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적 시공간의 기억

지훈 스타크 전 (3.12—4.5, 갤러리 지우헌) 


이선영(미술평론)


80년대에 12세에 미국으로 이주하여 건축을 전공하고 2012년부터는 작가로 활동해온 지훈 스타크(JEE HOON STARK)의 작품에는 건축적 요소가 많다. 건축 자체가 삶을 담고 종합하는 양식이어서 미술과의 길은 가깝다. 그의 그림은 물론 조각작품에서도 건축과 공유하는 구성/구축적 어법이 있다. 건축의 도면이나 옛 기와같은 건축적 요소들은 건축의 도면이나 원근법에 충실한 재현적 회화와 달리 균질적이지 않다. 기억의 심층부에 있던 것이 의식의 운동에 의해 표면에 부상한다. 흐릿하게 가라앉기도 한다.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지형이나 긁기로 숨겨진 기호를 드러내듯 표면화되는 것은 때에 따라 다르다. 나무나 판자같은 재료가 캔버스와 결합된 작품도 있다. 1970년대의 한옥에서 나온 부자재로 만든 조각은 그의 그림처럼 복합적이다. 이 재료 저 재료로 연결된 형태와 지워지거나 칠하다 만듯한 색이 특징이지만, 장승이나 토템처럼 굳건하다. 집은 상징적으로 자아의 연장이며 세계의 중심이다. 어린 시절의 이주를 통해 단절되었다면, 그것은 원형적 시공간으로 존재하게 된다. 




갤러리 지우헌 전시전경(이하 모든 사진의 출전은 지우헌)





그에게도 예술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여정이다. 건축가는 자기가 지을 건축을 채울 삶을 상상할 것인데 미술은 보다 더 순발력 있게 접근할 수 있다. 건축처럼 그림도 무엇인가 담을 수 있다. 함께 전시된 도예작품은 무엇인가 담기 위한 빈공간을 이미지로 가득 채웠다. 에스프레소 잔부터 트레이, 화병까지 그가 제작한 다양한 생활 도자기들은 이미지를 담고 있다. 요리를 잘했던 어머니와도 연관된 소재는 그릇, 장독대, 연탄 같은 것으로 1976년생의 작가가 보냈을 어린 시절을 공유하는 세대에는 친숙하다. 그 모든 것들은 어느날 다 사라졌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기능적이고 일상적인 것들은 심미적이고 특별한 것으로 남는다. 유난히 변화의 속도가 빠른 한국에서 얼마 전 현실이 역사로 남는 일은 흔하다. 그의 작품에서 불연속적인 여러 기표들로 온전한 서사가 아니어도 소통되는 이유다. 그가 특정 추억을 정확히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의 기표는 불완전하다. 글자가 나와도 문장으로 완성되는 법은 없고, 차원이 다른 것들이 화면에 공존한다. 고대나 아이의 그림처럼 원근법도 제각각이다. 


정확한 재현으로부터 벗어나 있지만 여전히 무엇인가를 말하는, 아니 더 잘 말하기 위해서 재현으로부터 벗어난다. 놀이나 요리처럼 취향에 따라 이것저것 섞는 방식이며, 즉흥적인 붓질, 분청기법처럼 칠하고 긁어내는 과정을 거친다. 물감은 기표들을 연결시켜준다. 연결은 단절을 전제한다. 그의 색은 구체적 지시대상과 연결점이 없는 추상이다. 추상은 함축적이어서 어떤 이에게는 완결된 구상적 이미지 보다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다. 도면을 그릴 때의 선이나 글자의 선, 사물의 특성을 담고 있는 외곽선들은 분절화를 통한 연결망을 이룬다. 작가의 오랜 해외 생활은 한글 또한 문자가 아닌 이미지나 건축처럼 활용하게 했다. 단편적 기호는 서로를 보충하면서 은유한다. 그것은 기억의 과정과도 같다. 시간의 축을 따르는 기억은 정확히 재현될 수 없다. 빈칸이 더 많으며 그곳에서 의미가 생성된다. 한옥을 개조한 전시장의 한 평 크기의 방 하나에 붙여놓은 드로잉은 그림보다 더 자유롭다. 







시적인 제목은 더 큰 작품으로 자라날 수 있는 씨앗같은 이미지와 한글 문자들은 물론, 그림과 그림 사이에도 도약과 비약이 빈번하다. 감각 간에도 보충이 이루어진다. 곰탕, 갈비찜, 백숙, 밤고구마 같은 메뉴, 때로는 레시피까지 화면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작가에게는 옛 음식에 대한 강한 취향이 있다. 기억과 연상은 꼬리를 물어서 단어-형태-색감이 줄줄이 연결된다. 가령 떡볶이가 등장하는 화면에서 붉은색이 지배적이다. 후각은 시각보다 더 기억에 민감하다. 시각보다 더 원초적이기 때문이다. 건축가는 대부분 남성들이었지만, 집은 모성적 공간이다. 모성적 공간의 중심은 부엌이다. 그곳은 삶의 온기를 위해 불씨가 보존돼야 하는 자리다. 이번 전시의 부제 《LUMI KUKE: 부엌에서 짓는 사한》에서 'LUMI KUKE'는 하와이어로 '부엌'을, 사한은 네가지 한(韓)인 한국, 한옥, 한식, 한글과 관련된다. 모든 것을 주는 어머니, 그녀의 무상의 선물인 밥상은 기억의 핵심이다. 아궁이와 장독대 같은 요소는 집, 어머니, 음식이라는 코드가 중첩된다. 음식 만드는 소리와 냄새는 그 맛과 더불어 유년의 기억 깊숙이 새겨지며 다차원적으로 증식하는 상상의 원천이다. 


출전; 아트인 컬처 2025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