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쾌대, <봄처녀>, 1940, 91×60cm © 이쾌대 유족
이쾌대(李快大, 1913-65)는 남한에서는 ‘월북자’, 북한에서는 ‘이념에 충실하지 못한 예술가’로 잊혀졌다. 남북 분단의 경계선에 놓인 가장 비극적인 예술가. 흩어진 역사의 파편 속에서 그의 진실을 더듬어 봤다. 그 실마리는 멀리 멕시코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일본 유학 시절, 이쾌대는 예술이 민중의 언어가 될 수 있다고 외친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와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e Clemente OROZCO, 1883-1949),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 1896-1974)의 벽화운동을 접했다. 글조차 읽을 수 없던 민중에게, 그들은 그림으로 말을 걸었다. 스페인 식민지의 흔적 위에, 아즈텍 민속 예술과 고대 인디언 문명을 재조명하여 그려낸 대형 벽화들. 그것은 문화 혁명이었고 이쾌대에게 새로운 미술의 언어, 하나의 길이 되었다.
이쾌대의 세계는 멕시코 벽화의 영향 아래 화폭은 커졌고 연작으로 이어진 주제는 더 큰 서사를 품었다. 그의 인체 표현은 해부학적 탐구에서 확장되어 탈식민지 조선의 저항 정신과 억압받는 민중의 굳센 삶을 드러냈다. 〈봄처녀〉(1940)는 다빈치의 〈모나리자〉(1503-06)가 아닌, 리베라의 〈칼라 릴리를 팔던 멕시코 소녀〉(1941)처럼, 단단한 민중의 얼굴이자 해방된 조국의 희망이다. 이쾌대의 〈봉선화〉(1940년대)는 화병에 꽂힌 꽃이 아닌 척박한 땅 위에서 피어난 식민시대 생존자의 얼굴이다.
2024 베네치아비엔날레에 초대받은 이쾌대의 〈자화상〉(1948-1949)은 리베라의 〈자화상〉 (1949)과 맥을 같이 한다. 두 화가는 정면을 응시한 굳게 다문 입으로 관객을 응시한다. 이쾌대의 어깨 너머로 물동이를 이고 산길을 오르는 여인들이 지나고, 리베라의 배경엔 멕시코의 흙냄새 밴 농부들이 있다. 서로 다른 풍경이지만, 뿌리는 같다. 그들의 붓끝은 삶의 무게를 견디는 민중을 향하며, 사회운동가로서의 예술가의 역할을 다짐한다.

『Art, War, and Exile in Modern Korea: Rethinking the Life and Work of Lee Qoede』
(암스테르담 대학출판사, 2025) 표지.
예술이란 무엇인가. 두 화가에게 예술은 결코 부유한 자의 벽에 걸린 장식이 아니라 저항이자, 위로였으며, 더 나은 내일을 향한 몸짓이었다. 이쾌대는 목소리 없는 자들, 역사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을 그려냈다. 월북한 뒤 마지막으로 남긴 작업도 벽화였다. 1957년, 이쾌대가 〈우의탑〉 벽화를 시작하기 직전, 특별한 손님이 평양에 도착했다. 디에고 리베라의 오랜 조수이자 벽화가였던 리나 라조(Rina LAZO, 1923-2019)는 3m가 넘는 벽화 〈우리는 승리한다〉(1959)를 멕시코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기차로 평양까지 가져왔다. 먼 여정을 감내해 도착한 이 “이동 벽화”는 리베라의 붓에서 시작된 저항 정신이 라조의 손을 거쳐 이쾌대의 붓으로 이어지며, 예술이 어떻게 국경을 넘어 연대와 해방의 메시지를 전하는지 보여준다.
이쾌대의 예술을 ‘한국의 미켈란젤로’라 부르는 건, 유럽미술의 틀에 빗댄 얄팍한 칭찬일 뿐이다. 또한 그를 그저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작가로만 바라보기엔, 그의 그림이 품은 이야기들이 너무 크고도 깊다. 그것은 탈식민의 혼란 속에서 고민한 시대의 물음이며 끝끝내 외면하지 않았던 민중의 목소리이다. 이쾌대는 격변하는 역사 앞에서 끝내 민중에게 눈을 돌리지 않은 회화적 증인이자 사회적 참여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