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념> 공식 포스터 ⓒ 임흥순, 반달 bandaldoc.com

나는 임흥순(1969- ) 작가의 2012년 영화 〈비념 (Jeju Prayer·悲念)〉을 2018년 봄에야 접할 수 있었다. 서귀포 지역의 어느 지인과 함께 봤는데 제주 4·3 70주년 행사에 간 길이었다. 당시는 한국전쟁의 미시사에 관한 원고를 탈고할 때이기도 했지만 〈비념〉의 주인공이 북제주 애월읍 납읍리 분이라서 크게 와닿았다. 납읍은 애월의 중산간 마을인데 나도 멀지 않은 해안가 마을에서 마을 어른들과 교류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4·3에 부군 김봉수를 잃은 강상희 씨, 카메라는 강씨 할망의 집에서 시작하여 제주의 다른 지역으로 옮겨 다니다가 할망댁의 앞마당으로 다시 돌아온다.

애월은 제주 다른 마을이 그러하듯이 오랫동안 유교와 무속이 각자 영역을 지키면서 공존해왔다. 특히 해안가 마을이 그러하다. 성별로 따지면 남성 주도의 마을 포제(酺祭)를 비롯한 제사와 여성 중심의 잠수굿을 위시한 무속 의례가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고 상호 존중하는 형식이다. 그래서 애월읍 바닷가의 오래된 포제 터에 가면, 한편은 유교, 다른 편은 무속으로 이렇게 쌍을 이루고 둘 사이에 담을 두고 있다.

이렇게 상호 주권을 존중하는 형식은 70주년 행사에도 있었다. 여느 해와 같이 4월 3일 본행사, 나라의 여러 귀빈이 참석한 공적 추모 행사에 이어 굿이 열렸다. 추모행사는 제주 도민 모두를 위한 것, 굿은 각 지방 부락별로 돌아가면서 각 마을을 위한 것이었다. 여러 날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섬 곳곳에 아직도 집 없이 떠도는 혼백들을 청배(請陪)하고 위로하는 행사였다. 그리고 추모행사와 굿 사이에 도민들이 제사를 지낸다. 여러 귀빈의 위로 말씀이 끝나면 참석한 도민 중 많은 사람이 평화공원의 행불자 묘역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래서 당신들 조상의 이름이 새겨진 묘지에 가서 준비해온 음식과 과일 그리고 술과 환타를 올리면서 제를 지낸다. 환타는 제주가 감귤 재배로 이름난 이유도 있지만, 속이 답답하고 타들어 가는 조상들이니 탄산이 들어간 이 음료를 드시고 당신들 속을 잠시나마 푸시라는 의미가 있다.



<비념> 스틸이미지 ⓒ 임흥순, 반달 bandaldoc.com

그런데 이렇게 제를 지낸다고 하여 그 행불자 묘가 과연 조상의 묘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묘는 비어있는 헛묘이고 우리의 조상은 아직도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혼백, 조상 아닌 조상이 아닐까? 자손들이 옆에 있어서 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이 의문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는 비밀스러운 생각, 밤에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할 때 밀려드는 비념이다.

애월의 강씨 할망은 밤에 자꾸 악몽을 꾸거나 가위에 눌린다고 하신다. 그래서 막음으로 당신의 베개 아래 녹슨 톱을 두고 잠을 청한다고 한다. 억울하게 죽은 서방이 당신의 꿈에 오실 때 이제는 더 이상 슬픈 얼굴이 아니라 좋은 옷을 입고 환한 모습으로 오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그 오래된 톱은 그 오래된 슬픔을 떨쳐내는 여망(輿望)의 표현일까? 

하나 확실한 것은 이 여망은 강씨 할망 혼자서 이룰 수 없다는 것,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교육의 현장에서 아이들이 4·3의 역사를 배우고, 대한민국 국민과 한국을 사랑하는 외국 방문객이 이들과 함께 배우고 익히면서 애도에 참여할 때, 그 때에 가능한 일이다. 집안에서는 제사의 예를 다하고, 나라에서는 애도의 예를 다할 때이다. 이 힘든 여정에 제주와 대한민국의 예술인이 큰 도움이 되어왔다. 임흥순 작가의〈비념〉이 특히 그렇다.


- 권헌익(1962- ) 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사회인류학 석좌교수. 『전쟁과 가족』(2020)으로 미국아시아학회 제임스 팔레상과 한국인류학회의 임석재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