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_Creator, 〈white cat〉 시리즈, Youtube 영상갈무리


1990년대 처음 썼던 컴퓨터는 도스Dos 명령어를 직접 입력해 구동하는 ‘286’ PC였다. 나는 여전히 컴퓨터 관련 지식이 희박하지만, 기계 또한 이용자(user)에 맞춰 진화하여 원리는 몰라도 쉽게 사용할 수 있기에 정보혁명의 수혜를 받고 있다. 역사에서 변화는 상수지만 반세기도 안되는 사이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였고, 그 끝은 상상할 수 없다. ‘인공지능(AI) 기반 검색이 구글 등 전통 검색 엔진을 대체할 것’(아시아경제, 2025.5.8)이라는 전망이고, ‘인공지능에 대한 기초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제프리 힌턴 교수가 AI가 향후 30년 내로 인류를 멸망 시킬 가능성이 10-20%에 달한다’(이코리아, 2024.12.30)고 경고한 바 있다. AI와 경쟁해서 도태될 직업군이 나날이 확대되는 즈음, 창작과 비평의 위상은 어떤 변화가 있을까. 이용자는 글자가 많은 콘텐츠 자체를 꺼리며, 자료 검색조차 동영상 플랫폼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올해 20주년을 맞은 유튜브는 보편적 접근성과 다양한 콘텐츠 등으로 일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미지의 손쉬운 생산과 소비가 대중문화의 총아인 영화관마저 위기에 빠졌다. 음악도 음반이 아니라 개별 곡 단위로 스트리밍 된다. 

하지만 동영상 플랫폼이 미술 분야 소통에서도 유력한 매체인지는 의문이다. 유명 작가라도 소개 받은 링크에 접속해 보면 조회수가 초라하다. 미술작품의 밀도가 너무 높아서 가볍게 흘러가야 하는 SNS의 속성과 맞지 않는다고 추측할 따름이다. 미술은 읽을 수 있는 콘텐츠가 아닌 수수께끼 같은 덩어리로 이용자의 손끝을 무심히 지나친다. 무서운 속도로 학습하며 생성하는 AI는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솔로몬)는 오래된 진리의 예다. 하지만 복제의 속도나 저장용량 등은 양질 전화(轉化)의 문턱을 넘었다. 그것은 마크 포스터가 「뉴 미디어의 철학」에서 정의한 ‘정보양식’이라 할만한 단계로, 정보는 대상을 재현하는 수준을 초월한다. 기계적 무의식이 작동하는 듯한 알고리즘의 안내로 우연히 접한 AI 동물애니메이션이 흥미로웠다. 19세기 중반 사진의 등장과 뒤이은 영상만 해도 얼마나 많겠는가. 그 데이터들을 ‘딥러닝’해서 거의 실사 수준의 동영상 콘텐츠가 뚝딱 만들어진다. 이전에 문화생산공장으로 간주된 할리우드나 디즈니 급에서나 가능한 생산력이다. 특정 콘텐츠가 한번 뜨면 흉내 내는 것도 금방이다. 아직은 스토리 전개가 전형적이지만, 수많은 정보원을 끌어들여 붙여나가는 방식은 더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신문도 챗GPT 생성 이미지로 삽화나 사진을 대신하는 경우가 늘었다. 하지만 예술에선 아직 가능성에 머무는 이유는 각 장면의 연결고리인 맥락은 어디서 퍼올 수는 없다는 점이다.

고속열차나 비행기를 타면 빠르게 목적지 가까이 다가갈 수는 있지만, 도달해야 하는 세부 주소까지 찾아가는 것은 또 다른 과제다. 결국 이러한 AI 애니메이션도 이전의 애니메이션처럼 ‘그려져야만 하는 부분’은 있다. 「인용문만으로 글쓰기」라는 포스트모던적인 방식을 상상한 평론가 수전 손택의 예도 있으나, 결국 불가능한 시도였다. 이음매가 툭툭 터지는 자료와 달리, 작품은 살아있는 경계를 가진다. 자료 더미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는 것은 생산자의 몫이다. 무지에서 앎으로 나아가는 짧은 인생의 여정에 차이가 스며든다. 삶은 ‘복붙(복사하기+붙여넣기)’이 불가능하다. 내가 알기도 전에 이미 어딘가에 정리되어있을 어마어마한 정보는 현재 무인 자율주행 중이며, 결국 생산자라는 몸과 마음의 깔때기를 통과해야 한다. 교육을 비롯한 여러 시스템은 차이를 낳을 그러한 변수를 고무하면서도 차단할 것이다. 때로 정보부족보다 정보과다가 장애물일 때가 있다. 읽기와 쓰기는 연동되지만, 이제 읽기보다 쓰기가 더 중요시되는 시대다. 쓰기라는 맥락은 최종적으로 퍼즐을 맞추는 단계를 거치며 수많은 자료 선택의 기준이 된다. 문화평론가들은 생성형 AI 시대에 쓰기의 비중은 더 커진다고 입을 모은다. 일단 질러보는 작업이 성공할 확률도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