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문자, 〈광야에서〉, 2024, 캔버스에 아크릴,
163×131cm ⓒ CHO Moon ja, 성북구립미술관
6.25전쟁이 끝난 혼란스런 상황에서도 예술의 꽃은 폈다. 전후 한국 전위미술의 포문을 연 《현대》전은 1957년 당시 20대 중후반의 작가들이 주동이 돼 결성한 ‘현대미술가협회’의 정기전이었다. 김창열, 박서보, 하인두 등 십 수명에 달하는 회원들은 당시의 대표적인 등용문인 ‘국전’의 막강한 권력과 심사 비리를 둘러싼 부조리에 극렬히 저항했다. 서구에서 들어온 앵포르멜과 추상표현주의 미술 경향이 이들의 언어였다. 60년대 초반에 서울대 미대를 졸업한 작가들은 ‘60년미술가협회’, ‘벽’ 동인회를 결성하고 국전에 반대하며 거리로 나서, 덕수궁의 서쪽과 북쪽 담벼락에 수백 호에 달하는 대형 캔버스 작품을 걸고 선언문을 발표하며 일대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60년대 중반까지 지속된 이 전위미술 운동에 동참한 여성 작가는 한 사람도 없었다. 전후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여성의 이름이 조명되는 것은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에 이르러서이다. 앵포르멜의 열기가 가시자 ‘탈평면’을 주장하며 해프닝, 설치미술, 오브제 미학을 들고나온 ‘무’와 ‘신전’동인 중에서 김영자, 심선희, 정강자의 이름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 그 당시까지만 해도 가부장 중심의 유교적 구체제의 관습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사회의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1959년도에 홍익대 미술대학 회화과에 입학한 조문자(1939- )는 학교를 졸업한 1962년을 전후하여 앵포르멜 화풍의 작업을 시도하였다. 1962년은 ‘현대미술가협회’와 ‘60년미술가협회’가 의기투합하여 ‘악뛰엘’을 결성하고 합동전시를 연 해이다. 말하자면 화단을 뜨겁게 달궜던 앵포르멜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가던 시기였던 것. 조문자가 이 전시를 봤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 경향의 작품이 남아있다. 1971년 ‘표현’그룹의 결성에서 비롯되는 여성미술의 역사에서 그보다 앞선 시기의 이 빈곤한 서사에 대해 후대의 미술사가들은 과연 어떻게 평가할는지 궁금하다. 이수재를 비롯하여 조문자, 석난희, 고(故) 최욱경, 고 이정지, 고 홍정희, 윤미란, 진옥선 등등 어느덧 원로가 된 추상화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대한 비평적, 미술사적 연구와 전시기획 등이 활발히 일어나야 할 때이다.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열린 《고동치는 대지: 조문자》(3.27-5.25)전은 앞서 언급한 내용을 염두에 두고 음미해야 할 전시였다. 그 이유는 이제는 거의 다 고인이 된 ‘현대미술가협회’ 회원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그 반대 급부로 남성들의 활동상에 가려 존재감이 온전히 드러나지 못했던 여성작가의 진면목을 역사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마침 성곡미술관에서는 《석난희_그림 속의 자연 畵中自然》(4.10-7.6)전이 열리고 있어 그 시너지 효과는 더욱 크다. 얼마 전 나는 성곡미술관이 주최한 ‘앵포르멜과 여성작가들’ 이란 강연회에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였다. 홍익대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석난희(1939- )는 자연을 화두로 삼아 평생을 추상의 세계에 몰입, 목판화와 함께 특유의 화풍을 수립한 작가이다. 어느덧 구순을 바라보는 한국화단의 원로작가인 이 두 분에게 범화단 차원의 따뜻한 관심이 있기를 바란다.
성북구립미술관의 조문자 전시는 아키이브전을 겸한 준회고전 성격의 전시였다. 1957년에 창립, 전위적 성격이 강했던 조선일보사 주최의 《현대작가초대공모전》(1963) 리플릿과 사진, 각종 서류 등이 추상화 대작, 드로잉 작품들과 함께 전시되었다. 조문자 화백은 1962년 ‘7월회’를 통해 화단에 나온 이래 약 60여 년에 이르는 세월동안 오로지 추상화의 세계에 몰입했다. ‘광야(廣野)는 그녀의 일관되고 오랜 화두와도 같은 주제다. 전시는 ‘새벽:자연의 숨결’, ‘정오: 대지의 리듬’, ‘황혼: 영원의 여운’등 세 개의 소주제로 이루어졌다. 짜임새 있고 알찬 전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