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기자 / 회화의 지층, 혹은 시간의 지층
고충환 | 미술평론가
Destiny에서 Time accumulation으로. 운명에서 시간의 축적으로. 작가의 작업에서 주제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작가의 작업에 대해서 주제가 말해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가. 회화는 회화일 뿐, 그림은 그림일 뿐이라는 주장으로 뒷받침되는, 프랭크 스텔라의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이다, 라는 동어반복으로 뒷받침되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의한 순수 추상회화가 아니라면 주제는 그림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마련이고, 그런 만큼 작업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추상회화는 의미를 담보하지 않는 그림인가.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추상회화는 없다고 했다. 순수 추상회화를 주장하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그림은 추상이든 형상(구상)이든 의미를 담보한다. 다만 그 의미가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재현적이거나 암시적인 차이가 있을 뿐.
운명에서 시간의 축적으로. 다소간 존재론적인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것도 같은 주제와 외관상 추상회화처럼 보이는 작가의 작업 사이에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주제는 작가의 작업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는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각 운명과 시간으로 나타난 묵직한 주제 의식이, 그러므로 평소 작가의 사유가 어떻게 작업으로 체화되고 있는지, 그림으로 형상화되고 있는지 볼 일이다.
Destiny.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나는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운명이란 것이 있다면, 아마도 이런 자기에 대한 절대 무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삶의 태도일 것이다. 운명이란 다르게는 숙명을 의미하고, 자연 그대로 사는 삶을 의미할 것이다. 작업을 처음으로 시작했을 때 작가는 아마도 이처럼 미증유의 안갯속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창백하게 하얀 캔버스를 앞둔 모든 작가들이 겪었을, 그러므로 그 자체 회화의, 화가의 알레고리라고 해도 좋을 통과의례를 작가도 겪었을 것이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무엇을 어떻게 그린다는 의식도 없이 막연하게 그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막막한 마음을, 그러므로 마음 풍경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막연한, 막막한, 알 수 없는 어둠 자체와도 같은 마음 풍경을 그리다가 저절로 우주적 비전에 가닿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우주를 의식하고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주보다는 마음을, 존재를 투명하게(정직하게?) 반영한다는 심정으로 그리다 보니 그 과정에서 저절로 우주적 비전이 열렸고, 우주적 비전에 가닿았을 것이다. 그렇게 마침내 절대 어둠과 최소한의 빛의 비율로 구조화된 존재라는 생각에 가 닿았을 것이다. 잠시 잠깐 반짝였다가 이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마는 유성 같은 존재, 막막한 우주 속을 저 홀로 떠도는 미아처럼 고독한 존재라는 성찰에 가닿았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 풍경을 그리고, 우주적 비전을 여는 그림을 그리다가, 작가는 이후 흘리기 기법의 그림으로 넘어간다. 캔버스 가장자리에서 물감을 흘려 물감이 화면 아래쪽으로 흘러내리게 했다. 그렇게 물감이 흘러내리면서 화면에 비정형의 선을 그리게 했다. 화면을 타고 흘러내린 물감이 바닥에 도달하기도 하고, 도중에 멈춰 맺히거나 한다. 그러면 캔버스를 뒤집어서 물감을 흘러내려 나머지 부분을 채웠다. 그렇게 가로로 선이 중첩된 그림을 그리고, 세로로 선이 포개진 풍경을 그렸다. 그렇게 추상 풍경 혹은 관념적인 풍경을 그렸다.
이 일련의 그림들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중력과 우연성이다. 사물에 운명이 있다면 중력이 그럴 것이고, 존재에 운명이 있다면 우연성일 것이다. 의도적인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그림 스스로 그림을 그리게 했는데, 그 과정에서 중력과 우연성이, 사물의 운명과 존재의 운명이 자기를 실현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여기에 가로 풍경과 세로 풍경은 각각 날실과 씨실에 해당할 수 있다. 나와 네가 합심해서 짜는 삶의, 관계의, 존재의, 운명의 망을 표상한다고 해도 좋다.
Time accumulation. 캔버스 가장자리 선을 따라 물감을 흘려보내면 물감이 화면을 타고 흐르다가 바닥에 떨어지고, 그렇게 흘러내린 물감이 바닥에 쌓인다. 그렇게 쌓이면서 얇고 부드러운 물감 피막을 만들고, 때로 제법 두툼한 물감층을 만든다.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시간이 쌓이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물감이 쌓인다는 점에서 회화의 지층이라고 해도 좋고, 시간이 쌓인다는 점에서는 시간의 지층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 속에 시간이라는 또 다른 개념이 들어온다. 시간 자체가 운명의 또 다른 꼴, 형태, 그러므로 존재 방식임을 인정한다면(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는 없다), 다른 개념이 새로이 도입된 것이라기보다는 운명이라는 큰 주제의 변주, 그러므로 운명의 확장과 심화로 보아도 좋다.
그러므로 적어도 주제를 놓고 본다면 전작과 근작이 다른 그림이라기보다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속되면서 변주되고 있는 경우라고 해도 좋다. 여기에 시간 자체는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데, 시간에 몸을 부여해 시간을 가시적인 층위로 끌어냈다는 점, 그렇게 보고 만질 수 있는 시간을 예시해주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일이다. 더불어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것이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는 일이고,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일임을 생각한다면, 이런 예술의 정의에도 부합하는 부분이 있다. 여기에 부드러운 물감의 피막을 통해서는 시각적이면서 촉각적인 공감각이(그러므로 보고 만질 수 있는 회화가) 실현되고 있다고 해도 좋고, 이로써 시각을 촉각으로까지 확장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처음부터 시간을 쌓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력과 우연성이 만든 결과가 어느 날 눈에 들어왔고, 저게 언젠가는 무언가가 될 수도 있겠다고는 생각했을 것이다. 예술가적 본능이 작용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는 얇고 두툼한 물감 피막을 오리고, 자르고, 겹치고, 구부리고, 접는 과정을 통해서 일종의 오브제 회화를 만들었다. 회화이면서 조각이기도 한, 평면이면서 입체이기도 한,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허물면서 넘나드는, 그렇게 회화와 조각을 하나로 아우르는, 어떤 지경에 이르렀다. 회화와 조각과 오브제를 하나로 아우르는, 경계 위의 회화라고 해야 할까. 물감 자체가 회화를 대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물감 자체가 하나의 오브제로서 제안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르테포베라와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가난한 미술이라는 의미의 아르테포베라는 가난해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재료 자체를 하나의 오브제로 제안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물감과는 다르지만, 자연(물)을 오브제로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본의 모노하(물파)와도 예술에 대한 이해를 같이한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오브제 회화를 매개로 한 작가의 작업이 마침내 캔버스에 정착되었다. 따로 물감 피막을 만들고, 쌓고, 단면을 잘라 캔버스 틀 속에 차곡차곡 쌓은 것이다. 어떤 색깔을 어떻게 쌓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변주가 가능한 작업이다. 어떤 패턴을 어떻게 조합할 것인가 여하에 따라서 다양한 유형의 작업이 가능한, 열린 형태의 작업이다. 유형이, 형태가 열려 있는 만큼 운명이란 큰 주제가 또 다른 형식으로 변주되고 각색되는 종류의 서사도 좋고, 아니면 아예 다른 부류의 서사를 기대해봐도 좋을, 그런 작업이다.
여기에 시간을 쌓는다는 주제 의식이 그동안 작가가 지나쳐온 화력과도, 삶의 연륜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쌓인 후에, 시간이 지난 후에, 시간이 흐른 후에 가닿은 어떤 지점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므로 어떤 각성과도 같은 경우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시간이 차곡차곡 쌓아 만든, 시간의 지층 앞에 서게 만든다. 알록달록했던, 아기자기했던, 세심했던, 무심했던, 화려했던, 우울했던, 들떴던, 시간 앞에 서게 만든다. 운명처럼, 흐르는 시간 앞에 서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