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과 평원, 사막을 가로지르는 흰색 열차. 작가는 열차를 붓으로 미국 대륙이라는 도화지에 드로잉을 펼치고 싶었다. 변화무쌍한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열차는 빠르게, 때로는 둔하게, 느리게 달렸고, 그 안에 탄 사람들은 여러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많은 사진이 남겨졌고, 흰색 열차는 비와 바람, 먼지에 점차 회색으로 변하며 멈춰섰다.
“유학시절, 미국을 여행하면서 서로 다른 나라처럼 느껴질 정도로 다양한 미국의 얼굴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또 동양인을 우습게 보는 문화에 대한 일종의 저항의식도 있었다.”, 전수천(1947-2018)은 일본과 미국에서 수학한 작가로서 미국에서의 위와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2005년 9월, “문명 간 화해와 대화 모색의 취지”로 미 대륙 횡단 프로젝트 〈움직이는 선 드로잉〉을 진행했다. 15량 440m의 흰색 천을 덮은 열차는 워싱턴D.C.-시카고-세인트루이스-가든시티-앨버커키-그랜드캐니언-로스앤젤레스, 5,500km를 미국의 서부 개척사와 같이 동에서 서로 달렸다. 이 여정에 미술가, 소설가, 영화감독, 건축가, 평론가 등 60여 명이 7박 8일간 함께 했다. 프로젝트는 9.11사태 등 외부 요인에 지연되다가 극적으로 정부와 기업의 후원을 받아 성사되었다. 당시 이 프로젝트에 대한 국내 언론 보도는 작가의 작품 설명 중 “열차가 만들어 내는 흰 선은 한민족을 상징”과 같은 일차원적 의미 수준에 집중되어, 그 의미가 사회적으로 크게 확장되지 못했다.

전수천, 〈움직이는 선 드로잉〉, 2005
퍼포머들이 모두 한번에 바닥에 엎드려진다. 마치 강한 충격을 받은 것처럼. 곧바로 이들은 마치 역재생되는 것처럼 엎드려진 움직임의 역순으로 일어선다. 한 퍼포머가 다시 넘어진다. 그를 따라서 몇 명이 몸을 아래로 숙인다. 그리고 서로의 몸을 의지해 다시 일어선다. 다른 한 퍼포머가 넘어졌던 퍼포머의 손목을 움켜쥔다. 그들의 뒤섞인 움직임은 타인을 향한 억압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이 내미는 온정의 손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Occupy: 우리는 연결되고, 점유한다》(전남도립미술관, 2025.6.10-9.3)에 출품된 아이작 총 와이(Isaac Chong Wai, 1990- )의 〈Falling Reversely〉(2021-24)를 보면 이처럼 불안과 연민의 양가적 감정이 일어난다. 작품은 팬데믹 기간 동안 유럽에서 이루어진 아시아인 대상의 혐오범죄를 모티브로 한다. 작가는 해당 범죄가 기록된 CCTV 영상을 연구하여 아시아계 무용수들과 함께 증오의 시간을 시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하면서 회복과 연대의 시간으로 바꾸어 냈다. 이 작품이 호소력을 지니는 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어도 우리 모두 비슷한 아픔과 치유의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작 총 와이, 〈Failling Reversely〉, 2021-2024
ⓒ Photo by Atsushi Kakefuda by Isaac Chong Wai
두 작품은 예술을 통해 형성된 상상의 공동체와 개인의 서사간 연결을 통해 그 의미를 가진다. 〈Falling Reversely〉는 관람객이 퍼포머에 감정을 이입해 신체의 감각으로서 작품과 상호작용하며, 그 감각을 통해 공동체를 인식하게 된다.〈움직이는 선 드로잉〉은 오늘날 문헌과 사진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지만, 동시대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당시 프로젝트 기획자의 “선생님은 커뮤니티의 장으로서 열차를 생각했다”와 같은 언술, 자료집의 “(열차에 탑승한 사람들은) 매일 작은 그룹으로 모여 예술에 대해 토의를 했다”는 기록을 통해 한시적이지만 특별한 경험을 공유한 예술 공동체의 존재를 상상하게 한다.
20년 전, 〈움직이는 선 드로잉〉을 마친 열차가 도착한 로스앤젤레스는 지난 달, 미국이민관세단속국(ICE)의 강경 단속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난 시위로 일주일간 야간통행금지조치가 있었다. 이번에는 누군가 서에서 동으로 향하는 여정을 담은 작품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