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중인 성좌들

 

이선영(미술평론가)

  


전시장 귀퉁이의 신문 더미들 사이로 신문에 나왔던 인물사진들이 오려내어 세워진다. 신문은 앞뒤로 인쇄되기 때문에 세워진 인물 뒤편은 또다른 텍스트 일부를 노출한다. 오려진 인물 이미지는 원래의 맥락에서 벗어나 작가가 만든 장기판의 말로 재맥락화 된다. 신문기사/이미지의 오려내기는 변화를 위한 최초의 조치다. 작가가 가위와 접기를 통해서 하는 일은 만날 수 없는 것을 만나게 하고 붙어있는 것을 띄워놓는 것이다. 전시장 입구에 군데군데 오려진 신문을 공중에 걸어놓은 이미지는 신문의 여러 쓸모 중 하나이다. 올드 미디어에 속하는 그것은 이제 기사 내용의 전달 외에 심미적 기능을 가진다. 여기에서 신문은 다르게 소통된다. 90년대부터 김수진이 애용해온 신문은 작업 초창기에는 올드 미디어가 아니었지만, 인터넷이 보편화된 지난 30여년간 지각변동을 겪는다. 매체계의 급격한 진화에 의해 신문은 보다 가벼워진 코드와 상보적으로 작용한다.  



김수진_점으로 된 사람들_엘리펀트프리지 전시전경 _2025



김수진_점으로 된 사람들_가변크기_2025



김수진_점으로 된 사람들_가변크기_2025


랜슬롯 호그벤은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만화경](1949)에서 미디어의 역사의 중요한 대목을 잡아낸다. ‘A.D. 105 중국에서 종이 제조법을 개량. A.D. 720 중국에서 목판 인쇄가 시작. 15세기에 들어 유럽에서는 여행자와 우편물 등을 비교적 정기적으로 운반/배달해주는 역마차 운송제가 시작. 15세기 말에 들어 독일에서는 1장짜리 신문이 발행되어 가두에서 판매. 1837년 미국의 모르스는 점과 선의 결합으로 코드화한 문자를 송신하는 전신기를 발명...’ 여기까지가 신문이라는 미디어를 소재/주제로 삼는 작품의 개체발생을 읽는데 필요한 계통발생의 역사다. 미디어의 역사에서 신문/인쇄는 현재의 디지털 문명만큼이나 중요한 대목을 차지한다. 미디어역사가들이 말하듯 ‘인류 역사는 곧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라고 한다면 말이다. 김수진의 근작에서 사진인쇄물이 등장하는 만큼, 19세기 중반 사진의 발명과 더불어 세계를 재현하고 전달하는 획기적인 변화가 예술에 끼친 영향도 지대하다. 


이후 매체계의 변화는 가속도가 붙었다. 모든 세대가 자기만의 특별함이 있지만, 1972년생의 작가는 매체계의 변화를 온몸으로 겪은 세대다. 그는 매체 자체보다는 그 사이를 중시한다. 신문이 아니라 다른 재료를 사용할 때도 같은 경향을 유지한다. 매체계의 압축적 진화라는 속도전에서 중요한 지점은 그 사이이다.  레지스 드브레는 미디어의 역사와 소통방식을 다룬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영혼과 육신, 정신과 물질, 기호와 사물, 속과 겉 등등이 대치하고 있는 황량한 벌판에 진을 치고 있는 이원론적 사고를 멀리하면서 우리는 사이에 역점을 두고자 한다’고 말했다. 쌓아놓은 신문 더미에서 비져 나온 듯한 납작한 인간들은 입간판처럼 저마다 자신을 어필한다. 표면으로 이루어진 인간은 정보사회의 압력이 만들어낸 모습이다. 겉면이 전부인 시뮬라크르의 시대에 실재는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블랙홀이나 암흑물질처럼 보이지 않는 힘으로 작동한다. 김수진의 작품에서는 수평적 차원에서 감춰져(또는 접혀져) 있던 존재가 수직으로 세워진다. 



김수진_얇고, 납작하고 누운 사람들_가변크기_2025



김수진_얇고, 납작하고 누운 사람들__가변크기_2025_detail



김수진_Flow_UV Print on Aluminum Plate_88x66cm_2025


수직으로의 변환은 살아있음의 상징이며 수평보다는 적극적으로 소통을 시도한다. 현대사회에서 소/유통되지 않으면 잊혀지고 사라진다. 실재든 존재든 덩어리진 채 있다면 현실이 될 수 없다. 김수진은 생산물을 재료로 만들고 그 재료로 다시 생산한다. 잠재성과 현실성의 거듭되는 변환이다. 한편 뉴스란 한 번 소비되고 나면 잊혀진다. 뜨거운 소식일수록 더 빨리 식는다. 대량 생산/소비 사회에서는 이러한 망각 덕분으로 ‘새로움’이 가능하다. 작가에 의해 다시 호명된 존재들은 투명한 필름에 인쇄되어 기념비적 차원을 획득한다. 관객은 등신대의 이미지들과 마주하거나 그 사이를 걷게 된다. 신문에 실렸던 작은 이미지들은 한 공간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신문 자체가 여러 사건을 한 지면에 배치하는 일종의 꼴라주이다. 펼쳐진 신문에서 기사는 공시적(公示的)으로 제시되며, 이는 책에 내재된 선형적 질서와도 다르고 스크롤식으로 훑어보는 스마트폰의 방식과도 다르다. 


작가는 신문에 내재된 형식을 가속화시키거나 3차원 공간에서 편집한다. 관객의 이동에 따른 실시간 편집이다. 신문에 나오는 크기의 인물이 거의 등신대로 확대되었을 때 망점 또한 확대되어 ‘점으로 된 사람들’(전시부제)이 된다. 원래 점은 질서의 상징이다. 가령 원근법적 공간에서의 점을 상상하면 그렇다.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유클리드 공간은 원근화법적 존재의 모델이라고 규정하면서, 그것은 초월을 동반하지 않는 긍정적(실제적)인 공간, 서로 평행하는 또는 3차원에 따라 서로 수직 교차하는 직선들의 망상조직이라고 본다. 김수진의 작품에서 수직/ 수평의 열을 따라 배열되었을 망점이나 텍스트의 위치 변경은 그곳을 위상기하학적 공간처럼 장으로 변화시킨다. ‘모든 지각은 운동’이라고 간주하는 현상학적 사고에서 시간에 따른 변화는 ‘점적인 사건들의 연속이 아니다’(후설). 요컨대 이동하는 관객에게 시시각각 다른 관계망을 만들어내는 작품은 일종의 장(場)이 된다. 



김수진_점으로 된 사람들_가변크기_2025



김수진_점으로 된 사람들_가변크기_2025



김수진_점으로 된 사람들_가변크기_2025


고정된 형식과 내용을 거부하고 열린 작품을 지향해왔던 김수진의 방식이다. 작가에 의하면 망점은 ‘인쇄 과정에서 번짐을 막기 위한 점의 집합’이다. 망점은 ‘인쇄물의 명암을 조절하는 미세한 단위로, 이미지가 축소될수록 망점 간의 간격은 넓어지고, 인물은 점으로 흩어진 존재가 된다’. ‘배경도, 설명도 없이 오직 그 모습만으로 존재’하는, 망점으로 환원된 사람들은 확대돼도 여전히 흐릿하다. 관객의 상상력이 발동되고 새로운 텍스트를 쓰게 되는 곳은 이 빈 곳들이다. 망점으로 인쇄된 이미지들은 확대되면서 기하학적인 점으로서의 성질보다는 흔적이 된다. 해체주의를 포함한 현대 철학이 말하듯이 흔적들은 기원과 목적을 알지 못한다. 그저 끝없이 펼쳐지고 접혀지는 계열일 따름이다. 비닐 위에 고정된 점들은 관객의 위치 변화에 따라 다르게 보여진다. 전시장 입구로 들어온 관객의 시점에서 여러 간격으로 걸린 ‘점으로 된 사람들’은 마치 별의 무리와 같다. 


별이나 사람이나 그것을 이루는 근본적 구성요소는 같다. 지구의 한 지점에서 밤하늘을 볼 때 각자 다른 거리를 가진 별들은 크기와 광도가 다르다. 동서고금에 전해 내려오는 별자리는 지구인의 시점에 따른 배치일 따름이다. 김수진의 ‘별자리’는 수시로 바뀔 수 있다. 여전히 인간은 지구를 중심에 놓고 그 중심에 서 있는 인간존재를 상상한다. 사람들의 숲 사이로 돌멩이와 벌새 이미지는 작은 존재를 기념비적인 스케일로 키운 것으로,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을 상대화한다. 2025년 대안예술공간 이포에서 발표한 [되풀이되는 세계]에서 작게 축소되어 인쇄된 사람들이 커다란 로프 안으로 들어가려 하고, 전봇대 위의 까마귀가 인간 세상을 관찰하는 듯한 모습으로 구성한 바 있다. 여기에서 작가는 ‘인간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고’, ‘그 오만한 착각으로 인하여 재난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고 말한다. 자연의 합목적성에 비한다면 ‘인간이 만들어가는 세상은 너무나 비상식적이며 비현실적이다’ 



김수진_점으로된사람들_관람객참여전경_2025



김수진_점으로된사람들_관람객참여전경_2025


그것들은 지구를 이루는 바위나 공룡의 후예를 떠올린다. 새는 바위나 산처럼 바닥에 깔아놓았고, 돌멩이는 중력을 거슬러 붕 떠 있다. 작가는 호명된 도상의 어떤 도드라져 보이는 상징도 변형시키려 한다. 중심과 주변의 관계는 역전된다. 신문에 실릴 정도의 사건들은 대부분 지위고하를 막론한 인간의 유아(唯我)론적 망상 때문이다. 과도하게 밀집되어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 자기가 중심인 소우주는 위험할 수 있다. 김수진의 ‘점으로 된 사람들’은 점들의 무리로 이루어진 일시적인 영역이다. 그의 작품에서 중심은 편재한다. 출입구 맞은편 벽에 설치한 거울이나 관객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촬영할 수 있도록 설치된 거치대는 명확한 좌표를 교란하는 요소들이다. 신문은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이지만, 매체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인쇄술 자체에 내장된 복제의 메커니즘을 말한다. 인쇄를 넘어 전자적 차원에서의 복제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더욱 유령화시킨다. 망점은 정보로 조직된 것이지만 일련의 선택과 가공을 거쳐 ‘잡음’으로 만들고 불투명성을 증가시킨다. 


하지만 모든 것이 허무하다거나 무의미하다는 메시지는 아니다. 그러한 판단도 확실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망점으로 변한 인간들은 중심을 잃고 원자나 먼지처럼 편재한다. 의미의 전달이 아니라 해체, 읽기가 아니라 쓰기이다. 신문이라는 공식매체를 애호하는 것은 해체가 주변적이지 않고 결정적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신문은 미디어의 역사에서 ‘구텐베르크의 우주’(마샬 맥루한)라고 평가되는 거대한 우주/세계를 상징한다. 저편으로 멀어지려는 구텐베르크의 우주는 예술적 소통으로 되살아난다. 모더니즘의 논리에 따른 매체의 자기지시성은 유희와 장식으로 귀결된 터였다. 자의성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미술계라는 제도이다. 비평가 수지 개블릭는 [모더니즘은 실패했는가]에서 ‘모더니즘이 거대하고 공식적이고 자본집약적 관료주의적 선언으로 변형된다고 하면서, 이런 미술가들은 조직의 명령에 연결된 직업인으로 대체되고 이들은 공식적인 경로와 제도적 절차에 대한 복종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비판한다. 그 안에서 인간은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좌표 속에 매달려 있게 된다. 



김수진_점으로된사람들_관람객참여전경_2025



김원_김수진개인전오프닝퍼포먼스_나도 노래가 될 수 있을까_2025



(참고도판)되풀이되는 세계_알루미늄판에 평판 열전사,채집된 부산물, 폐기물_가변설치_2025_detail



(참고도판) 되풀이되는 세계_알루미늄판에 평판 열전사,채집된 부산물, 폐기물_2.5x31x35cm_2025


작가 또한 예외가 아니다. 수지 개블릭은 현대의 사회적 단위는 개인이라는 사회학적 관점을 택하면서, 현대의 의식은 공동체의 와해에 따른 고독감이라고 본다. 모더니즘에서 198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국면인 ‘독단주의와 배타성은 물러가고 개방성과 병존의 양상’을 짚어낸다. 수지 개블릭에 의하면 ‘모더니즘이 미술이 무엇이 될 수 있고 없는가에 대한 강력한 명령으로 가득 차 있는 관념적인 것이라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절충적이고 모든 형태의 양식, 장르, 환경, 다양성과 상충하는 가치들을 동화시킬 수 있고 심지어는 약탈할 수도 있다’고 평가한다. 그렇게 현실(reality)은 ‘더이상 질서 있고 안정된 구조가 아니라, 상호 관련된 복합적인 리얼리티의 그물망으로 인식’(퍼트라샤 워)된다. 현실과 텍스트는 동등하게 서로를 교환한다. 알렉산더 네하마스는 [니체 문학으로서의 삶]에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대표되는 사고의 근원을 니체로 지목하면서 ‘독자들은 세계란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그 배후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단지 수많은 의미가 있을 따름’이라고 말한다. 


망점들은 사람 수만큼 있기에 관객의 위치에 따라서 겹쳐지는 망점의 양상도 달라진다. 지금은 올드 미디어에 속하는 재료로 상호작용하며 움직이는 네트워크에 대한 비유로도 가능하다. 점은 기하학적으로 고정된 것이지만, 김수진은 90년대의 초창기 작업부터 고정된 것을 거부해왔다. 그의 개인전 부제에 따르면 그것은 ‘오만한 이데올로기’(1998)였다. 고정된 것을 재구조화하여 과정으로 해체하는 것이 작업 면면에 흐른다. 최근 발표작품인 [닿기 위한 행동2023_부연], [닿기 위한 행동2024_소요산]은 어디선가 용도를 다한 대상들을 활용한 것으로, ‘사용 후 버려진 폐기물과 용도에서 벗어나 잘려나간 부산물들을 서로 기대거나 맞닿게 쌓아올렸다’ 고정되지 않는 잡다한 구성요소들은 다른 맥락에서 다르게 다시 배치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닿기위한 행동]은 ‘서로 관련 없는 이질적인 재료를 내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순종/반항, 선/악, 규율/이탈, 허무함/절박함 등의 양가적 감정에 귀 기울이며 하나하나 쌓아간다’(2023) 



(참고도판) 닿기위한행동_부연_채집된 부산물, 폐기물_가변설치_2023, 갤러리 부연 설치전경



(참고도판) 닿기위한행동_부연_채집된 부산물, 폐기물_가변설치_2023



(참고도판) 닿기위한 행동_소요산_채집된 부산물, 폐기물_계단아래 가변설치_2024



(참고도판) 닿기위한 행동_소요산_철판, 사진_21x29.5cm_2024


작가이자 공간운영자이기도 했던 김수진은 ‘무형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작가들로 하여금 전시장에서 1-2개월 동안 직접 작업하게 하고 개인전을 완성하게 했다. 그 또한 작가로 참여하여 약 1개월간 아트잠실 공간에서 작업의 결과물을 전시한 바 있다. 미술 공간에서의 프로젝트였지만, 여성이자 작가에게 공/사의 영역의 구분은 확실하지 않다. 확실하지 않은 부분을 확실시하는 지배적 질서는 ‘오만한 이데올로기’에 속한다. 특히 한옥의 구조가 남아있는 전시공간 부연에서 발표한 [닿기 위한 행동2023_부연]은 여성/작가의 작업이라는 맥락으로 재맥락화 됐다. 그 오래된 집은 오늘날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여성의 실존처럼 그렇게 서 있었다. 그는 여기에서 어디선가 떨어져 나온 잉여의 재료를 사용하여 무너지지 않기 위한 균형감을 잡으려 노력한다. 타자 중의 타자인 여성/작가에게 공간과 시간은 결코 통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생활과 작업을 병행하는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단편들을 연결하면서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낸다. 2023년 전시장으로 재맥락화 된 옛 한옥에서 여성 작가들과 함께한 기획전 주제인 ‘경계, 그 가운데서의 여성예술가’는 작가로 하여금 집과 여성의 관계를 새삼스레 생각하게 했다. ‘집은 나에겐 일터이자 고향, 무덤과 같은 장소이다. 마냥 행복하다고만 할 수 없는 치열한 전쟁터이다. 나는 안과 밖 모든 곳에 걸쳐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편집증적인 완벽함으로 완성된 부분과 그냥 흘려 놓은 부분이 공존하는 이 작품은 ‘사회의 규범과 형식에 맞춰 자신의 역할을 다하려 상실한 내면을 들려다 보고 찾아가기 위한 치유의 과정’이다. 많은 여성/작가들에게 그렇듯이, 김수진에게 작업은 여유의 시공간에서 실행되지 않는다. 매 순간 생활이라는 재생산의 영역과 직면해야 하는 가치와 지향, 의지의 싸움이 벌어지는 전선이다. 그 한가운데는 전통적 가부장제를 계승하여 근대에 확립된 공적/사적 영역의 경계가 있다. 



(참고도판) 김수진_변형 가능한 텍스트_신문,철가루,고무자석, 철판_1.5x43x58cm_1998



(참고도판) 김수진_변형가능한 텍스트_확대된 신문,철가루,고무자석, 철판_340x22cm_1999_detail



(참고도판) 김수진_변형가능한 텍스트_확대된 신문,철가루,고무자석, 철판_340x22cm_1999


정치학자 캐럴 페이트만은 [남과 여, 은폐된 성적 계약 the sexual contract]에서 사적인, 여성다운 영역(자연적인)과 공적인, 남성다운 영역(시민적인)은 대립되지만, 양자는 상대방을 통하여 의미를 획득하고 특히 공적 삶을 통하여 구현되는 시민적 자유는 사적 영역을 특징짓는 자연적인 복종이 있어야 획득될 수 있다고 말한다. 캐럴 페이트만은 결혼을 통하여 사적 영역이 구성된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개인으로서 남성들의 자연적 권력이 시민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된다고 본다. 가부장적 권리는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여성과 그녀들의 육체에 대하여 힘을 행사한다. 그에 의하면 정치경제학자들은 어머니의 노동을 ‘경제적 힘이 가해져야 할 원료 혹은 시민사회가 건설되기 위한 자연의 기초요소’로만 본다. 그에 비하면 아버지/돈을 버는 사람은 ‘가치의 창조자’의 지위를 갖는다. 공/사 영역의 구분을 통한 여성의 희생은 전통의 재편인 근대에도 강하게 살아남은 가부장제의 결과다. 


가부장제는 작가가 의식하는 ‘오만한 이데올로기’의 대표적 항목일 것이다. 작업과 가사, 공간운영을 병행해왔던 작가에게 지배적 질서가 은연중에 강요하는 분리를 돌파해나가는 방식은 분리에 대해 거리감을 설정하는 것이다. 작가는 자기만의 시공간을 쟁취하기 위해 애써왔지만 그것은 더이상 가부장적 제도가 강권하는 분리와는 차이가 있다. 작가에게 분리는 재결합을 위한 실험이다. 그의 작품의 형식은 일종의 꼴라주다. 그는 [Collage drawing / flow] 시리즈에서 ‘나의 역할은 창조가 아닌 조합이다’라고 말한다. ‘언제든 분리될 수 있는 얇은 막의 레이어링’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보도사진 오려내기는 변형을 위한 조건이며 그것은 철가루, 신문, 고무자석, 철판 등을 활용하여 재배열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표면을 문질러 [변형가능한 텍스트]로 만들었던 1990년대 말의 작품과도 이어진다. 당시에 작가는 주어진 텍스트를 변형시켜 ‘오만한 이데올로기’를 또한 변형하고자 했다. 작가에게는 변형을 가능하게 하는 ‘사이’가 창조와 자유의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