼연일체가 되는, 그런, 유기적인 전체를 일구는 화면을 얻는다. 부정(자기의 무화)을 통해서 또 다른 긍정(투여된 노동을, 치열한 과정을, 그러므로 자기를 확인할 수 없을 만큼 혼연일체가 된 작품)을 얻는 변증법의 원리가 적용되고 확인되는 순간이다. 자기부정을 통해서 또 다른 자기를 얻는 작가의 작업에는 그러므로 어느 정도 수행적인 면이 있다. 

이런 작가의 작업 방식(차라리 태도)에 대해서는, 혹은 작업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는 롤랑 바르트의 너덜너덜해진 양피지 이론도 설득력을 더한다. 옛날 종이가 귀해 양피지가 종이를 대신한 시절 얘기지만, 한 번 쓰면 다시 못 쓰는 종이와는 다르게 양피지는 계속 지우고 다시 고쳐 쓸 수 있다. 외관상 지운 것이 없어진 것 같지만, 사실 양피지는 지워진 것(무언의 흔적?)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의란 긍정은 물론 부정마저 포함하는, 쓰고 지우고 고쳐 쓴 것들의 총체라고 해야 한다. 작가의 인격은 자기부정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낱낱이 추수되면서 그림으로 체화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림이 작가와 일체화되는, 그런, 일종의 그림 인격체가 실현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처럼 생명 공부(생태학)와 마음공부(수행)에서 추수된, 자기부정으로부터 추수된, 그리고 마침내 그림과 작가가 혼연일체를 이룬 그림 인격체로 나타난 작가의 그림이 풍경 같다. 부분적으로 패여 자갈이 삐죽 나오거나 흩어진 아스팔트 같고, 석탄과 목탄이 자갈과 뒤섞인, 탄광 지대에서나 볼 법한 거무튀튀한 흙바닥 같고, 화산석이 분해되면서 형성된 검은 모래사장 같고, 군데군데 잔돌이 드러난 회칠이 벗겨진 흙벽 같고, 터실터실한 질감이 손끝에 만져지는 시멘트벽 같고, 비에 씻겨 흘러내린 그을음이 비정형의 얼룩을 만드는, 전설처럼 아득한, 버려진, 잊힌, 옛집의, 성채의 벽면 같다. 

00 같다. 00처럼 보일 뿐,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이라고 정색하고 지목하기는 어려운, 그러면서도 언제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데자뷰를 불러일으키는, 알만한 무언가를 고집스럽게 밀어 올리는, 그러면서도 단순한 추상으로 환원되기를 거부하는, 그렇게 추상과 재현적 형상의 경계를 허물면서 넘나드는, 그런, 형상이고 풍경이다. 열린 형상이고 열린 풍경인 만큼 저마다 다른 무엇을 떠올려도 무방할, 그런, 형상이고 풍경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에나 존재할, 기억으로 간직된 심의적 형상이고 풍경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작가의 그림은 추상인가. 추상이다. 무언가를 그리고자 하는, 무언가를 만들고자 하는 자의식의 매개 없이, 그러므로 자기를 지우면서 그린 그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무목적적 행위의 결과이며 소산이라고 했다. 그리고 칸트는 무목적적 행위에서 예술의, 미학의 당위성을 찾는다). 시작점이 그러하더라도 결과를 놓고 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형상적인 어떤, 재현적인 어떤, 대상을, 감각적 실체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 그렇다. 바닥이든 벽체든, 색감이든, 질감이든, 아니면 분위기든, 실재하는 무엇, 기억하는 무엇, 그리운 무엇을 환기하는 것이 그렇다. 

다른 무엇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작가의 그림은 색감보다 질감이 두드러져 보이는 편이고(작가의 색감은 흑과 백의 모노 톤에 한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형식적으로 단색화에, 내용으로는 금욕주의에, 자기 수행과 명상적 계기에 연장된다), 특히 바닥과 벽체의 질감을 떠올리게 하는 편이다. 감각적 현실 속에서 찾자면, 접사고, 클로즈업이다. 순수미술을 가정한, 순수추상을 가정한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아니라면, 추상은 형상 속에 이미 내재해 있었다. 형상은 추상을 잠재하고 있고, 추상은 형상을 암시한다(열어놓는다). 이런 추상과 형상의 경계 허물기 혹은 넘나들기가 바닥에서, 벽체에서 일어난다. 

진즉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성벽에 난 알 수 없는 균열이나 비정형의 얼룩에서 세상의 풍경을 본다. 전쟁을 보고, 홍수를 보고, 세상사를 본다. 성당의 종소리를 듣는다고도 했다. 시각적 환기를 넘어 청각적 암시를 보고 듣는다. 상상력의 비약이라기보다는 유물론적 상상력이, 물질적 상상력이, 공감각적 상상력이 발현되고 실현되는 순간이라고 해도 좋다. 질감은 얼룩의 또 다른 존재 방식이고 꼴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어쩌면 질감을 매개로 사실은 어떤 얼룩을, 알 수 없는 흔적을, 얼룩이 환기하는 기억을, 흔적이 암시하는 그리움을 불러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어릴 때 손끝에 감촉돼 오는 터실터실한 벽면 질감의 추억 같은. 아니면, 그보다 더 아득한, 어쩌면 존재가 유래했을지도 모를 어떤 지점 같은.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을 집단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했고, 원형적 이미지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작가는 어쩌면 이런 원형적인 이미지를 소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아득하고 먼, 시간과 바람에 충분히 풍화된, 원형적인 어떤, 색감을, 질감을, 얼룩을, 흔적을, 기억을, 추억을, 그리움을 불러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술사와 관련해서 작가의 위치를 보면, 작가의 작업은 흙과 종이와 숯과 같은 자연 물질을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아르테포베라(가난한 미술)와 관련된다. 최소한의 물질을 매개로 한다는 점을 도널드 저드식으로 말하자면 최소한의 미술 그러므로 미니멀리즘을 실현하고 있다(자연에 최소한으로만 개입한다는 점에서). 자연 물질 고유의 성질 그러므로 물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일본의 모노하(물파 그러므로 물질파)와 관련된다. 그리고 여기에 흑백 모노 톤의 한정된 색채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단색화와 맞물리는 부분도 있다. 

이 모든 미술사적 성과를 의식적으로 계승한다기보다는 자기 감성, 자기 감각으로 체화된 형태로 미술사적 사조를 넘어 자기만의 형식을 열어놓고 있다. 추상과 재현의 경계가 무색해지는, 추상과 재현이 합치되는 어떤 지점을 열어놓고 있다. 그렇게 아득한 질감의 추억을, 초혼처럼, 불러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