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결수 / 사물 인격체, 그리고 존재의 집을 짓다 


고충환 | 미술평론가

노동의 효과. 엄밀하게 노동과 효과는 작가 김결수가 시종 일관되게 고집해온 주제다. 매번 부제도 없다. 결정적인 계기가 없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작업이, 창작이, 예술이 노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의 효과는 작가가 평소 그로부터 작업을 하는 이유와 당위성을 끌어오고 있는 인문학적 배경이라고 해도 좋다. 

예술은 노동이다. 예술도 노동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다른 노동과 어떻게 다르고, 예술은 언제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노동이 의미가 있을 때 노동은 비로소 노동이 된다. 의미가, 의미 생산이 노동에서 결정적이라는 말이다. 적어도 자발적으로 무의미한 노동을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노동이 인간을 소외시키고, 자본이 사람을 소외시킨다. 영화 <모던타임즈>에 보면, 노동자 찰리 채플린이 기계를 조립하다가 마침내 스스로 부속이 되어 기어와 함께 맞물려 돌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에 체제 정비와 자동화 시스템이 노동자를 해고해 살길이 막막해진 사람들을 다룬 영화와 문학은 수도 없이 많다. 사람이 기계가 되고, 노동력이 자본으로 환산되는 이런 현실에 노동이 있을지는 모르나, 의미 있는 노동은 없다. 

그나마 농사가 이런 의미 없는 노동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이나,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격언에서처럼 농사에는 농부의 의지가, 계획이, 생각이, 결단이, 그러므로 자기가 매개된다. 그리고 여기에 바람과 구름과 빛과 공기와 같은 자연과의 상호작용이 부수된다. 흥미롭게도 바슐라르 역시 모네가 말년에 그린 수련 연작을 분석하면서, 물질적 상상력 개념을 매개로 작가와 자연이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이처럼 농사는(그리고 어쩌면 예술 또한) 그 자체 자연 친화적인 노동이면서, 인과론에 부합하는 정직한 노동이면서, 불교로 치자면 업을 실천하고 실현하는 노동이다. 그리고 여기에 생명을 이롭게 한다는 점에서 생태적인 노동이고, 윤리적인 노동이기도 하다. 
그렇게 작가는 농사를 짓는다. 논이 아닌, 전시장에서 농사를 짓는다. 농사의 축소판이고, 유사 농사라고 해야 할까. 전시장에 흙을 부려놓고, 모종을 심고, 볍씨를 심는다. 그리고 전시 기간 내내 물을 주고 돌보면서 볍씨를 키운다. 문제는 논밭이 아닌, 전시장에서 농사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는 점이다. 전시장 환경도 그렇지만, 전시 기간이 한정돼 있어서 제대로 된 생육을, 수확을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처럼 무모한 일을 하는가. 그것도 예술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는가. 예술은 노동이면서, 노동이 아니다. 최소한 단순한 노동과 다르다. 피에르 부르디외식으로 말하자면 상징적 행위이다. 부르디외는 예술을 상징 투쟁이라고 했고, 상징자본이라고 불렀다. 예술은 상징이다. 

질 들뢰즈식으로 말하자면 작가는 농사 흉내 내기를 통해, 유사 농사행위를 빌려 인간을 소외시키는 노동 현장을, 사람을 소외시키는 자본주의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에 자연에 순응하는 삶, 생명을 이롭게 하는 예술, 생태 지향적인 노동과 같은, 어쩌면 우리 모두 잊고 있었을 노동의, 예술의, 삶의 (그러므로 존재의) 본성을 주지시킨다. 

오브제, 사물의 운명. 사물은 전혀 다른 두 번의 삶을 산다. 기능과 용도를 매개로 인간에 복무하는 삶이 그중 하나라면, 기능과 용도를 다해 버려진, 폐기된 이후 또 다른 삶을 산다. 그중 사물의 입장에서 전자보다는 후자의 삶이 진정한 삶일 수 있다. 오롯한 자신만의 삶을 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제2의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발터 벤야민은 세상에 나오는 것과 함께 재빠르게 시간에 흡수되고 향수를 자아내는 오브제(그러므로 향수 오브제)로 탈바꿈하는 것이 모든 새로운 사물의 운명이라고 했다. 그렇게 버려진 사물에는 삶의 흔적이,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상처의 흔적을, 때로 위안을 주기도 했던 손길을, 눈길을 사물은 기억하고 있다. 이처럼 스스로 기억하는 사물, 의식하는 사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사물을 사물 인격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갓 버려진 사물은 어떻게 향수 오브제가 되고, 사물 인격체가 되는가. 예술적 상상력이 매개되어야 하고, 예술적 상상력을 매개로 사물은 비로소 오브제로, 사물 인격체로 거듭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초현실주의는 초현실을 열기 위해 오브제에 주목했고, 오브제를 매개로 현대미술에 또 다른 장을 열었다. 이런 초현실주의의 어휘를 빌려 말하자면 작가의 사물 설치작업은 발견 오브제라고 해도 좋다. 한갓 버려진 사물에서 잠재적인 가능성을, 심미적인 가능성을, 미학적인 가능성이라고 해도 좋을 또 다른 가능성의 지점을 발견했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작가 나름의 해석으로 사물이 거듭나게 했다는 점에서는 해석(된) 오브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미술사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작가의 사물 설치작업은 가난한 미술이라는 뜻의 아르테포베라와도 통한다. 가난해서 가난한 것이라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재료를, 사물을 재구성해 보여준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다. 있는 그대로의 재료가 일본의 현대미술에 해당하는 모노하(물파, 그러므로 물질파 혹은 물체 파)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재료를 제안하는 것인 만큼 그 과정에 작가의 개입이 최소한으로만 주어진다는 점에서 보면 미니멀리즘(도널드 저드의 최소한의 구조 개념으로 지지 되는)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여기에 마르셀 뒤샹이 처음으로 제안한 이후 후기구조주의에서 정론화된 맥락의 문제도 있다. 사물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사물의 본성이라기보다는 맥락의 문제다. 맥락이 달라지면 사물의 의미도 달라진다. 그런 만큼 의미는 맥락 결정적이다. 버려진 사물과 어떤 개념의 틀 안에 들어온 사물의 의미가 다르다는 말이다. 
그렇게 작가는 버려진 사물을 그러모아 재구성해 보여준다. 볏단을 쌓아 볏집을 만드는 유사 건축행위를 통해 농사로 대변되는 정직한 노동과 신성한 노동의 의미를 되새긴다. 버려진 나룻배를 소재로 한 설치작업에서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평생 바다에서 살다 죽은 이름 모를 어부의 삶의 서사를,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바다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한 어부의 아득한 전설을 들려준다. 더 일반적으로는 망망대해를 저 홀로 떠가는 일엽편주로 대변되는 고독한 존재를 침묵으로 증언하고 있기도 하다. 녹슨 채 버려진 기름통을 통해서는 사람들이 농촌을 버리고 떠나는 이농현상과 함께 공동체문화의 복원을 꿈꾼다. 불에 탄 집에서 구한 숯덩어리 나무를 얼기설기 덧대어 만든 설치작업에서는 숯처럼 새까맣게 탄 사람들의 속과 함께, 역설적으로 치유와 위로의 말을 건네는 한편, 재생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숯과 재는 재생을 상징한다). 
그렇게 작가는 오브제를 빌려, 사물 설치작업을 통해 진정한 노동(어쩌면 예술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창의적인 노동)의 의미를 되새기는 한편, 부대끼면서 고독한(군중 속에서 더 고독한) 우리 보통 사람들의 삶의 서사를, 그러므로 어쩌면 존재론적인 서사를 쓴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현대인은 온통 상실의 시대를 산다. 신을 상실하고, 형이상학을 상실하고, 중심을 상실하고, 자기를 상실하고, 정체성을 상실하고, 감정을 상실하고(감정 그러므로 속마음을 숨기는), 말을 상실하고(말을 섞지 않는 그러므로 할 말이 없는), 고향을 상실한 삶을 산다. 여기서 상실한 고향은 지정학적 장소와는 상관없는, 마음 둘 곳 하나 없이 공허한, 텅 빈, 허전한 사람들의 마음자리를 의미한다. 이처럼 지극한 상실감이야말로 그가 다름 아닌 현대인임을 증명하는 징후이며 증상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실을 사람들은 살고 있다. 경쟁사회가 낳은 현대인의 초상이라고 해야 할까. 미래가 없는 불안정한 세대의 시대 감정이라고 해야 할까. 노동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들의 삶의 풍속도라고 해도 좋다. 

그래도, 그래서, 다시,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너에겐 네가 돌아가 안식을 취할 집이 있는가. 너의 곤한 몸을 누일 마음자리가 있는가. 존재에게 집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가 그 사람의 평소 생각을, 인격을 결정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예술도 언어다. 예술을 빌려 언어의, 사상의, 이념의, 의미의, 서사의, 존재의 집을 짓고 건축하는 행위이다. 작가는 정직한 노동 그러므로 어쩌면 윤리적인 노동에 관심이 많고, 버려진 사물들이 간직하고 있는 삶의 기억을 발굴하는 것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그 노동이, 그 기억이 움트는, 숨을 쉬는 마음자리 그러므로 집에 관심이 많다. 그렇게 작가는 예술의 이름으로 집을 짓고(사물 설치작업), 그린다(평면작업). 

집을 소재로 한 작가의 평면작업은 버려진 알루미늄 캔을 재가공한 작업과 직접 집을 그려 넣은 작업으로 나뉜다. 엄밀하게 알루미늄 캔을 이용한 작업은 딱히 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집이라기보다는 또 다른 평면을 제안하는 작업에 가깝지만(주지하다시피 모더니즘 패러다임에서 회화는 궁극적인 평면으로 환원된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모더니즘의 형식논리에 대한 이해를 간직하고 있다), 집과 관련해서는 또 다른 벽을 세우는 일에 가깝지만, 크게 보면 집이라는 큰 개념에 아우러질 수 있고, 특히 집처럼 사각형의 변주가 그렇게 보게 만든다. 폐알루미늄 캔을 일일이 세척하고, 오리고, 자르고, 두드려 펴고, 굽히고, 붙여서 또 다른 질감과 색감의 평면을 만드는 노동집약적인(그러므로 어쩌면 농사처럼 정직한) 작업이다. 속을 뒤집어 보여주는 것인 만큼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질이, 그러므로 금속성의 발광하는 성질이 어쩌면 현대적인 감수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도 같다(참고로 현대건축의 외장재를 이처럼 금속성의 발광체로 마감한 경우가 많다). 여기에 소비지향적인 세태를 풍자하는 것과 함께, 사물의 재사용을 통해 죽은 사물에 또 다른 생명력을 불어넣는 작업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직접 집을 그려 넣은 작업을 보면, 한지를 여러 겹 붙여 만든 두툼한 평면 위에 바늘처럼 끝이 뾰족한 도구를 이용해 화면 전체를, 때로 일부분을 일일이 떼(떠) 내는, 역시 노동집약적인 작업이다. 보풀보풀한 보푸라기를 화면에 조성하는 것인데, 시각적인 차원을 넘어 촉각적인 질감을 조성하는, 그렇게 시각을 촉각으로 확장하는 공감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 위에 아크릴과 숯가루를 섞어 만든 안료로 집을 그려 넣는데, 집을 지탱하고 있는 최소한의 구조를, 집으로 축약된 기호를 그려 넣는다. 그렇게 옹기종기 모여있거나 빼곡한 집들 위로 허허로운 여백이 있다. 자세히 보면 보푸라기 사이로 흐릿한 선들이 지나가기도 하고, 지워진 듯(그러므로 잊힌 듯) 희미한 집들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아마도 삶의 질감을 상징할 것이다. 삶의 상처를 상징할 것이다. 희미한 옛 추억의 그림자를 표상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정직한 노동이 움트는, 죽은 사물이 새 생명을 얻는(그 자체 재생을 매개로 생과 사가 순환하는 존재의 알레고리라고 해도 좋을), 부드러운(그러므로 껴안는) 질감으로 위로하는, 상실한 몸이 쉼을 얻는 존재의 집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