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그림의 지층

 

이선영(미술평론가)



아직도 미술은 ‘무엇을 그렸느냐’ ‘어떤 내용이냐’라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러한 질문에서 대개 ‘무엇’과 ‘내용’은 연결된다. 하지만 ‘무엇’과 ‘내용’은 없을 수도 있고, 보다 단호하게 ‘있어서는 안된다’라는 답도 있지만, 이에 대해 제대로 논리를 갖추어 말하기 쉽지는 않다. 현대미술사를 추동한다고 생각되는 논리를 반복한다 해도 나의 경우는 왜 이러한가에 대한 더 중요한 근거가 요구된다. 예술은 자유로워야 한다면서도 확립된 이론의 재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럴 때는 세련되게 후기 구조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작가의 죽음’을 말하면 되는가? 김근태의 [담론 Discussion] 연작은 그 제목부터가 지시대상으로 작품 내용을 갈음하는, 아직도 남아있는 관례에 대한 고심이 담겨있다. 1988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1997년 사비나 갤러리에서 [Discussion Or Encounter] 전 이후,  ‘Discussion’이라는 부제를 택한 전시는 2000년대 들어서 계속되었으며, 2023년까지도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에게 매우 중요하다. 리안 갤러리 서울에서 열린 최근 개인전에도 [담론 Discussion] 연작이 집중 전시됐다. 




Discussion 2024-10, 2024, Oil on canvas, 162 x 130 cm(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리안갤러리 서울)



전시된 작품은 오래된 도자기같은 전체적인 색조와 명암이 있을 뿐, 색/선은 불확정적이다. 재현의 노동으로부터 벗어난 조형적 언어는 무수한 반복과 차이의 계열로 제시된다. 그의 작품은 여러 층으로 되어 있어 밑층이 여러 방식으로 드러난다. 작품마다 밑층이 다를 것이며, 밑층이 같아도 그것이 드러나는 위치와 정도는 다르다. 가령 백자의 기본색으로 평행으로 그어진 선이자 면 사이들로 검정 바탕이 조금씩 비친다. 작품마다 검은색의 분포는 다르다. 블랙이나 화이트 계열로 화면 전체(all over)를 꾸덕하게 바른 작품들은 부조같다. 여러 굴곡면을 지닌 어둠은 빛을 받아들여 움직임의 환영을 보여주거나, 또는 도자기의 원료가 되는 흙을 꾹꾹 누른 듯한 질감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이 어떻게 빗어질지는 모르는 상태, 요컨대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관계처럼, 무엇으로든 현실화될 수 있는 잠재태를 강조한다. 황토색 계열의 작품은 아예 흙같은 느낌이다. 흙이야말로 원시 생명부터 명품 도자기까지 출발이 될 수 있다. 한 작품에서 주조색이었던 것이 다른 작품에서는 심층에서 드러나는 색이 된다. 


무엇이 표면이 될지 무엇이 심층이 될지는 가변적이라는 점에서 움직이는 지층과도 같다. 그의 작품은 표면과 드러난 면의 색이 많지 않아 단색화같은 느낌이다. 화면 위에 적극적으로 여러 색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는 길에 문득, 또는 화면 가장자리에 슬쩍 다른 층/색이 비치는 식이다. 작품이 크면 선/면도 많아지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간격은 마치 심호흡같이 분절된다. 속도감 있게 그은 선/면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계열이 주름진 채 나타난다. 뭔가 지운 것같은 흔적은 비우기를 중시하는 작가의 태도가 반영된 것이다. [담론 Discussion] 연작과 비슷한 계열이지만 ‘Nirvana’(2022, 리안 갤러리 대구)라는 부제도 사용한 것으로 봐서 김근태에게 담론은 선(禪)에 가깝다. 백자에 대한 공감이나 비움과 채움, 그리기와 지우기를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하는 작업에 대한 수행적 태도가 그러하다. 형상에 대한 자제에도 불구하고 화면에 선명하게 남겨진 것은 시간의 축에 따르는 몸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그의 ‘담론’은 관념적이지 않다. 




Discussion 2024-35, 2024, Oil on canvas, 117 x 91 cm



[담론 Discussion] 연작 앞의 관객은 작가가 특별히 선택한 키워드인 ‘담론’에 주목하게 된다. 담론은 현대 문화비평의 키워드 중의 하나이다. 미셀 푸코는 [담론의 질서]에서 19세기에 인문학이 탄생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것은 훈육과 규율화라고 말한다. 푸코가 따로 언급은 안했지만 예술 또한 인문학처럼 19세기의 산물이다. 푸코의 주장은 예술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술 또한 ‘앎과 권력의 몇몇 중요한 전략에 따라 서로 연관되는 거창한 표면 조직망’으로, ‘진실은 하나의 진술이 만들어지고, 분배되고, 통용되고, 작용하도록 만드는 질서화 된 절차의 체계로, 진실은 권력관계와 순환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각각의 사회는 진실의 일반 정치학이라고 부를 만한 독특한 진실의 체계’(미셀 푸코)가 있다. 담론은 객관적 진리에 대한 중립적 서술이 아니라 권력의 결과이고 원인이며, 그 권력은 어디서나 발생하는 편재한다는 것이다. 푸코의 이론에서 담론과 권력의 관계는 억압과 해방의 차원에서 주로 논의되었지만, 철학자 이정우가 해석하듯 보다 포괄적인 ‘에너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정우는 [담론의 질서] 해설에서 현대물리학에서는 물체가 에너지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물체란 물질-에너지의 농밀한 응집이라고 말한다. ‘푸코에게 권력이란 분산되는 힘들의 체계이다...권력이란 전략이요, 관계요 기능이다. 권력의 존재론적 지위는 넓은 의미의 사물이 아니라, 사물들을 서로 관계 맺게 하는 어떤 힘의 기능’(이정우)이다. 김근태 또한 ‘작품을 마주했을 때 보는 화면에서 직관적으로 무엇인가를 느끼겠지만 결국 이를 보게 만드는 힘, 볼 수 있는 창구는 무엇인지 고민한다.’고 말한 바 있다. 현대미술은 단순히 시각성에 한정되지 않는다. 미술을 순수 시각성에 한정시킨 것은 모더니즘의 미학적 이데올로기다. 김근태는 ‘1993년 렘브란트의 그림 앞에서 받은 충격의 경험을 서구 모더니즘에 바쳤던 20년 작가 인생의 붕괴였다’고 회고한다. 시간성과 몸에 대한 의식, 담론으로서의 미술 등에 대한 그의 사유는 순수 추상화라는 모더니즘적 결론과 거리를 둔다. 오래된 그릇이나 벽같은 작품 표면은 탈모더니즘적이다. 



Discussion 2024-42, 2024, Oil on canvas, 162 x 130 cm



크레이그 오웬스는 [알레고리를 창출하려는 충동: Toward a Postmodernism]에서 ‘알레고리는 불완전한 것, 단편적인 것, 미완성의 것과 관계를 맺는데 이는 유적에서 가장 포괄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한다. 김근태의 작품은 유적에 담긴 알레고리적 분위기를 가지는데, 이는 예술보다는 사물을 닮으려는 형식과도 관련된다. 백자에 심취된 작가는 돌덩어리를 가루로 내어 물감과 함께 화면을 바른다. 물질은 에너지가 되고 그 반대도 참이다. 그의 ‘담론’은 에너지의 분배와 관련된 의미이지, 내용이나 서사가 아니다. 추상미술의 논리적 근거를 대준 그린버그가 미술의 순수성과 경쟁력을 위해 몰아내고자 했던 것이 바로 서사 아닌가. 담론과 서사가 같은 것은 아니다. 서사는 담론에 비해 좀 더 결정적이다. 논리적 인과관계가 촘촘한 문장의 전형은 법조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얼마나 구멍이 많은가. 추상이라면 무엇으로부터의 추상인가에 대한 근거가 필요하며 결국은 작가가 조성한 맥락만 남는다. 현대의 작가는 이 맥락을 얼마나 그럴듯하게 구축하는가에 작품의 설득력과 공감도가 결정된다. 그래서 작가는 작업에 모든 것을 털어 넣을 필요가 있다. 


김근태가 사랑했던 렘브란트나 백자처럼 밀도를 지향한다. 작가는 백자에 대해 ‘눈으로 보는 것, 귀로 듣는 것, 그 배후 이성적으로 알 수 없음의 밑바닥에 있는 것을 백자는 표현한다.’고 말한다. 군더더기 없는 백자의 소박함과 색감의 선택으로 이어진다. 무엇인가 충만하게 담기 위해 스스로를 비우는 태도 또한 그러하다. 뭔가 그렸다기 보다는 지운듯한 흔적들은 지우기가 그리기인 역설이다. 그는 ‘경주 남산의 탑들과 도자기를 관찰한 후, 석분과 접착제를 물감과 혼합하여 분청사기의 질감을 구현하는 지금의 기술적 방법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2025년 리안 갤러리 서울에서 열린 개인전에 그림 앞에 설치된 것들은 작가가 실제로 사용하는 석분의 원재료인 암벽의 돌덩이들이다. 연금술같은 과정은 그 인과관계를 추적하기 힘들게 하지만 결국은 재료와 결과물이 함께하는 셈이다. 전시실 한쪽에 질서 있게 배열된 돌덩이는 자연의 결정체로 제시되며 예술작품 또한 그같은 존재를 닮고자 한다. 재현으로부터 멀어진 현대미술은 대상과 의미를 삭제한 후 어떤 실재감을 가질 수 있을지 고민해왔다. 



Discussion 2024-46, 2024, Oil on canvas, 162 x 130 cm



자연과 같은 실재감은 재현이 아닌 제시로 이루어지며, 자연에 상응하거나 평행하는 우주이다. 실재라는 돌덩이를 떼어버린 가벼운 기표들이 표면으로 떠오른다. 시뮬라크르의 시대에 겹겹의 층으로 물감이 많이 덮여있는 그의 작품에는 자연과 같이 묵직하다. 실재는 불가능할지라도 지향점은 된다. 예술은 자연과 더불어 실재가 복귀 기회를 노리는 영역이다. 일단 그가 작품을 시작했을 정제된 캔버스는 그자체가 엄청난 현대미술의 담론이 쌓여있다. 캔버스는 결코 중성적 바탕이 아니다. 그는 물감 아끼지 않고 두텁게 바른다. 행위에 의해 살짝 드러나는 밑층의 색도 중요하다 보니 여러 겹이다. 물질적 밀도가 높을수록 행위에 따른 우연적 효과는 높아진다. 덮임과 드러남, 흘러내림, 균열 등 작가가 예측가능한 부분을 넘어선다. 그의 작품은 우연과 필연의 밀고 당김이 벌어지는 실험과 유희의 장이다. 두텁게 바른 물감의 결을 만들어내는 것은 작가의 행위다. 살아가면서 허공을 갈랐을 그 수많은 몸짓을 받아내 기념비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작품이다. 그러한 특별한 장의 주인공을 우리는 작가라고 부른다.   


출전; 퍼블릭아트 2025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