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적인 기호들의 반향

  

이선영(미술평론가)

  


김귤이의 《무지개띠와 행진하는 기호들》 전의 작품은 ‘기호들’을 통해서 무엇인가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창이지만, 자체의 물성 또한 강해서 창 자체에 주목하게도 한다. 그는 물감 이외의 여러 재료를 쓰고, 그림의 전형적인 사각틀은 여러 형식의 하나로 상대화된다. 마치 퍼즐의 한 조각처럼 잃어버린 짝패를 기다리듯 ‘불완전한’ 형태가 발견되기도 한다. 잃어버린 고리가 맞춰지는데는 시간이 걸린다. 큰 작품의 일부가 작은 작품으로 독립하기도 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작품들은 서로를 반향하는 우주가 된다. 특히 무지개에서 출발했을 띠들은 수많은 형태/색채의 계열로 파생되어 작품들 곳곳에 자리하여 작품 간의 잠재적 연결망을 이룬다. 이전 시대의 촘촘한 상징의 그물망의 엮인 신플라톤주의가 정립한 ‘존재의 대연쇄’같이 완전한 우주는 아니어도, 또는 아니기에 변화의 여지가 있다. 특정한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21세기의 문화적 키워드 중 하나인 유목과도 다르다. 




로이갤러리 전시전경(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갤러리에 있음)





축제의 가장 보편적으로 행사인 행진 때 수많은 상징적 깃발이나 의상 등이 착용된다. 그중에는 무지갯빛 깃발도 있다. 재현을 위한 수단을 거부하는 기호는 다른 무엇이 아닌 스스로를 가리키며, 자체의 물성을 가진다. 물성의 강조는 벽을 닮은 추상적 평면으로 귀결되곤 한다. 하지만 자기지시적인 벽들 또한 작가가 영감을 받은 애니메이션 중 하나인 핑크 플로이드의 [벽]처럼 부숴져야 한다. 김귤이의 작품에서 기호는 의미와 연결된 대상을 가리키지만, 언어학의 가설처럼 그 연결은 임의적이다. 기호의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투명한 창이나 거울처럼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자신은 감춰지는 것이다. 그래서 잘못된 레터링은 읽기 힘들다. 이국적 언어 앞에서는 읽기보다는 보게 된다. 노이즈가 많은 정보는 의미를 파고들어 직선으로 대표되는 순차적인 논리로 펼칠 수 없다. 의미는 괄호 안에 넣어지면 심미적인 기능이 발동한다. 물론 그것은 맹목이나 장식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작품 [()는 열린문]에는 화면 안에 경첩으로 고정시킨 투명한 문이 부착되어 있다. ‘문을 열면’ 물감으로 칠해진 또는 만들어진 세계들이 나타난다. 전시장 초입에 “이 문을 여시겠습니까?”라는 문구가 있는 작품은 관객을 기호의 세계 안으로 초대하며, 기호의 이모저모를 입체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그의 ‘기호’는 앞뿐 아니라 옆도 뒤도 있으며, 3차원상에 스스로 서있기도 한다. 벽이 아니라 모퉁이에도 걸쳐있고, 프레임의 변형은 흔하게 일어난다. 그리고 난 후에 틀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2023년의 전시에서도 부제에 포함되었다. 작가는 [펼침의 기호들 ; 이 문을 여시겠습니까] 전의 여러 작품에 대해 ‘융기하는 오름, 위로 솟아오르는 뾰족한 무엇, 상승하는 기호들...여태 그려왔던 욕망의 형태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정체를 알기 위해 의식의 문을 연다면 마주해야할 두려움과 공포’가 있다. “이 문을 여시겠습니까?”는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일종의 경고 문구이기도 하다. 








<Steamboat>,  <Taobmaets>, 2025, 캔버스에 아크릴, 유채, 수성페인트, 156 x 212cm (왼),  156 x 195cm (오)



또한 이 전시부제는 기호들이 (접히고)펼쳐지는 점을 강조한다. 질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예술작품은 기호들이 펼쳐지는 방식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기호들은 각기 자신의 고유한 연상의 사슬을 따라 서로 다른 속도로 전개되기에 작품에는 여러 세계가 공존한다. 괄호가 포함된 또 다른 작품 [()90°x10]은 작품 제목부터 다양한 기호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문장에서 생략의 기호인 괄호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괄호를 이루는 형태는 자체의 리듬을 타면서 또 다른 형태와 색채로 변모 중이다. 기호는 마치 장의 연동운동처럼 무엇이 들어와도 자신의 방식으로 소화할 것이다. 빈 괄호는 기호보다 그것의 안팎을 작가에게 변형의 조건이나 결과는 침묵임을 말한다. 우리가 무엇인가에 대해 확실히 말하는 것은 그것이 기존의 것이기 때문이다. 전대미문의 것 앞에서 우리는 침묵할 수 밖에 없다. 일상에서 침묵은 불안과 불편을 주기에 기피된다. 일상은 침묵을 은폐하는 수많은 백색소음으로 가득해진다.    


캔버스에 아크릴, 유채, 수성페인트로 그려진 작품 [Steamboat]는 증기기관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행진’과 조응한다. 전시장의 벽면을 따라 작품들이 도열한 작품들은 그자체로 행진을 떠올린다. 작가는 ‘1950년대 초기 애니메이션은 과한 몸짓과 끊어질 듯 이어지는 움직임, 진한 윤곽선’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증기선 윌리(Steam Boat Willie)」에서 증기선이 구름 모양의 증기를 뿜으며 전진하는 장면은, 나아가는 방향보다 그 순간의 동작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방향성과 목적보다는, 순간의 리듬과 형식’이 특징적이다. 움직이는 기호는 불투명하다. 그 와중에 기호의 흔적이라 할 만한 것은 산이나 지붕, 문자처럼 꺽인 선이나 무지개를 연상시키는 인접해서 배열된 색의 띠, 지도나 문장의 기호, 건축이나 인공적 시설의 분절화된 단위 등이다. 그것들은 작가가 직간접적으로 접한 기호들이다. 자신이 던져진 상황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어서 우연의 역할이 크다.






전시전경



언어학자들의 주장처럼 우연은 기표와 기의의 관계에 아로새겨져 있다. 안느 에노는 [기호학사]에서 모든 언어들에 대해 공통된 자질들로 차이와 체계성을 든다. 그는 ‘랑그의 한 단편은 궁극적으로 그 나머지와의 불일치에 근거한다. 자의적이라는 것과 차이라는 것은 서로 연관된 두 특질’(소쉬르)이라는 언어학의 명제를 인용하면서, 이것이 자연 언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의미체계들에도 타당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김귤이의 작품에도 포함된 지도같은 기호는 지시대상과 완전히 자의적 관계는 아니다. 안느 에노는 ‘최초의 이미지 기호학은 이미지와 그것이 표현한 것과 흡사한 유사물’(바르트)이라고 인용한다. 지도 뿐 아니라 사진이나 이미지도 그렇다. 김귤이의 작품에서 유비적 방식은 상징주의와 연결된다. 콜링우드는 [자연이라는 개념]에서 유비(analogy)라는 측면에서 세계를 이해한다. 가령 ‘고대는 ‘자연이라는 대우주’와 ‘인간이라는 소우주’의 유비이다.


상징을 통해 세계를 본 에른스트 카시러는 [인문학의 구조 내에서 상징형식 개념]에서 우리는 자연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에 의해 구성된 문화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며, 이 문화세계는 일정한 생성법칙으로 구성된 다양한 상징형식들의 체계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림 역시 지금까지 다양하게 분화되어온 모든 상징형식들 중의 하나로, 김귤이의 작품 또한 감각적인 기호와 그림을 통해 표현한다. 이미지를 다루는 화가가 사용하는 유비의 언어는 상상력에 따라 끝없이 연결될 수 있다. 작업은 자기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타자를 받아들이는 미묘한 게임이다. 그것은 모든 살아있는 세포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것은 기계의 비중이 날로 늘어나고 있는 기계적 일상에서 예술의 변별점을 가능하게 한다. 비가 온 뒤 찬란하게 떠오르는 무지개는 희망의 상징이며, 그것을 이루는 일곱 색도 각각의 상징이 있다. 물론 각 상징은 동서고금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다. 




<blue, tone, stripe>, 2025, 캔버스에 아크릴, 수성페인트, 67.5 x 85.5cm



<테트리스 처럼! 4>, 2024, 캔버스에 아크릴, 52 x 49.5 x 5.5cm



<흔들리는 기호와 무지개띠>, 2025, 캔버스에 아크릴, 수성페인트, 75 x 82cm


<()은 열린 문>, 2025, 우드패널에 석고, 점토, 아크릴, 플라스틱, 유채, 미디엄, 45 x 58.2cm



현실에 작동하는 단순하고도 잔인한 흑백논리가 가짜의 다채로움을 대신할 때, 무지개와 그 너머의 세상에 대한 희망은 신화와 종교, 문화와 예술의 내용을 가득 채웠다. 보이기만 하고 붙잡을 수는 없는 신기루 같은 것이라 그 힘은 더욱 강력하다. 무지개는 현실과는 최소한으로 비현실과는 최대한으로 닿고 싶은 대중적 열망에 부응하는 보편적 상징이다. 통상적으로 무지개는 일곱 가지로 색으로 코드화된다. 빛을 분석적으로 해체한 과학자는 뉴턴으로 평가되지만, 무지개빛의 경계는 확실하지 않다. 무지개 자체가 뜬구름처럼 모호한 실체다. 작품 [흔들리는 별빛의 모가지를 잡고]는 하늘에 떠있는 별들을 낚아채 보려 한다. 빛을 품은 듯한 밝은색과 진한 외곽선이 결합 된 평면 작품이 입체로 번역된다. 희망을 상징하는 빛을 손안에 넣고자 하는 행위는 그림보다 더 직접적으로 제시된다. 작가에게는 작업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희망사항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 뒤에 걸린 작품 [디딘 곳의 지표]를 통해 별같이 먼 곳을 바라보는 이가 디디고 서있는 바닥도 강조한다. 동그란 패턴의 보도블럭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이 작품은 도시를 이루는 ‘규격화된 형태와 반복되는 패턴’의 상징이다. 작가는 바닥에 깔린 보도블럭을 그림으로 일으켜 세워 반복되는 형태 와중에도 존재하는 ‘작은 어긋남과 균열’을 드러냈다. 누군가는 있어서는 안 될 그 틈에 빠질 수 있지만, 또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통해 차원을 이동할 수 있다. 모호하다고 해서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실재(The Real)는 무한히 다가갈 수 있을 뿐 완전히 포착될 수 없다. 작가는 실재를 포착하기 위해 자기만의 그물망을 짠다. 포획은 단한번에 이루어지지 않기에, 부지런한 어부처럼 지속적인 그물망 짜기가 요구된다. 모든 작품은 노력과 운이 복합된 결과이다. 기호보다 더 단순한 것이 코드이다. 코드의 특징은 환원이다. 환원은 과학기술 분야에서 엄청난 역할을 했고 많은 성과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기호가 내리는 풍경>, 2025, 캔버스에 아크릴, 유채, 수성페인트, 125 x 154cm



<Rainbow Bands>, 2025, 캔버스에 아크릴, 유채, 수성페인트, 26.1 x 110.5cm



<둥글게 그려도 평평할뿐>, 2025, 캔버스에 아크릴, 유채, 91 x 116.8 x 4.5cm



<둥글게 그려도 평평할뿐2>, 2025, 캔버스에 아크릴, 유채, 수성 페인트, 153 x 199cm



그 끝을 예측하기도 힘든 ‘챗GPT와 같은 대규모 언어모델’(제프리 힌턴)을 생각해 보라. 코드는 생산적이다. 생산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다. 환원이나 생산주의적 패러다임이 사회나 문화예술 등에도 관철된다면 그것은 획일화에 따른 억압을 야기한다. 지배적 질서는 제한된 현실만을 현실로 인정하면서 그것을 코드화하고 유일한 법칙인 양 강요한다. 작가가 견딜 수 없는 것은 그러한 환원이다. 김귤이는 그림의 기본틀 조차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수시로 변형을 꾀한다. 변형의 과정 중에 있는 것은 취약하다. 황금빛 액자에 안치된 지배자의 초상과 빠져나간 틀 때문에 이상하게 접혀있는(그래서 어떻게 펼쳐질지도 수수께끼인) 작품들의 존재 양태는 다르다. 이번 전시의 주된 작품들은 회화지만, 작가에게 ‘회화는 직육면체 프레임 천과 물감이 합쳐져 조각같은’ 것이지, 단지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밑칠이 잘된 순도 높은 캔버스 대신에 벽에 붙이거나 바닥에 깔린 천이나 종이에 작업한다. 


아크릴과 유화를 섞어서 쓴 화면은 은은한 광택이 나며 입자가 굵게 드러나기도 한다. 작가는 색다른 질감을 위해 소금이나 밀가루 등도 미디움으로 사용한다. 작품은 연금술사의 실험실처럼 기묘한 조합이 이루어지는 장이다. 화방만큼이나 많이 드나드는 곳이 인테리어용품이나 철물점이다. 실리콘, 우드필러 같은 미장 재료, 붓 대신에 사용하는 수세미나 싸리비 등도 있다. 그에게 회화는 촉각적인 체험이 가능한 장이며 우연적 효과에 열려있다. 면밀한 계획을 따라 작업하지 않으며, 완성된 결과가 확실하지 않아 시간적인 간격을 두기도 한다. 기호의 빈 곳과 간극은 새로운 것이 생성되는 기회가 된다. 패러다임의 변화가 일어나는 순간 기존의 코드는 맞지 않는 퍼즐처럼 흐트러진다. 속도감 있는 형상들과 밝은 색감이 특징인 작품은 모든 것이 코드로 재편되려 하는 시대에 기호 이전 혹은 이후의 무질서함, 활기, 생성, 해체 등을 표현한다. 




<무지개띠 흐름>, 2025, 캔버스에 아크릴, 96 x 61 x 4.5cm



<내부를 감싸는 띠>, 2025, 캔버스에 아크릴, 유채, 33.4 x 24.2cm


전시장 입구에 기우뚱하게 서 있는 작품 [플리즈 컴 인]은 그 불안한 양태가 움직임을 잠재한다.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기호들로 안내하는 역할을 하는 이 작품의 불안정성은 ‘기존의 의미나 기표에서 살짝 벗어나는 어긋남을 포착하기’ 위한 것이다. 작업은 연속적인 미끄러짐의 연쇄 반응이 된다. 미끄러짐은 의도의 정확한 재현을 벗어나는 모든 과정들을 함축한다. ‘통일된 흐름 속에서도 넘어짐이나 슬랩스틱 같은 작은 어긋남에 더 끌리는 이유는, 무심히 튀어나오는 이야기들, 말랑하고 미끄러운 감각 속에서야말로 진짜가 말해지고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차이로 이루어진 체계’(소쉬르)인 기호는 김귤이의 작품에서 더욱 느슨해진다. 유화와 아크릴, 페인트에 이르는 질펀한 재료들은 차이가 야기하는 미끄러짐의 유희를 추동한다. 전시장에서 관객의 동선이 막바지에 이르는 지점에 ‘행진하는 기호들’은 지구라는 거시적인 차원과 만나게 된다. 


기호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작품은 지도에서 영감받은 [인터내셔널 드림]과 [평평한 모양 심장]이다. 기호화된 세계는 미끄러짐과 도약, 단절을 통한 연결을 통해 미시적 차원부터 거시적 차원까지 주파된다. 지구를 거시적인 맥락에서 도해한 세계지도는 지구의 둥근 형태 때문에 사각형으로 재현될 수 없다. 비행이나 위성같은 또다른 차원을 알 수 없었던 시대에 만들어진 고(古)지도가 대충 실재와 비슷하다는 점은 놀라움을 준다. 탐사되지 못한 지도의 빈 곳은 미지의 영역으로 간주되었고, 그곳에는 이름 모를 괴물들도 서식한다고 믿어졌다. 지금은 세상의 거의 모든 장소가 구글 스트리트 뷰로 촘촘하게 검색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공간은 추상적 좌표찍기가 가능하다. 둥근 과일의 껍데기를 까듯 펼쳐진 다양한 형식의 지도는 입체와 평면 간의 관계이기도 한 회화를 연상시킨다. 김귤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평면에서 벗어나는 ‘회화’를 발표해 왔다. 작가는 ‘평평한 투영도를 통해 둥근 지구를 읽어내는’ 다양한 방법을 참고하면서, 지구라는 구체를 재현하기 위한 기호의 여러 가지 방식을 활용한다. 




<인터내셔널 드림>, 2025, 캔버스에 아크릴, 유채, 수성페인트, 155 x 330cm



<평평한 모양 심장>, 2025, 캔버스에 아크릴, 유채, 수성페인트, 160 x 350cm



<디딘 곳의 지표>, 2025, 캔버스에 아크릴, 수성페인트, 156 x 196cm



<()90°x10>, 2025, 캔버스에 아크릴, 수성페인트, 165 x 202cm



[평평한 모양 심장]의 경우 투영도가 아래가 뾰족한 통통한 심장 형태와 유사하다. 그것은 시각적 유사관계를 통한 상상의 비약이다.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해석의 한계]에서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유추, 연속, 유사의 관계를 갖는다’고 말했다. 유비(analogy)는 ‘촘촘한 그물을 통해 우주 전체, 즉 물질적 세계와 정신적 세계를 파악하려는 경향’(카시러)이다. 인식의 역사를 탐구하는 미셀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16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유사성(resemblance)이 서구문화에서 지식을 구성하는 역할을 했다고 지적한다. [말과 사물]의 논리에 의하면 기호들의 세계는 유사성의 세계이기도 하다. 푸코에 의하면 심연의 비가시 상태로부터 그것을 이끌어내는 하나의 가시적인 형식이 존재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비유 때문에 세계의 표면은 문장들, 문자들, 암호들, 불투명한 단어들(상형문자들)로 뒤덮이게 된다. 푸코에 의하면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유사한 어떤 것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며 기호들을 지배하는 법칙을 찾는다는 것은 유사한 사물들을 발견하는 작업이다. 


이 유사성은 ‘세계의 한 끝에서 다른 한 끝까지를 횡단하는 기호들의 그물망’이며, 이는 ‘세계를 한 권의 책처럼’(푸코) 읽게 만든다. 예술가에게는 쓰기도 가능하다. 기호가 세계를 더 많이 읽어낼수록 쓰기의 중요성은 커진다. 김귤이에 의하면 ‘기호는 뚜렷해지고자 불필요한 것들을 조정하고, 삭제한다’ 자연과학자들에게는 자연조차도 기호겠지만, 기호가 먼저 다가오는 시대에 작가는 ‘원래의 맥락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궁금해한다. 기호로 구성된 세상을 거슬러 기호 이전 또는 이후의 모습이 기호보다 더 중요하며 작가에게는 작업의 동력이다. 그는 하나의 의미로 굳어진 기호를 변형시키기 위해 기호/기표/기의/대상...등의 관계에 내재된 빈틈을 공략한다. ‘완벽한 일곱개의 무지개띠에서 나타난 균열 속에, 무엇이 드러날지 두렵기도 하지만. 그 끝없는 균열과 낯선 감각의 경계에서, 새로운 균형점을 찾으려 한다’


출전; 로이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