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미술관 출품작가전》 리플릿, 서울미술관, 1983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서울미술관과 앙굴렘조형예술센터(Association du Centre d’Arts Plastiques d’Angoulême, AcApA -
자료에는 ‘앙굴렘미술관’으로 표기)의 교환전 《사람들, 빛나는 정신들》(1983)에 앞서 열린 국내 전시 관련 자료로, 이후 프랑스 현지 전시에는 해당 전시에 참여한 7인의 작가 외에 유영국이 추가로 참여했다.
1981년 개관한 서울미술관은 한국 최초의 현대미술 사립미술관으로 독자적 위상을 확립했다. 제도적 기반이 미비했던 시기 《문제작가전》, 《동향과 전망》 등 실험적 기획전과 당대로는 드물게 시도된 연계 행사, 학술 전시 도록 발간을 통해 미술관의 사회적 기능과 한국 현대미술의 담론 형성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와 더불어, 서울미술관은 당시 한국의 주요한 문화 교류 대상국인 프랑스 미술을 적극 소개하며, 1980년대 국내에서 열린 100여 건의 프랑스 미술 전시 중 10여 건을 기획해 단일 기관으로서는 독보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은 단순히 외국 작가를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프랑스 미술의 동향을 국내 미술계와 연결하고 동시대 미술에 대한 감각을 환기시켰다. 이러한 시도는 한국 작가의 예술적 시야를 확장하고, 국제적 교류의 기반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그 중, 《프랑스의 신구상회화》전(1982)은 프랑스 미술을 매개로 한국 미술계에 ‘새로운 형상성’의 방향을 제안한 상징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기획자 알랭 쥬프르와(Alain Jouffroy)는 서문에서 미술을 “모든 개인이 서로 자유롭게 만나고 서로 이야기하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국제적인 집단적 모험”이라 정의하였고, 이는 당시 서울미술관이 추구한 활동의 지향점을 가늠하게 한다.

한불수교 100주년 수교 100년 기념 《비 온 뒤의 한국: 임세택과 강명희》, 전시자료, 퐁피두센터, 1986
© Centre Georges Pompidou, 1986, Conception graphique : Christian Beneyton
실제로, 서울미술관은 1983년 앙굴렘 조형예술센터와 교환 전시를 통해 상호적인 한불 교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국내외 미술계 간의 접점을 확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그 배경에는 창립자였던 강명희-임세택 부부의 삶의 궤적이 겹쳐진다. 1969년 현실동인의 전시가 좌절된 뒤 3년이 지난 시점 프랑스로 떠난 두 사람은 10년 넘게 파리에 머물며 유럽 현대미술의 현장을 목격했다. 이 경험은 서울미술관의 전시 기획과 국제 교류의 토대가 되었다. 한불수교 100주년이던 1986년,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두 사람의 전시와 퐁피두센터 전 관장 퐁튀스 훌텐(Pontus Hultén)이 예술감독을 맡은 대전엑스포 개최기념전 《미래 저편에》(1993)에 임세택이 공동 예술감독으로 협업한 사례는 이들이 구축한 관계망과 문화적 자산이 양국 미술계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입증한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만으로는 서울미술관의 성과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당시 한국 사회는 서울올림픽이라는 전환점을 전후로 국제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열망이 전 사회적으로 확산하고 있었다. 동시기, 프랑스 정부 역시 문화 외교를 통해 자국의 현대미술을 전 세계적으로 확장하려는 전략을 펴고 있었다. 서울미술관은 이처럼 여러 시대적 맥락이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하며, 한국미술이 국제 담론에 진입할 수 있는 하나의 경로를 제시했다. 이곳에서 기획한 프랑스 현대미술 전시는 유럽 중심의 미술 체계를 하나의 준거점으로 삼았던 과정을 통해 국내 미술 담론에서 ‘국제성’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방향으로 전유되었는지를 되짚어보게 한다. 서울미술관이 보여준 “국제적인 집단적 모험”은 당대 한국 미술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며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어 나간 구체적 실천의 사례로 남는다. 서울미술관은 이 모험을 가장 먼저 떠난 기관 중 하나였으며, 우리는 여전히 그 여정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