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창석 / 마치 향수와도 같은 자연, 자연의 원형적 이미지
고충환 | 미술평론가
자연을 보고 있으면 내 쪽에서 자연으로 건너가는 무언가가 있고, 자연에서 내 쪽으로 건너오는 무언가가 있다. 자연에 속한 무언가와 내게 속한 무언가가 서로 만나 하나가 된다. 교감이라고 부르는 것, 좀 더 물리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상호작용이라고 부르는 일이 일어난다. 내가 나를 잊고 자연을 잊는, 내가 자연이 되고 자연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는 일이 일어난다. 자연을 그린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그렇게 건너가고 건너오는 무엇을 그린다는 것, 교감을 그리고 상호작용을 그린다는 것, 자연에 혼연일체가 된 나를 그린다는 것, 그렇게 자연에 투사된 나를 그린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자연을 빌려 자신을 그린다는 것, 자연을 통해 본 자신을 그린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교감을, 상호작용을, 그리고 혼연일체를 메를로 퐁티는 우주적 살이라고 불렀다.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우주적 살로 채워져 있어서 주체와 객체를, 주체와 세계를, 주체와 자연을 분리할 수 없다. 그렇게 나는 자연에 속해 있고 자연은 나에게 속해 있다. 그러므로 내가 이미 자연이다. 그렇다면 다시, 자연을 그린다는 것은 이처럼 교감을, 상호작용을, 혼연일체를, 그러므로 이미 자연인 나를 그린다는 의미일 것인데, 그 자연은 어떻게 그림으로 그려질 수가 있는가. 자연을 소재로 한 작가의 그림은 바로 이 문제와 관련된다.
더욱이 자연을 상실한 시대에, 상실한 자연이 풍문으로 떠도는 시대에, 수사적 표현을 빌리자면 자연이(자연마저) 시끄러운 시대에 이런 번잡한 시대 감정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연 자체와 어떻게 교감하고, 상호작용하고, 혼연일체 할 것인가, 더욱이 그것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그러므로 다시, 자연을 소재로 한 작가의 그림은 바로 이 문제와 관련된다. 상실된 자연을, 상실한 자연감정을, 자연에 투사된 자기를 회복하고 복원하는 일과 관련이 깊다. 존 버거는 다르게 보는 방법을 제안하는 것에 예술의 존재 의미가 있다고 했다.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자연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것, 자연을 다시 보게 만드는 것, 자연 자체 그러므로 원초적 자연과 대면하는 일과 관련이 깊다.
그림보다 여백이 많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뭔가가 보이고 들릴 것도 같은. 대기가 머금은 습윤한 공기가, 물기가 손끝에 만져질 것도 같은.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세상이 안개 속에 잠겨있는 것 같은. 자연이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은. 어떤 알 수 없는 실체가 안개 속에서 드러나는 것 같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실체가 안개 속으로 숨어드는 것도 같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세상이 멈춘 것 같은. 고요한. 정적인. 평화로운. 명상적인. 내면적인. 관조적인. 암시적인. 살아있는. 가만히 움직이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햇빛이 나뭇잎을 희롱하는. 그렇게 희롱하면서 나뭇잎 위에,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에 비정형의 자잘한 빛 면을 만드는. 그 빛 조각을 손으로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그 빛 조각을 햇빛과 대비되면서 더 짙어진 그림자가 부드럽게 때로 도드라지게 만드는. 옹이에 웃자란 나뭇가지에 움이 트는. 시든 잎 같은. 오그라든 연잎 같은. 고즈넉한, 쓸쓸한, 외딴 섬 같은. 여백보다도 작은 섬 같은, 바위 같은.
자연을 소재로 한 작가의 그림은 사물 대상 자체보다도 사물과 사물 사이에, 사물과 여백(배경)의 관계에, 그 사이와 관계가 주는 어떤 울림(자연과 작가가 서로 공명하는 소리 그러므로 내적 울림이라고 해도 좋을)에, 자연성이라고 부를 만한 자연의 어떤 성정에, 자연이 불러일으키는 암시에, 분위기에, 그러므로 암시적인 분위기에 초점이 맞춰진 것 같다. 발터 벤야민은 분위기를 아우라라고 했다. 원래는 멀리 있는 것인데, 실제로는 마치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정이라고 했다. 원래는 중세 교회의 아이콘에서 가져온 말이지만, 동시에 현대미술에도 적용되는 말이다.
무슨 말인가. 처음부터 비가시적인, 비물질적인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있다. 신이 그렇고, 형이상학이 그렇고, 유령이 그렇고(아리스토텔레스), 시간이 그렇고, 바람이 그렇고, 공기가 그렇다. 그 자체로는 색깔도 형태도 없는 것들이지만, 다만 다른 사물 대상에 의탁해서 자기를 드러내는 것들이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것이, 예술은 암시의 기술일 수 있다. 예술은 이처럼 비가시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것들을 가시적인 층위로 끌어올리는 것,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고, 그 암시를 실현하는 감각적 도구가 분위기다.
그렇다면 작가는 분위기를 매개로 자연의 무엇(어떤 자연)을 암시하는가. 자연성이라고 부를 만한 자연의 어떤 성정 같은 것일 터이다. 개별 자연이 아니라, 자연의 총체, 자연 자체, 자연의 원형(융이라면, 원형적 이미지라고 했을)이라고 부를 만한 어떤 지경 같은 것일 터이다. 그러므로 원형적 자연 혹은 자연의 원형적 이미지에는 적어도 개별 자연을 통해서는, 자연의 감각적 층위를 통해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 개별 자연을 하나로 묶어주는 유기적인 흐름 같은 것, 유기적인 전체 같은 것일 수 있다. 자연이 떠올려주는 어떤 것, 아득하고, 아련하고, 막막하고, 열린, 때로 그립고, 때로 알 수 없고, 때로 먼, 그렇게 다만 마음속에 이는 파토스 그러므로 공명을 통해서만 거머쥘 수 있는 어떤 것, 그렇게 가닿는, 혹은 열리는 어떤 차원이며 경지일 수 있다. 자연을 소재로 한 작가의 그림이 그렇게 가닿는 어떤 차원을, 경지를 열어놓고 있다.
가을 문턱. 가지(나뭇가지). 새벽. 섬. 시든 잎. 여름의 기억. 포도. 한잔 술. 해변. 작가의 그림은 시 같고, 작가가 자신의 그림에 붙인 제목도 시 같다. 그 뒤에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생략된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함축적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이 촘촘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시의 구조는 느슨하다. 헐겁다. 여백이 많다. 시의 비어있는 공간, 이를테면 행간과 이면과 여백을 관객(독자)이 참여해 저마다의 의미로 채워 넣어 완성되는 구조라는 점에서 관객참여에 대해, 상호작용을 향해 열려있다. 그렇게 열린 구조가 롤랑 바르트의 작가적 텍스트(독자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저자가 되게 만드는 텍스트)에도 부합하는 면이 있다. 그러므로 시의 비어있는 공간은 실제로는 비어있는 공간이 아니다. 작가와 독자가 공동 저자가 돼 만드는 생성형 텍스트를 위한 공간이라고 해야 할까.
작가의 그림에도 여백이 많다고 했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에서 비어있는 공간(여백)은 실제로는 비어있는 공간(여백)이 아니다. 비가시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것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들, 말보다도 먼저, 이미 존재했었던 것들의 집이다. 말보다도 먼저, 이미 존재했었던 것들을 수면 위로 불러내고, 그림 위로 불러내는 것이 여백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림이 여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여백이 그림을 결정한다고 해도 좋다. 다시 그러므로, 그림은 어쩌면 여백의 기술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그 자체 작가가 일관되게 심화해오고 있는 여백에 능한, 생략에 능한, 함축에 능한, 암시에 능한, 분위기에 능한 수묵 선염법에도 부합하는 면이 있다. 그렇게 작가는 아득하고, 아련하고, 막막하고, 열린, 때로 그립고, 때로 알 수 없고, 때로 먼, 마치 향수와도 같은 자연을, 자연의 원형적 이미지를 그려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