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젤 쿡/ 자이더 에스벨
풍경, 추상적이고 감각적인, 서사적이고 주술적인
고충환 | 미술평론가
Sea Mirror. 바다 거울이다. 거울은 반영한다. 그렇다면 바다는 무엇을 반영하는가. 가없는 수평선을 바라보고 서 있을 때 바다는, 이제 막 시작될 폭풍우의 전조를 예감할 때 바다는, 아니면 무겁게 드리운 먹구름 사이로 희미한 햇살의 기미를 느낄 때 바다는 무엇을 반영하는가. 그저 외계를 반영하는가. 여기서 바다는 단순한 감각적 풍경을 넘어 내적 풍경을, 심상 풍경을, 기억 풍경을, 서사적인 풍경을, 실존적인 풍경과 같은 비 감각적인 풍경을, 기후 풍경을, 생태 풍경을, 경계 풍경을, 장소 특정적인 풍경을, 구상과 추상이 그 경계를 허무는 풍경을, 시간이 하나의 층위로 포개지는 풍경을, 그리고 여기에 파토스와 에토스, 현상과 해석이 하나의 유기적 전체를 일구는 총체적인 풍경을 반영한다.
모든 그림이 좀 그렇지만, 특히 작가 나이젤 쿡에게 그림은 풍경이다. 그리고 그 풍경은 단순한 감각적 풍경을 넘어 풍경과 작가가 상호간섭하고 상호작용하는, 서로 스미고 삼투되는 치열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풍경과 작가, 그림과 작가가 구분되지 않는, 그렇게 유기적인 전체를 일구는 풍경이다. 말년에 눈이 먼 모네가 수련 연작을 그릴 때, 눈을 대신한 감각으로 그린 현저하게 해체 지향적인 그림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알만한 형태가 해체되면서 오롯이 분위기가 강조되는, 모네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혹 그렸을지도 모를, 작가와 외계가 서로 스미고 삼투되는 바슐라르의 물질적 상상력 개념을 예시해주는 것도 같은, 그런, 그림을 보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유독 자신을 무작정 열어놓게 만드는, 스스로 무방비 상태로 내려놓게 만드는 풍경이 있다. 바다도 그렇다. 그렇게 작가는 아이슬란드의 폭포를 그리고, 스페인 포르멘테라 섬의 해변을 그렸다. 물가에서 직접 종이에 과슈로 그렸다. 모르긴 해도 물은 바닷물로 대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작가의 그림 어디에도 폭포도 없고 바다도 없다. 그저 우연하고 무분별한 붓질이 흐르는 물의 생리를, 종잡을 수 없는 사념의 생리를, 순간적인(어쩌면 변덕스러운) 감각의 생리를 떠올려줄 뿐. 그때 그곳에 자신이 폭포와 바다, 폭포의 순간과 바다의 순간에 더불어 동참(아니면 목격)하고 있었음을 증언해주는 흔적을, 격렬한 파토스를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을 뿐. 그러므로 굳이 폭포가 아니어도, 아니면 바다가 아니어도 무방할, 그러면서도 어떤 식으로든 폭포가, 바다가 매개되었을, 그렇게 폭포를 바다를 흔적으로서 간직하고 있는, 그런 그림이다.
후기 외광파인가. 주지하다시피 인상파 화가들은 빛을 그리기 위해 외계로 나갔다. 그러나 작가는 그저 빛을 그리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빛을 포함한 감각적인 무엇을, 감각적인 현상을, 총체적인 감각경험을 그리기 위해 외계로 나간 것이 다른 점이다. 다시, 알다시피 인상파 화가들은 자잘한 붓질을 중첩한 터치로 해체주의를 예고하고 있는데, 그런, 인상파와 해체주의, 그리고 여기에 감각주의가 작가의 회화를 열어놓고 결정짓는 지점이라고도 생각된다. 또 다른 점은 인상파의 터치가 우연하고 무분별한 선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느슨한(때로 격렬한), 열린 망 구조로 대체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볼 일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망 구조로 물려 있어서 그림 속 형태가(사실은 우연하고 무분별한 자국과 흔적이 만들어낸 유기적인 덩어리에 가까운) 인상파 그림에서 예고된 것과 같은 해체로 흐를 것 같지는 않다. 더욱이 그림은 감각적인 추상(추상표현주의의 변주?)으로 정의할 수 있음에도 일종의 유사 원근법이 적용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때로 부드럽게, 더러 격렬하게, 무겁게, 가볍게, 가라앉는 듯, 부유하듯, 빠른, 느린, 흐르는 것과 같은 다양한 붓질이, 색채가, 질감이 적절하게(차라리 감각적으로) 구사되고 조율됨으로써 마치 화면 속에 깊이와 울림을 내장하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즉자적 의미로 공기원근법의 감각적 변주가 꾀해지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작가는 다시, 외광파인가. 사실 작가가 그린 대부분의 캔버스 그림은 자연에서보다는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것이지만, 그 형식이며 분위기가 자연 속에서 그린 그림과 다르지는 않다. 자연과 더불어 종이에 과슈로 그린 그림이 좀 더 즉흥적이고 우연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는 선의 운용이 주가 되는 만큼 드로잉이 강하고, 따라서 드로잉 회화로 정의해도 좋을 것이다. 드로잉과 즉자적 의미에서의 공기원근법, 그리고 여기에 감각적 추상이 유기적인 전체를 일구는, 그렇게 어떤 알 수 없는 분위기로 사로잡는 그림, 일종의 종합이 꾀해지고 있는, 그래서 어쩌면 추상 이후를 예비하고 있는, 혹은 추상의 또 다른 용법을 제안하고 있는 그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artivism. 예술과 행동주의. 예술을 저항의 표상으로 보는, 계몽을 위한 상징적 제스처로 보는, 행동주의를 위한 실천 논리로 보는 태도를 대변한다. 그러므로 현실주의 이후 혹은 후기 현실주의의 연장선에 있는 아티비즘은 굳이 선입견이 아니더라도, 브라질 출신의 원주민 작가 자이더 에스벨의 태생적 배경이며 태도라고 해도 좋다. 비장하게 말하자면 운명이라고 해도 좋다.
작가에게 예술 행동주의는 식민제국주의에 의해 내몰린, 사실상 관광상품으로 특화된(구경거리의 사회?) 인디오 지역의 지역적 특수성과 민족적 정체성을 보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세계의 허파 중 하나인 아마존에 대한 자본의 착취와 더불어 원주민의 삶의 환경이 위협받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여기에 서구의 언어와는 다른, 지방어와 지역 언어로, 그러므로 원주민 고유의 언어로 말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고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하고 싶은 말이 많기에 서사적인 그림이 강하다. 그림이 글이고 글이 그림인, 글과 그림이 하나같이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의미소로서 기능하고 작동하는 서사적인 회화가 강하다. 그 자체 원주민 미술의 오랜 특징임을 생각하면, 하나의 화면 속에 그림과 문자가, 이미지 텍스트와 문자 텍스트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최근 양식이 어디서 왔는지 그 유래를 알겠다. 유래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아프리카 원주민 미술이 없었더라면 피카소도, 그리고 어쩌면 마티스도, 그러므로 어쩌면 현대미술도 없다고 증언하는 일부 미술사가들도 있다.
그리고 여기에 예술적 담론으로 치자면 서구인의 시각으로 원주민을 재단하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적 담론을 위한 유용한 텍스트가 되어준다고도 생각된다. 그 핵심이 지방어 혹은 지역 언어 그러므로 방언일 수 있는데, 내용으로 치자면 전설과 신화와 같은 전통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처음에는 입에서 입으로, 그리고 상형문자 그러므로 그림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문자 텍스트의 형태로 진화해온)을 취하고 있다.
그 형식을 보면, 짙은 검은색 바탕과 대비되는 강렬한 문양과 패턴이 두드러져 보인다. 여기서 검은색 바탕은 우주를 상징하고, 바탕에 대비되는, 공간 공포를 불러일으킬 만큼 화면을 빼곡하게 채워 그린, 마치 한 땀 한 땀 정교하게 수놓은 자수를 연상시키는 문양과 패턴을 통해 산 자와 죽은 자가, 신과 인간이, 사람과 영혼이, 사람과 동물이, 사람과 식물이, 사람과 자연이, 생물과 무생물이, 하늘과 땅이, 그리고 여기에 현대미술로 치자면 그림과 문자가, 구상적인 형태와 양식화된 기호가 그 경계를 허물어 하나로 연결된 사해동포주의를 표현했다. 존재와 비존재가 무차별적인 차원에서 등치되고 있다는 점에서 생태학에, 그리고 그 차원이 관계의 재설정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사회생태학에 연동되는 부분이 있다.
마쿠시족의 우주론적 관점에서 자연 속 생물과 무생물 간 관계를 조명한 회화라고 했다. 자연을 창조한 신으로 일컬어지는 마쿠나이마와 같은 신화적인 존재와 영혼을 묘사한, 그러므로 원주민의 세계관과 미학을 드러낸 그림이라고 했다. 문화적 상징을 넘어 정치적 은유로도 기능하는, 그런, 그림이라고도 했다. 문양과 패턴도 그렇지만, 칠흑 같은 밤하늘에 총총한 별이 보석처럼 아롱거리는 것이 세계 유수의 미술관과 함께 특히 보석으로 유명한 카르티에 현대미술재단에서도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이유를 알겠다. 그리고 서양미술과의 차별성으로 치자면 원근법이 없다. 우주와 우주가 토해놓은 존재를 양식화된 평면 위에 펼쳐놓은 만다라를 떠올려봐도 좋을 것이다. 몸에 그리는 문신, 돌에 그리는 암각화, 점토판에 새겨 그리는 저부조 형식의 평면 그림의 전통을, 서사적 기능과 주술적 기능(그러므로 살아있는 그림)이 합치된, 그런, 회화적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고 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