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술평론

  

이선영(미술평론가)

  


‘나의 미술평론’이라는 제목은 ‘나의-’라는 주어 때문에 부담이 없다. 가령 ‘미술평론이란 무엇인가?’같은 제목이라면 객관적이고 결정적인 대답을 내놓아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물론 객관적 진리를 위한 노력을 최대한 해야겠지만, ‘현장’과 관련되는 평론에서 경계는 불확실하다. 이것도 저것도 될 수 있는 경계 위의 담론에서는 맥락이 중요하며 이는 좀 더 유동적이다. 처음에 말랑했던 것도 단단해지고, 단단했던 것도 물렁해진다. 몇년전 한국미술사 담론에 관련된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신문이나 잡지의 평문들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음을 보았다. 인문학 서적으로는 역대급으로 흥행한 유홍준 선생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가 미술사라는 딱딱한 역사로 대중과 성공적으로 소통했던 예가 있다. 당시에 다들 그 책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서 저자의 수려한 문장이 아니었다면 황량한 바람만 불었을 옛 역사의 흔적과 기억들을 되집으러 떠나지 않았나. 그러한 열풍 속에서 몇몇 곳은 성지 순례에서 빠트릴 수 없는 핫플레이스가 됐는데, 이는 거의 저자의 힘이다. 


이후 세월이 흘러 독자의 반응을 보다 빠르게 감지할 수 있는 클릭수라는 지표도 생겼다. 나의 경우 그것은 최초의 미술 웹진인 [미술과 담론] 활동 이후, 유력한 미술포탈 싸이트인 달진닷컴에 무임승차하는 행운을 얻은 이후의 일이다. 웹싸이트에 정기적으로 평문을 올리는 일은 어딘가에 확실한 자리가 있지 않은 프리랜서로서, 스스로에게 부과한 의무인데 아직까지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 있는 편이다. 인터넷에도 ‘구독자’라는 표현이 있지만, 책을 사는 사람들보다 완독, 숙독, 열독에 대한 정도는 낮을 것이다. 나의 경우 내 돈 주고 산 책은 구매시의 기대와 달리, 재미가 없어도 시간이 허락하는 한 끝까지 읽는 편이나, 인터넷상의 텍스트는 가차없다. 그렇게 누군가의 고혈이 짜내져 써졌을 텍스트는 무심하게 스크롤 저편으로 밀려난다. 유명 작가들이 올린 SNS 상의 작품들 클릭수가 저조한 것을 보면, 이제는 지배적인 정보 창구가 된 인터넷과 미술이 결코 우호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현대미술은 단순히 시각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해독인데, 해독을 위한 대화의 기회가 부족한 것이다. 




ai_creator의 white cat 시리즈 중(유튜브 영상 갈무리)



물론 해독은 작가가 ‘창조’했다고 믿어지면서 텍스트의 핵심으로 간주되는 의도를 간파하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 순간순간 눈길을 붙잡는 자극적인 정보의 홍수 속에서 결국 미술평론은 소수자의 관심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러한 객관적 상황과 무관하게 나의 평론 방식은 애초에 주관적이었다. ‘나의 미술비평’은 학자보다는 작가와 유사하다. 내 성향에 현실과 직접적으로 닿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예술작품이나 책은 간접적이라는 점에서 좋다. 어딘가 푹 박혀서 해왔던 독서는 도피 행각의 일환이다. 손에 닿는대로 그때그때의 관심 따라 행해진 독서가 체계적일 수는 없다. 체계적이지는 않았어도 다방면이어서 글쓰기에는 실제적으로 도움을 받았다. 비평이 대화하려는 작품들 그자체가 다방면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평문은 나의 잡다한 관심, 독서가 수렴되는 최종적인 장이라는 점에서 작품과 유사하다. 평생의 도피 행각이었던 내맘대로 독서를 추동하는 것은 쓰기이다. 그것은 어떤 문제의식의 정교화, 지식과 정보의 창구가 되며 그다음의 읽기와 쓰기를 가능하게 한다. 


비평은 미학이나 미술사와도 달리 그자체로 자율적으로 서있을 수 없다. 작품이라는 세상에 없던 것이 나왔고, 난 그것을 때 처음 접하고 평문을 쓰는 것은 조금씩 진전되는 대화의 과정이자 산물이다. 나의 경험으로는 작품을 알고 쓰기 보다는 쓰고나서 아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필자에게는 집필 기회가 중요하다. 누군가는 투자에 대한 관심으로 점쟁이처럼 앞으로 어떤 미술이 각광받을 것인지도 묻는다. 몇마디로 요약될 수 있는 즉석평도 요구한다. 하지만 그 모두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대화가 아니다. 대화의 시점과 동인은 결국 완성된 텍스트다. 잡지든 자료집이든 도록이든 요즘 자주 체택되는 e-북이든 그러한 객관적인 틀이 없이 텍스트 쓰기라는 어려운 작업이 가능할까. 이런저런 책을 읽을 때의 즐거움과 짧은 시간 동안 어떤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치밀한 논구에는 차이가 있다. 난 중간 정도에서 타협한다. 정확한 결론(재현)은 미학자나 미술사가의 몫이라고 보며, 그러한 연구자들에게 다양한 아카이브를 제공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출전; 미술평단 2025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