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적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이선영(미술평론가)
강호성의 최근 작품에서 아이가 차지하던 침묵의 주인공은 로봇으로 바뀌었다. 이전 작품에서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지 못한 채 홀로 서 있던, 동물탈을 쓰거나 광대 복장을 한 아이들처럼 작품 속 로봇은 고요하고 시적인 분위기에 감겨있다. 원래 로봇은 뚜렷한 용도를 가지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장차 무엇이 될지 모를 아이같은 모습이다. 아이든 로봇이든 작품 속 주인공이 착용한 마스크나 코스튬은 변신의 도구로, 사회가 지정해 주는 하나의 모습으로 안착되지 않는다. 또는 못한다. 작가는 이전 작품에 등장하는 아이에 대해 ‘유년의 회고를 넘어, 세상과 관계를 맺기 전의 무명(無名)의 존재 상태를 환기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감정을 은유하거나 감추는 매개이며, 타자와의 관계에서 정체성이 구성되는 과정을 상징’한다. 가장(假將)한 아이들은 인간, 즉 통상적으로는 남자/어른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주체가 아직 되지 못하는 이들, 즉 주체가 아닌 타자들이다.

문턱 너머_116x80cm_비단에 채색_2025(이하 모든 사진 출처는 공주문화관광재단)
사회의 지배적 질서인 상징계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고, 이 세계에 진입하는 것은 어머니를 떠나 아버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이가 목표로 할 세계는 존재와의 전면적 관계를 가지는 구체적 자리가 아닌 추상적 공간이다. 사적영역이 아닌 공적영역에 속한 아버지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이 상징적 권력과 하나가 되어야 소위 말하는 ‘쓸모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주체라는 낯선 세계로 진입해야 하는 자아의 여정에는 불안과 우울이 스며있다. 작가 또한 이 과도기의 시공간에 오랫동안 머물러왔다. 공주 레지던시에서 올해 새로 그린 것은 어른/인간이 아닌 또다른 타자로서의 로봇이다. 등장인물의 표정과 자세의 표현에만 집중했던 이전과 달라진 점은 구체적 배경의 등장이다. 여전히 추상적이긴 하지만 인형탈이나 광대복장의 아이의 중성적 배경과 차이가 난다. 건축적 공간에 자리하는 인공 생산물의 출발점은 생명체보다는 투명하다. 그것은 생명에 내재한 불투명성이 일소된다.
작가는 이를 선이나 면 같은 추상적 도형의 조합으로 상징화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 로봇은 몸통 어딘가에 제조 번호를 새기고 있을 것이고, 생산자가 정해준 좌표적 공간 어딘가에 배치될 것이며, 고장이 나거나 기한이 지나면 용도 폐기될 것이다. 코드로 조합되어 제조되는 로봇과 마찬가지로 작품의 배경은 강철과 콘크리트, 그리고 유리로 만들어진 근대적 건축으로 추정되는 말끔한 공간 일부다. 통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개체가 처한 상황을 가감 없이 즉물적으로 비춘다. 로봇 외에 아무도 안보이는 공간은 명암을 구별하는 직선들로만 채워진다. 로봇은 부드럽게 굴려진 선이 있기는 하지만, 분절화된 구조라는 것은 동일하다. 나무에서 나뭇잎 닮은 곤충이 나오듯, 코드화된 환경에서 코드화된 개체가 나온다. 로봇은 아이 손에 들린 작은 장난감부터 라스베가스의 the sphere 같은 거대한 미디어 극장들을 꽉 채우는 Anyma까지 그 규모가 천차만별이지만, 강호성의 작품 속 로봇은 등신대로 추정된다.

나는 아직 드리운 그림자보다 느리다_116x80cm_비단에 채색_2025

나는 아직 여기에 있어_116x80cm_비단에 채색_2025
굳이 비교하지만 곧 일상적 노동 현장을 점령할 것이라 기대되는 인간형 로봇이다. 재현적 요소가 있는 그의 작품은 여전히 거울로서의 그림이라는 비유가 남아있는데, 공간을 여러 각도에서 가로지르는 선들은 거울에 난 금을 생각하게 한다. 비단에 여러 겹 칠하고 닦아내기를 반복하여 만든 미묘한 색감만이 쨍한 분열적 상황을 완화시킨다. 비단을 선택한 이유는 색을 잘 쓰고 싶어서다. 매끄럽고 빛을 반사하고 투과하는 투명한 느낌의 비단은 종이에 비해 견고하고 깊이감이 있다. 그는 ‘채색화의 여백, 단단한 색면, 빛과 음영의 대비를 차용하여, 극도로 절제된 구성안에서 정서적 파동을 전달하고자’했다. 반복을 거듭하는 화면 처리는 두텁지 않으며 비단의 짜임새가 드러난다. 때로 얼룩진 형상들이 남아 그가 중시하는 침묵 속 감성의 파장으로 출렁인다. 이러한 모든 섬세함으로 인해 그의 로봇은 일개 대상이나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초상처럼 다가온다.
원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20-30번 색을 올리고 닦고 하는 과정의 반복은 로봇이 지향하는 바의 기계적 효율성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러한 반복을 통해 코드화할 수 없는, 즉 이름붙일 수 없는 색이 나온다. 색은 이성이 아닌 감성의 영역이다. 로고센트리즘(Logocentrism)이라는 관념처럼 이성은 말과 동의어였다. 데리다는 지배적 질서의 주도권을 가지는 말대신 쓰기라는 대안을 제시했지만, 화가에게는 쓰기에 해당하는 것이 그리기다. 강호성은 말이 감성을 방해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말이 애초의 기원에서 멀어져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장 자크 루소는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운문과 노래와 말의 기원이 같음을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우물 주위에서 최초의 이야기는 노래였다. ‘주기적이고 규칙적인 리듬의 반복은 시를 낳았으며 악센트들의 선율적인 억양들은 혀의 도움을 빌려 노래를 낳았다. 최초의 역사, 연설, 법은 운문으로 되어 있었다. 정념은 이성에 앞서 말을 하게 했기 때문이다.’(루소)

멈춰서 바라보는 나의 길_80x116cm_비단에 채색_2025

메아리_80x116cm_비단에 채색_2025
하지만 언어 또한 모든 분화 과정이 그렇듯이 제한적 지시 기능으로 정련된다. 이른바 과학적 언어나 이를 모델로 한 논리실증주의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 논리의 정점에서 침묵을 택한 철학자도 있다. ‘그림은 평면이다’라는 모더니즘의 강령은 그러한 논리적 순화의 결과다. ‘감정과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리듬과 음이, 다시 말해서 선율이 더 필요하지만’(루소), 특히 공식적이며 합법적인 분야에서의 생기 없는 죽은 언어는 말을 위한 말로 고갈되었다. 자기동일성의 확인을 위한 말이 우리를 에워싼다. 시스템화된 현실을 다시 반복하는 것 외에 남은 것이 없는 빈약한 언어를 감성으로 풍부하게 만들어 진정한 소통이 되게 하는 것이 예술가의 꿈이자 과제이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메시지는 아이같은 순수함 뿐 아니라, 진정한 소통을 위해 언어의 기원으로 소급해야 함을 의미한다. ‘어른’의 말, 말을 위한 말, 자기지시적인 말은 공허하며 때로 공격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규칙에 복종할 것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억압적이다. 규칙은 법칙과도 달리 당시의 대세가 우연적으로 굳어진 것일 따름이다. 딱딱해진 구조는 유연한 생성을 필요로 한다. 인간 역사에는 패러다임이 극적으로 변화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강호성은 ‘나는 감정이 언어보다 먼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 믿음은 말하지 않는 형상과 말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이끌었다. 나는 회화를 감정의 재현 수단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회화는 감정이 떠돌다 머물 수 있는 심리적 장소이며, 존재가 한순간 선명해지는 감각의 장치’라고 생각한다. 본래 공간예술인 그림은 시간예술(소설, 영상 등)과 달리 말이 없지만, 오직 홀로 존재하는 인물을 통해 침묵을 강조하는 그의 작품은 다른 방식으로 말한다. 로봇이라는 정체성으로 심리적 상황이 연출가능한 것은 섬세한 기법에 힘입은 바 크다. 형태는 의미를 말하지만 색은 감성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빛은 켜져있고, 나는 꺼져 있어_116x80cm_비단에 채색_2025
의미는 의미로만 전해지지 않는다. 감성의 협조가 필요하며, 여기에 예술의 존재 의미가 있다. 강호성의 작품은 거울이 아니고선 부분 밖에 볼 수 없는 자아가 거울을 통해 전체상을 보게 되는 상상의 단계에 머물러있다. 상상은 자아의 분열적 현실을 봉합해 준다. 어릴 때부터 그림그리기를 즐겨한 그에게 상상의 세계는 친숙하지만, 사회는 끝없이 다그친다. 빨리 상상적 자아를 벗어나 상징적 주체가 되라고, 욕구나 요구의 세계를 벗어나 욕망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치고 나가라고. 오직 한 존재만 서 있는 그 공간은 상대할 대상이 없다는 것 자체로 텅 비었다는 느낌이다. 정작 로봇은 인간에 비해 빛에 대한 필요가 적다고 한다. 그래서 로봇이 중심이 된 생산공장은 밝지 않다. 기계의 작동을 알리는 on/off 스위치의 표시를 비롯해서, 공장의 밝음은 소수의 인간 관리자를 위한 것일 따름이다. 여러 각도로 들어오는 빛은 블라인드나 창틀같은 장치들을 통과하면서 화면의 기하학적 구성을 다변화한다.
그의 작품에서 색의 중요성을 생각할 때 빛은 일정 공간을 차지하는 색을 다채롭게 조율하는 요소다. 그 로봇은 어떤 기능을 위해 제조된 것일까. 맥락의 추상화로 인해 추정하기 힘들지만, 작가는 ‘인간의 공간에서 활동하기 위해 인간적 형태를 모사했다’고 말한다. 인간과 로봇의 결정적 차이는 인간은 불완전하게 태어나서 성장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 아닐까. 동물과 달리 보호받아야 하는 기간이 긴 것은 인간의 약점이자 장점이었다면, 성장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또한 마찬가지다. 데카르트같은 근대철학의 대변자에 의해 동물은 기계로 간주되었다. 더 급진적 일파는 ‘인간도 기계’(라 메트리)라고 선언했다. 인간의 성장에 따른 변화가 야기하는 불확실성은 커서 관점에 따라서는 비효율적으로 여겨진다. 거기에 기계와 다른 인생의 진면모가 있는데, 지배적 생산 시스템은 그러한 비효율성을 제거하려 할 것이다. 이미 완성체로 생산된 로봇은 작가와 같은 피터팬 컴플렉스 따위는 없다.

빛과 어둠의 층_116x80cm_비단에 채색_2025
게이비 우드의 [살아있는 인형]에 의하면, 로봇은 시간 감각이 없다. 그에 의하면 로봇에게는 데이터라든지 근육 기억, 반사 작용과 비슷한 어떤 것에 관한 다양한 종류의 기억이 있기는 하지만 자서전적 기억이라 할만한 것이 없어서 모든 것이 현재인 기이한 세상에 산다. 한편 현대인은 시스템에 과도하게 적응하는 과정에서 기계화 된다. ‘기계같은 사람’이라는 평가는 칭찬일까, 비난일까. 강호성이 중시하는 관계들 중 ‘기계로 이해되는 인간과 사람과 유사하게 만들어진 기계’(게이비 우드) 사이가 중요한 것이다. 트라우마나 콤플렉스 등 정신적 위기는 기억과 관련 된다. 아직까지는 기억이 없다고 믿어지는 로봇도 기술이 더욱 발달한다면 SF 영화의 인기 주제처럼 죽음을 의식하고 반항하는 인간적 특성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는 공장에서 생산기계라는 기능을 주로 맡아왔지만, AI의 발달로 교육이나 치료 등 심신의 영역까지 광범위하게 파고들 로봇의 기능은 인간과의 유사성을 더욱 필요로 한다. 무언극 같은 강호성의 작품 속 로봇은 인간적인 면이 있는 유사(類似) 인간이다.
빛을 향해있거나 빛에 의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모습은 지구의 절대적 에너지원인 빛에 대한 유기체의 본능적 끌림이나 고독이라는 인간적 감정도 떠올린다. 약간 고개를 숙인 자세는 생각하는 인간의 모습같고 어디론가 뚜벅뚜벅 가는 모습은 직립보행이 진화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알려준다. 앉아 있는 모습은 쉽게 지치는 인간의 모습이 중첩된다. 로봇의 성은 없지만, 그동안 강호성의 작품에 등장했던 인물이 피터팬 콤플렉스와 관련된 자화상이었다고 할 때 남성으로 보인다. 시뮬라크르일수록 실제를 더 흉내내려는 속성상, 성의 연출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그의 로봇은 그가 서 있는 텅빈 공간처럼 아무런 장식도 없다. 자본/노동이 여전히 대립하는 현대사회에서 로봇에 대한 시스템의 투자는 노동자의 저항 등 인간적 불확실성에 방해받지 않는 무한 생산력을 위한 것이다. 이전의 아이들처럼 여전히 어정쩡한 로봇은 사회의 지배적 질서의 문턱이 아직 높다는 것과 그 질서의 취약함을 동시에 말한다. 그것은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더욱 커지게 할 것이다.
출전; 공주문화관광재단, 공주문화예술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