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짝 열리는 비밀의 문
이선영(미술평론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명령어 ‘Follow the Rabbit’의 변주인 <FOLLOW THE CRACK> 전은 전시가 열린 연희동 on air의 장소성과 밀접하다. 어디든 초행길은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미로이기 마련이지만, 이곳의 장소성은 특이하다. on air 는 주택가와 대학의 경계선, 즉 주택가 쪽에서도 캠퍼스 쪽에서도 막다른 길에 위치한다. on air는 그 사이에서 일종의 비공식 통로 입구로 열려있다. 대학이나 마을에 가기 위해 지름길을 통과하는 주민이나 학생들은 물론, 전시 관람을 위해 그곳을 찾는 관객에게 여정 자체가 독특하다. 작가는 이 여정 또한 순발력 있게 작품으로 만들었다. 원래 이름에도 ‘연희’라는 말이 들어가 있었던 그 학교는 동서남북에 널찍한 ‘공식’ 교문이 있다. 시스템은 공식적인 것만 운용하려 하겠지만, 마을과의 경계가 산등성이를 따라 워낙 넓은 지역에 걸쳐있기에 또 다른 통로는 누군가에게는 필요하다.

on air 전시전경(사진; 백영철)


문은 크든 작든 공식적이든 아니든 근본적인 상징이다. 천국의 문, 지옥의 문, 등용문 등등 인류의 상상계에서 문은 핵심적이었다. 작가가 참고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차원을 이동하는 문을 비롯하여 화이트홀/블랙홀 같이 우주적인 차원에 이른다. 대개 닫혀있는 그 문은 사람만 자유롭지 않지, 이 전시 공간이나 작품이 품고 있는 타자들 중의 하나인 고양이들은 얼마든지 왕래한다. 이모저모 다른 방식으로 가능한 공간에 만약 하나의 공식적인 통로만이 고수된다면, 이는 권력에의 의지가 깔린 것이다. 시스템은 통과를 조절한다. 길(방법)을 하나로 제한할수록 시스템은 강화된다. 일상에서 대표적인 것은 이른바 고급 아파트와 보통 아파트 사이의 보이는/보이지 않는 장벽 속에서 큰길과 지름길 사이의 갈등이 있다. 거시적으로는 세계를 넘나들며 이익을 창출하는 자본과 이동에 극도의 제한을 받는 노동의 대립이다. 전시장 주변 대학의 공식 문들 중에도 몇십년 전에는 쪽문이었던 기억이 있다.
없던 길도 누군가 계속 가면 길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번듯한 간판도 없었는데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번지수로 확인을 했다’고 기억하는 전시장은 일단 들어가면 연희동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을 가진 멋진 곳이다. 작가는 전시장만큼이나 흥미로운 ‘건물벽과 벽 사이의 좁은 골목’에 관심을 둔다. 한 사람 겨우 지나갈 그 틈새는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었다. 길 아닌 그 길을 통과하면 갑자기 시야가 넓어지며 예상 밖의 장면이 펼쳐진다. 작가는 그 길목에서 ‘토끼굴로 내려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통로/틈새’를 연상한다. 전시 준비를 위해 그곳에 처음 방문한 이 마술적인 장소에서 영감받아 기존 작업과의 연결 지점을 찾아냈다. 전시는 새로운 작품과 그와 관련된 기존의 작품을 재배치하면서 스스로를 다시 읽고 쓰는 과정이다. 낯선 어딘가를 찾아가는 여정은 자신을 (재)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행복의 파랑새는 이미 곁에 있을 수도 있다.



예술에는 전대미문의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환상이 있지만, 자신에게 있지 않았던 것이 작품으로 나오기 힘들다. 이영희의 작업에서 무의식을 의식화하고 의식을 흐릿하게 하는 쌍방향의 변주가 상시적으로 일어난다. 정신분석은 정상/이상의 경계가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로렌초 키에자는 [주체성과 타자성; 철학적으로 읽은 자크 라캉]에서 라캉은 모든 주체가 잠재적으로 정신증자이며, 부수적인 봉합을 통해서만 이 조건을 회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주체는 오로지 절단의 간격 속에 있다’(라깡)는 언명에는 이영희가 주목하고자 하는 틈/크랙이 있는 것이다. 라깡의 정신분석은 명확한 자아를 확인하거나 찾고자 하지 않는다. 통합된 자아 자체가 상상적 소외이기 때문에 이를 극복함으로서 ‘무의식의 주체를 실현하는 것’(라깡)이다. 인간은 완전한 주체도 타자도 될 수 없고 그 경계선상에서 헤맨다. 예술가는 이러한 방황을 즐길만한 실험으로 전환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인간이 되는 과정에서 언어 자체의 분열적 조건에 직면하게 된다. 주체 또한 언어처럼 과정 중에 있다. 사라 살리는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에서 만약 주체가 언어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고, 언어가 불완전하고 끝나지 않는 것이라면 주체 자체도 이와 마찬가지로 불완전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영희의 작품 또한 현대의 심리학, 언어학의 가설처럼 형성 중인 언어적 구조와 밀접하다. 작품은 ‘일관된 존재론적 총체가 분열되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신호들’(사라 살리)로 가득하다. [주디스 버틀러의 철학과 우울]은 불가능한 욕망 및 결핍으로 분열된 주체와 투명하고 완벽한 의식을 가진 주체를 대조한다. 이 중에서 예술가는 어느 편에 가까울까. 이영희 또한 자신이 보낸 생애의 주된 시간을 사회가 인정하는 주체로 살아왔다. 수십년간 그녀에게 작업은 통으로 주어진 시간이 아니었고 틈이 나면 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이 전시의 키워드에 속하는 ‘틈’은 일종의 해방구와도 같다.



경계를 확실히 함으로서 이익을 얻는 집단에게 틈은 카오스로 이어질 붕괴의 조짐이다. 경계 안에서 충실한 삶과 달리, 경계 위의 존재인 예술은 금지나 금기와 맞딱뜨린다. 한편은 안전하지만 지루하고 다른 한편은 불안정하지만 흥미진진하다. 물론 불안정하고 지루함, 안전하면서 흥미로움이라는 또 다른 조합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예술의 존재 조건은 그러한 시험 문항의 선택같이 여유롭지 않으며 실제의 삶 또한 그러하다. 지배적 질서에서 틈은 생겨서는 안되고 이를 위해 더 거창한 대비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대비가 또 다른 억압과 조절을 낳는다. 준비라는 미명 아래 인간의 에너지를 묶어두고 이를 전용하는 지배 집단과 이를 추종하는 다수는 늘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어막을 변화시키고 싶은 측에게 금기는 위반의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작가에게 틈은 옴짝달싹할 수 없을 것같은 현실의 질서에 변형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기대의 진원지다.
‘<틈/CRACK>은 또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포털이며 단절이 아닌 재구성의 시작점으로 이해’한다. 작가에게 틈은 1990년대 초반부터의 주제였다. 이는 전시와 동시에 출판 형식의 책자들을 발간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특히 이영희의 작업은 쓰기가 깔려 있는데, 글자나 기호는 그자체가 분절화된 형태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또한 문장은 빈칸(띄어쓰기)이 있어야 제대로 읽혀진다. 차이의 체계로서의 언어의 특성과 더불어 예술적 전복으로서의 틈이 있다. 그것은 지배적 이데올로기인 상징계에 구멍을 뚫는 행위로서의 작업이다. 심리학과 언어학, 인류학 등에서 상징적 질서는 ‘인간 문화의 법적 짜임새’(라깡, 레비스트로스)로 정의한다. 상징적 질서 또한 언어처럼 무의식적 무의식적 구조로 이해된다. 따라서 언어를 다루는 작업의 실천적 중요성이 강조된다. 특히 2016년에 터진 세월호 사건은 수년간 이영희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소재였다.



이번 전시에서도 빙산의 일각처럼 표현된 세월호 관련 기사들 아래로 자라는 줄기들은 드로잉 뿐 아니라 부조와 설치 등으로도 나타난다. 그러한 영웅적 위반의 행위 외에 자신이 처한 몸의 상황도 포함되어 있다. ‘노년에 접어든 저는 어쩌면 손이 떨리며, 흐릿한 시선에 초점이 나가고, 푸석하고 말라가는 온몸에는 검버섯과 같은 어떤 오점이나 흔적들이 나타나는 일들을 직면하게 될 것’이지만, ‘이를 당당히 맞닥뜨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일종의 ‘삶의 크랙’을 인정하고 통과하면서 ‘기억의 층위, 감각의 균열, 존재의 변형을 경험’하고자 한다. 이 틈 사이로 봇물 터지듯 흘러나오는 것들이 있다. 모든 생명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변모가 아닌 것이 없다. 고정되어 보이는 것들은 변형의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일 뿐이다. 변형의 자리로서의 틈은 막혔던 영감에 주저앉아 있다 신나게 내달릴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작가뿐 아니라 그 작품을 보고 나름의 대화적 상상력을 가동시킬 관객 모두에게도 틈은 필요하다.
이영희에게 틈은 현상 유지가 아닌 변화를 위한 문턱이다. 물론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를 그 문턱은 위험하기도 하다. 하지만 작가는 순수가 배제하려는 것들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품는다. 이번 전시의 주요 매체인 정상적인 사진의 문법과 달리 흔들렸으며, 이미지가 안착되어야 할 매끄러운 표면은 누더기 이불같은 모양새다. 세상을 정확히 재현하는 듯한 사진은 완전함을 보증할 순간이 아니라 지속의 과정에 노출된다. 이번 전시의 주된 매체인 사진은 대부분 흔들리고 초점이 나갔다. ‘핸드헬드 촬영으로 만들어진 사진 속에는 흐릿한 초점, 비틀린 색감, 기울어진 수평이 존재’하는데, ‘이는 색의 본질, 사물의 근원적 형상, 시간의 진동을 감각하게’ 만든다. ‘흔들리는 시선 속 몸짓은, 자신의 감각적 불완전함을 인정하며, 그것을 예술로 전환하려는 능동적 수용의 흔적을’ 드러낸다. 순간을 중시했던 철학자 바슐라르는 지속을 일종의 오염이나 타락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모더니즘의 순간의 미학은 미학적 이데올로기 중의 하나로 상대화되면서, ‘지속’(베르그송)은 또 다른 평가를 받는다. 모든 진실 또는 현실은 결정적 순간이 아닌, ‘차이와 지연의 계열’(데리다)이 된다. 또는 해체된다. 시간적 추이만이 ‘현진실’(크리스테바)을 진면모를 입체적으로 담아낼 수 있다. 이영희에게 현실은 다공질이다. 입구와 출구가 정해져 있지 않다. 또는 만약 그것이 있더라도 찾기 힘든 미궁이다. 투명한 직선과 달리 불투명한 미궁은 여성적 상징이다. 로버트 A 존슨은 [신화로 읽는 여성성 SHE]에서 중심에 도달할 때까지는 도망칠 수도 휴식도 없는 미궁은 인간 삶의 대표적인 상징이라고 보면서, 궁극적으로 삶의 도달점은 신비로운 자궁이라는 중심이라고 말한다. 로버트 존슨에 의하면 미궁은 미궁 속으로의 여행을 완수하는 사람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순간에서 영원으로, 무지에서 지혜로 변화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전시에서 주요 매체가 된 사진은 ‘결정적 순간’에 대한 기대치가 있지만, 작가는 그것을 배반한다. 물론 사진이 순간을 포착한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이번 전시에 이어서 올 하반기에 안양에서 이어질 전시부제는 ‘흔들리는 순간’이다) 광목천에 출력한 사진은 솜이불처럼 재봉질 된다. 물론 재봉질은 어떤 기능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계를 사용하는 자유 드로잉에 가깝다. 이미지는 이중삼중으로 불투명해지고 어떤 기운이 고이거나 흘러가는 굴곡만이 남는다. 어떤 이미지든 촉각성이 증대되며 도톰하고 굴곡진 표면은 온기를 보유한다. 배접 광목천에 출력된 사진(UV 평판인쇄)은 인화지의 색감과 달리 바랜 듯이 보인다. 생 광목천에 박힌 검은 점들은 오염과 흔적을 강조한다.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배접 광목천은 표구에서의 배경천으로 쓰여지는 주변적 재료이다. 여러 작업으로 결과된 울퉁불퉁한 표면은 ‘추운 겨울 솜을 채워 오래오래 겨울을 난 헤진, 솜이 비져나온 누빈 옷’과 같다.



액자 안에 넣은 사진들은 흔들림이 강해 거의 회화적이다. 결과는 추상적이지만 시작은 현실이다. 골목길부터 식물원까지 작가가 찾아다니는 장소는 현실의 어느 곳이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최초의 지시대상에 속한 형태와 색감, 명암 등이 반영된다. 목적지는 불확실해도 처음의 출발은 있다. 예술은 나로부터 시작지만 도달하는 곳은 기존의 내가 아니다. 대개 나를 확인하는 작업은 대개 그렇고 그런 그림 일기같은 평이한 결과물에 머문다. 나를 향한 여정은 직선은 아니며 거듭되는 우회로를 거친다. 이번 전시에 영상은 사진의 연장인데, 그 흐릿함은 연속적이다. 한낮의 빛이 들어오는 유리창 옆에 상영되는 영상을 위한 검은 암막은 없다. 그래도 작품에 등장하는 고양이의 눈빛은 강렬하고, 영상으로 확대된 눈은 수많은 크랙으로 가득하다. 고즈녁한 전시장에 울려퍼지는 고양이 소리는 자연과 문명의 경계에서 진화해온 타자의 현존을 일깨운다.
고양이는 공식적으로 정해진 대로(大路)가 아닌 자기들만의 길로 다니며, 월등한 운동감각으로 인간과는 다른 시야를 확보함으로서 다른 가축과 달리 잘 길들여지지 않는다. 영상은 그 자체로는 명확한 구성을 가지지 않지만, 어느 부분부터 봐도 상관이 없고 어떤 장면이든 다른 작품들과 상호보완적이다. 전시장의 이런저런 형식의 작품들은 하나에 완벽하게 담아내려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을 서로 보충하는 집합적 관계를 가진다. 굳이 털어내지 않는 점들은 변화가 일어나는 틈의 시작일 수 있다. 대지나 식물 이미지가 가득한 그의 전시장에서 점은 씨앗같은 느낌이다. 특정한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은 재봉질처럼 흩뿌려진 씨앗의 이미지는 다 자란 이후에야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그런 씨앗같다. 드로잉은 현실로 나와서 설치작품이 된다. 역설적으로 불확실성은 확실성을 요구한다. 사진은 아무리 흔들려도 인덱스로서의 특징이 남아있다.



이영희의 작품은 손으로 꾹꾹 눌러쓰는 필기감, 온몸을 진동하며 내달리는 재봉질, 원초적인 대지나 살의 느낌이 나는 재료 활용이 특징이다. 사진이든 영상이든 AI 든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것에 인색하지 않은 작가는 새로운 미지의 길에 열광한다. 무엇보다도 이영희는 자신이 던져진 상황과 씨름하면서 작업을 진행해 왔다. 붕 떠 있는 무중력적 시공간이나 초월성, 관념성은 지양된다. 그 모두는 우연적 순간이 고정된 것, 또는 물화된 것에 불과하다. 작가는 고정이 과정이 되는 틈을 노린다. 잠재적 틈을 현실화하고, 현실적 강고함을 흔든다. 미술보다 더 객관적으로 여겨지는 사진은 적절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설치작품에서 대지나 살 비슷한 덩어리들은 어디에서 성장 또는 퇴행의 싹이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유연하고 유동적이다. 대지를 조각 내어 떼어낸 듯한 설치작품들은 아래로 늘어진 줄기들의 초록 색감 때문인지 위보다는 아랫부분이 더 생동감 있다.
왕겨를 활용한 거칠거칠한 대지 형상은 지상과 지하의 에너지를 가득 머금은 물질로 그자체가 경계면을 이룬다. 물질과 에너지는 물리학적으로 호환된다. 여러 높이로 설치되어 있으며 천정에서 내려오는 줄기들은 설치작품이 공간에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장(場)이 되는 것임을 말한다. 부풀어 오르거나 아래로 흘러내리거나 하는 움직임을 강조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틀이다. 무한과 유한은 생과 죽음처럼 서로의 이면이다. 그것은 현대 정신분석학이 실재계와 상징계의 밀접한 관계를 가정하는 것과 같다. 벽에 걸린 부조나 드로잉은 여러 차원으로 파생되는 작품 성격을 알려준다. 가령 흔들림 때문에 지시대상보다는 빛과 바람의 느낌으로만 남아있는 사진 이미지들은 대지에 뿌리내리는 식물과의 관계를 말한다. 식물은 빛을 고정시켜 지상에 양분을 공급하고 바람에 씨앗을 날려 보낸다. 동물, 식물, 광물이 중첩되는 이영희의 작품은 서로를 향한 잠재적 동감으로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