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를 무대화하다

박진아 전(2024.12.3–2025.1.26, 국제갤러리 K2, 한옥)

데이비드 오케인 전 (2025.1.17—2.15, 갤러리 바톤)

 

이선영(미술평론가)


박진아(1974-)의 ‘돌과 연기와 피아노’ 전과 데이비드 오케인(David O’Kane)(1985-)의 ‘Symphony of Selves(자아의 교향곡)’ 전은 예술작품을 포함해 특별한 것이 탄생하기 위한 무대 뒤편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무대 뒤편에는 평범한 일꾼부터 보이지 않는 유령에 이르는 다양한 양태의 존재가 등장하며, 이들은 예술가의 모습과도 중첩된다. 점차 많은 것들이 코드화된 현대에 차이가 중시되는 것은 예술 뿐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무대 뒤편의 모습을 소재주의식으로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선택한 소재가 묻어나오기는 하지만, 회화만의 날렵한 필치나 묵직한 아우라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정확하게 수행되어야 하는 전문적 일의 세계에 주목한 박진아의 경우 드로잉과 회화를 구별하기 힘든 속필이 특징이다. 캔버스로 유추되는 천으로 다양한 역할극을 벌이는 데이비드 오케인의 경우 벨라스케스부터 렘브란트, 프란시스 베이컨에 이르는 거장들의 필치를 참고한 신비로운 연출이 돋보인다. 전자는 특별한 강조점 없는 중성적인 차가움이, 후자는 극의 고조되면서 발생하는 열기로 가득하다. 전자의 등장인물에서는 현대적 작업 환경의 일부지만, 후자의 경우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다. 하지만 둘 다 익명적이다. 키친, 미술관, 피아노 공장 같은 장소와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그린 박진아의 작품은 독특한 장소의 면면을 살려주는 회화성이 드러나며, 세상은 그 어떤 곳이라도 붓으로 옮겨질만큼 흥미롭다는 점에서 중요한 출발점이다. 반면 데이비드 오케인은 관찰 및 대화 상대를 주체로 한정짓는다. 그는 혼자만의 무대에서 세상에 무엇인가 내놓기 위해 온몸으로 분투하며 분열과 해체도 불사한다.    

 

무대 뒤편에서 

박진아의 [키친] 시리즈는 ‘돌과 연기와 피아노’라는 전시부제에서 ‘연기’ 해당되는 장면이다. 제유법적 제목은 작품으로 선택될 무대를 열어놓는다. [키친] 시리즈가 걸린 벽면은 특별히 붉은 계열의 색이 칠해져 있어 일상적 노동의 현장은 기념비성이 부여된다. 순간과 영원의 만남은 모더니즘의 모토이다. 요리사들은 비좁은 공간에서도 각자 맡은 일을 정확히 수행하고 있다. 요리는 매일의 섭식을 위한 행동이지만 이 또한 전문가의 영역으로, 작가가 포착한 장면은 유니폼을 갖춰 입은 사업장이다. 기능적 공간을 하얗게 지워버리는 ‘연기’는 요리 또한 단순한 기능을 넘어서는 연금술적인 비법의 단계가 있음을 말한다. 비슷한 의상과 체격의 사람들이 여럿 등장하는 장면은 잠재적인 운동감이 있다. 반짝거리는 재질로 이루어진 주방은 거울의 방처럼 실제와 반영상의 유희가 벌어질 수 있다. 관객은 이 평범한 장면 속 등장인물이 정확히 몇명인지 확신하기 힘들다. 특정 장면을 재현한 듯한데, 붓질이나 물감의 흐름 또한  드러난다. 그림은 3차원 현실을 2차원적 환영으로 전달해 준다는 재현주의에 충실하려면 붓질은 드러나지 않을수록 좋고, 이는 내용을 전달하는 형식의 투명성과 관련된다. 박진아는 현실과 형식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작업해 온 화가만이 가능한 능숙한 붓질은 현실과의 동어반복을 피해 가며, 그림과 현실 그 모두에 실재의 위상을 부여한다. 그림이나 현실이 그저 환영이나 물자체라면 문제는 간단하다. 하지만 양자가 서로를 지탱해 주는 실재가 흥미로운 것이다. 관련 스텝만이 허용된 공간에서 외부인의 참관은 사진의 도움은 필수다. 박진아의 작품에는 순간을 고정시키는 사진의 기계적 시점과 육안의 관점이 함께한다. 여러 시각적 관점은 회화적 실행이라는 한가지 차원으로 수렴된다. 작품 [빨간 글자 03]에서 전시를 위해 시트지 작업을 하는 두 스텝의 검은 의상 부분은 주변의 모든 빛을 흡수하여 마치 평먼적 그림자같고, 바닥에 떨어진 그림자의 명암이 더 구체적인 역전이 일어난다. 



[국제갤러리] 박진아_돌 포장을 벗기고 03


[국제갤러리] 박진아_분홍 방의 조명


[국제갤러리] 박진아_피아노 공장 07



[국제갤러리] 박진아_키친 01


작품 [돌포장을 벗기고 03]에서 한 사람의 여러 동작이 공존하는 듯한 화면은 정지된 매체인 회화에 잠재적 동감을 부여한다. 작가는 비현실적인 오렌지빛 전시장 바닥이나 성근 붓터치가 두드러진 그림자의 처리, 투명한 평면인 비닐이 3차원적인 돌을 싸는 부피가 되었을 때의 형태에 집중함으로서 그림의 중간 매체로 활용되었을 사진과 다른 회화적 특이점을 증폭시킨다. ‘돌과 연기와 피아노’라는 전시부제에서 돌은 완강한 실제의 모델이지만, 미술관에 들어온 이유는 그것이 작품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독일의 피아노 공장에서 소재를 취한 [피아노 공장] 시리즈를 포함하여 박진아가 방문한 전문 사업장들의 노동자들은 대부분 유니폼같은 의상을 맞춰입은 익명적 존재다. 최상의 생산력을 위해 주체는 시스템의 완전한 일부가 되어야 한다. 화가도 성공적인 작업을 위해서는 홀로 작업하는 순간에도 엄밀한 자신만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 피아노의 생산공정 또한 원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허공같은 부분이 있다. [피아노 공장 06]에서는 바닥에 환히 비춰지는 빛이 바로 그 영역이다. [피아노 공장] 시리즈는 비대상적인 음악은 미술이 추상화되면서 참조한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피아노 공장은 추상적인 무엇이 창조되기 위해 얼마나 구체적인 작업이 필요한지 보여주는 역설적 단면이다. 근대의 분업화가 이루어진 이후 대부분의 생산과정은 일상과 분리되었기 때문에 생산의 현장은 신기하다. 화가의 작업실도 거의 마찬가지의 어수선함과 자기만의 질서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작품 속 작업자는 작업에 완전히 몰입된 채 그 복잡한 구성요소들을 매뉴얼에 맞춰 정확히 생산한다. 음식이나 피아노 또한 그림처럼 최후에 맞춰질 퍼즐에 유동성이 있다. [분홍 방의 조명]은 바닥까지 온통 붉은 계열이어서 다른 작품과 달리 후끈한 열기가 있는 가운데 조명을 조절하는 작업자 아래의 사람은 마치 쌍동이 분체처럼 서 있다. 현실의 반영이나 표현이 아닌, 현실과 평행하는 세계로서의 예술은 차이를 둔 반복이다.

 


데이비드 오케인의 ‘Symphony of Selves’ 전의 작품들은 화가라면 친숙할 그 천, 즉 화폭으로 하는 여러 행위가 유추된다. 천 안팎에서의 행위들은 우아하게 춤을 추거나 불현듯 엄습한 광기에 몸부림친다. 아담한 크기의 작품들이 비밀일기나 비망록처럼 나열된 전시장은 내향적이며, 작품이란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린다. 통상적으로 예술작품은 화이트 큐브에서 우아하게 전시되면서 이를 생산하기 위한 과정은 감추어진다. 물론 합리화될 수 없는 과정들이 미화되어 예술가의 신화가 되기도 하지만, 예술의 진면목은 ‘과정 중의 주체’(크리스테바)이다. 오케인이 매개로 삼은, 틀에 고정되기 이전의 캔버스는 무한한 가능성임과 동시에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고통스러운 장이다. 어디선가 떨어지는 조명은 신비로우면서도 기괴하며, 고통과 희열 사이를 왕복하는 여러 몸짓에 극적인 분위기를 부여한다. 때로 그것은 불이 붙은 것처럼 주체를 삼키려 날름거린다. 실루엣과 그림자로만 등장하는 인물은 영웅적이기 보다는 유령같다. 작품 [대화]는 마치 이슬람의 부르카처럼 천을 둘러쓴 화가가 이젤 앞에 마주하며, [캔버스 2]의 등장인물의 머리통은 연기처럼 사라진다. 전시 부제에서 ‘자아’는 복수형이고 이는 분열, 해체, 확장 같이 부정과 긍정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는 다양한 국면을 포함한다. 하지만 그 모두는 교향곡처럼 종합되기를 바란다. ‘그림자’라는 부제를 가진 작품에서 등장인물은 둘인데, 비현실적 장면 설정을 떠올릴 때 마치 분신 같은 관계를 보여준다. 나를 비추는 거울은 분열을 감추는 허구적 통합상이라는 현대 심리학의 가설에 의하면, 거울 이전의 단계에서 수많은 자아들이 경합을 벌인다. 수많은 자아들이 창궐하는 원초적 장은 정식 무대가 아니라 무대 뒤편이다. 그는 무대 뒤편에서 일어나는 사건 자체를 무대화한다. 천을 무대의 막으로 가정한다면, 무대 안팎을 나누는 무대막 자체가 공연하는 셈이다. 



 GB_DOK_2022_Simulachre VII_oil on linen canvas_50x40cm(이하 모든 사진출전은 갤러리바톤)



 GB_DOK_2024_Gloaming_oil on canvas_140x100cm



GB_DOK_2024_Untitled (Shadow)_oil on wooden panel_30x40cm


무대막은 극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투명한 기호가 아니라 그자체가 사건의 장이 된다. 천은 그 안의 인간의 여러 모습을 실루엣으로 보여주면서 변신의 마술에 대한 상상을 펼치며 시시각각 달라지는 주변의 조건을 조형적으로 받아내는 실험대이자 유희적 도구이다. 오케인에 따르면, ‘캔버스 천은 표면에 환영을 담아내는 재료이자 회화 작업이라는 마법 같은 행위의 매개체이며 우리 세계에 대한 주관적인 은유’다. ‘상상의 시공간 속 따뜻한 조명이 켜진 거실에서 막 연극을 하려는’ 모습에 대해 작가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대한 암시’라고 말한다. 요컨대 ‘그림자를 사용하여 그 너머의 무언가, 느껴지지만 아직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어쩌면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가리키려’ 한다. [Simulachre] 시리즈에서 천을 뒤집어 쓰고 붕 떠있는 존재는 마치 유령처럼 보인다. 천은 괴물처럼 존재를 삼켜버리려 한다. 검은 그림자같은 존재는 조명에 자세하게 주름진 모습을 보여주는 천보다 더 실재감이 없다. 그것이 창작에 대한 비유라면, 비극이기 보다는 이상적 상황일 수 있다. 바닥에 발을 딛고 선 지상적 삶의 주체는 화폭에 완전히 스며든다는 비유이기 때문이다. 작품 [Simulachre 8] 천을 둘러쓴 남자 옆 벽면에 하얀 물감 자국이 흘러내린다, 작품 [Simulachre 1, 2, 9]는 천을 둘러쓰고 앞이 보이지 않은 채 헤매거나 갈팡질팡한다. 그 와중에 누워있는 모습은 없는 것이 아무리 몽환적이어도 작업이란 꿈일 수는 없다는 의미다. 캔버스가 직접 등장하는 작품 [Gloaming]은 제목처럼 땅거미 질 무렵의 색감이 부드럽게 접혀지고 펼쳐지는 천의 맥락이 보다 분명하다. 멀리서 보는 풍경으로서의 여명은 아름답겠지만 그때까지 고민하는 화가의 입장이라면 다르다. 실루엣으로 보이는 힘겨운 자세는 시지푸스의 신화 속 돌을 굴리는 모습같다. 한편 작품 [dawn]는 캔버스를 뒤로 하고 나가려는 자세다. 그림틀이 뼈라면 화폭은 살이나 피부다. 풍부한 주름을 만드는 내부적 행위는 그 둘을 잘 안착시켜 생명력을 가지는 무엇을 창조하기 위한 고뇌이다.

 

출전; 아트인컬처 2025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