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의 본질은 한때 모더니즘에서 강조되던 것처럼 단순히 평면성이나 형상성, 색채, 개념성 등의 어느 한 측면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동시에 겹쳐지는 형국 속에서 형성되는 특이점의 역사적 변환에 따라 규정 될 수 있을 뿐이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치면서 회화는 사실상 무력해졌다. 구상과 추상회화란 이미 과거의 것이 되었고 더 이상의 의미를 상실했다. 그러나 회화는 죽지 않고 매번 새롭게 출현해서 다시 살아날·죽어갈 기회를 엿본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회화의 번성을 새삼스레 목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회화가 볼 만한 것은 결코 아니다. 

현재 국내에서 유행하는 회화란 대부분 삽화적이거나 저급한 장식이 되어 타락하고 있다. 또는 동시대 서구회화를 부단히 모방하고 있기도 하다. 시장에서, 미술계에서 회화가 압도되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좋은 그림은 더 희박해졌다. 좋은 작가란 존재는 익숙한 장면에서, 누구나 다 보는 것이지만 동시에 누구도 잘 보지 못하는 것, 간과하고 거칠게 보아 넘긴 것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찬찬히 들여다보고 오로지 자신만이 기어이 보고 느낀 것을 그리는 이다. 그리는 방법 또한 색다르다. 그것은 사실 다소 막연하고 막막한 것이라 ‘그 무엇’이라고 밖에는 부르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그것을 정확히 무엇이라고 분명히 언어로, 문자로 말하거나 지시하기는 어렵다. 그저 특정 장소, 인물로부터 생겨난 막연하면서도 다소 선명한 느낌을 주는 것을 형상화하고자 할 뿐이다. 화가는 모호한 형상과 색채를 사용해 그것을 겨냥하면서 나가다가 멈춰 서기를 반복하면서 그림을 그릴 뿐이다. 그것이 계획한 대로 되는 것은 아니고 필연과 우연이 뒤섞이면서, 의도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교차하면서 나아간다.



문범, 〈Slow, same, #5001〉, 2003, 나무판넬에 오일스틱, 아크릴릭, 91×182×8cm


한편 보이는 세계를 공략하려는 것이 미술의 세계지만 본다는 것은 망막의 문제가 아니라 뇌의 문제이고 몸의 문제라는 사실은 결국 우리 몸이 미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것, 그리고 시각을 몸의 여러 감각기관과 결코 분리해서 논의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일깨워주었다고 본다. 이른바 단순히 시각적인 것을 떠나 통감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 동시대 미술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망막에만 사로잡히지 말고 감각의 지평을 넓히면서 시각과 청각, 후각과 미각, 통각 등이 두루 하나로 만나 세계와의 만남을 종합적으로 구현하려는 시도가 동시대 현대미술을 이룬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나를 둘러싼 다양한 사물, 공간을 채우고 있는 온갖 사물, 그리고 본래의 자연이 그렇게 맥락 없이 뒤섞여있는 것이 또한 세계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현재 자신의 몸에 와서 부딪치고 있는, 현존하고 있는 대상(오브제)이고 볼거리이자 생각거리를 안겨주는 그 무엇이다. 

화가란 존재는 무엇보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다시 보는 이이며 동시에 생각하는 이들이다. 매일 접하는 일상의 장면에 주목했는데 그 장면이란 자신을 홀리고 잡아당긴 것이다. 그 이유를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바르트식으로 말하자면 ‘푼크툼(Punctum)’일 것이다. 그냥 푹 찌르듯이 들어온 풍경이자 묘한 느낌과 복잡한 생각거리를 안겨주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우연과 우발성으로 마주한 세계/대상의 형상을 그린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파악할 수 없고 단지 알아볼 수 있을 뿐인 것, 말하지 않는 대신 기이한 에너지(氣)를 뿜어내는 덩어리로 다가온다.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감각 덩어리인 세계를 작가는 불투명한 질료의 연출과 흐리기, 해석을 거부하는 에너지의 흐름 등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세계는 인간 의식과 무관하게 이미 거기에 있다. 인간의 의미부여 이전에 자연이 물질로서 존재하며 세계는 우연의 산물이다. 우연성 안의 인간, 흔들리는 주체로서의 인간이다. 흔들리는 주체들의 모든 마주침은 우발적이다. 그리고 그 마주침이 응고되고 그렇게 해서 형상이 구성되면 그림이 가능해지고 이내 그것이 굳어지면 다시 우발적인 마주침을 기다려야 한다. 그 지난한 과정을 견디면서 나아가는 것이 회화/미술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