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예술의 공통 분모에 다가가기

이강욱 전 (3.8—7.31, PLACE C)

장승택 전 (4.15—5.17, 학고재)


이선영(미술평론가)

  


자연과 예술은 알면 알수록 하면 할수록 미지의 영역과 과제가 더욱 커진다는 역설이 있다. 이강욱과 장승택 전은 그러한 자연의 신비를 조형 언어로 번역한다. 헐벗은 기능주의가 도구화하는 자연은 아직도 신비의 베일에 싸여있다. 작가에게 직관된 자연은 많은 실험 끝에 만들어진 순차적 방법론을 거쳐 느릿하지만 치밀하게 현실화된다. 그들의 작품은 일급 요리사가 한 덩어리의 밀가루로 수많은 겹을 가진 파이나 가느다란 면발을 뽑아낸 것같은 느낌이다. 우주의 궤도나 생명의 비밀이 담긴 DNA의 선을 떠올리는 이강욱의 [Invisible Space] 시리즈, 그리고 색 면의 겹침이 만들어낸 무수한 선이 풍경이 되는 장승택의 [겹회화]가 그러하다. 그들의 작품은 실처럼 가는 선들의 배치가 작품의 동일성과 차이를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겹과 결을 표현하기 위해 얇은 표면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작업하기에 물감도 많이 들지는 않는다. 반투명하고 날렵한 작품은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자연의 과정을 반복한다. 이강욱의 [Gesture] 시리즈나 색면의 겹침으로 선이 생성되는 장승택의 작품은 모두 시간적 차이를 강조한다. 자연 자체가 거대한 시간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고, 정지된 형식인 회화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잠재적인 운동감을 부여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창조라고 불리워지기도 했던 예술은 자연의 경이로움을 표현하는 유력한 언어이다. 과학과 예술, 종교 등은 자연을 매개로 가까이 근접한다. 


이강욱은 작업 초창기부터 과학이 새롭게 연 자연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장승택의 작품은 극지방의 창공의 오로라 같이 신비롭게 하늘거린다. 그들의 작품이 표현하는 범위는 일상이 아니라, 극히 미소하거나 극히 거대한 공간이며 이 양극단은 그들의 구사하는 어법인 겹과 결의 방식에 따라 중첩된다. 다른 차원을 교차하는 것은 고대로부터 유래된 상상이지만, 육안으로 불가능했던 시야가 과학기술에 의해 열리면서 더 확장되었다. 어떠한 차원이든 작품에 접어 넣은 것이 많을수록 펼쳐질 것도 많아진다. 추함과 충격 그자체가 목표인 현대미술도 많지만, 이들의 작품은 긍정적 가치인 미를 향한다. 아름다운 예술은 장식성도 포함한다. 작은 구슬이 도포된 이강욱의 작품이나 잘 염색된 천을 여러 겹 드리운 듯한 장승택의 작품이 그러하다. 예술보다 장식이 더 오랜 유래를 가지며, 이때 근대에 확립된 ‘순수예술’의 경계는 곧잘 무너진다. 전시부제인 ‘1mm 경계’(이강욱)나 ‘겹회화’(장승택)는 근대시대 순수예술이 정립되면서 타자화되었던 것들을 품는다. 순수하게 되기 위해 모든 것은 순간 멈춤이 되어야 했는데, 이들의 작품에는 시간이 적극 개입된다. 전시장은 빛과 색의 향연이다. 색이 공기를 품으면 빛이 나며 빛이 공간화되면 색이 두드러진다. 이강욱에게는 화이트가, 장승택에게는 블루가 중요하다. 모두 추상화이기에 빛과 색은 화면에 편재하며, 빛과 색은 역동적으로 호환된다. 

 


빛과 색의 역동적 호환성



PLACE C 전시전경(사진 출전은 미술관에 있음)



이강욱 Another world-The Body1 (91 x117cm)



이강욱



2000년대 초반의 작업부터 최근 작업까지 두루 나온 거의 회고전 급의 작품은 크게 다섯 시리즈로 나뉜다. 140여 점의 작품들은 여러 구획으로 나눌 수 있는 큰 전시 공간에 힘입어  시리즈별로 나뉘어 배치되었다. ‘geometric’, ‘gesture’, ‘white gesture’, ‘Invisible Space’, ‘Invisible Space-Image’ 등의 시리즈는 사반세기에 이르는 작품 변화를 보여준다. 1976년 생인 이강욱의 초창기 작업인 ‘Invisible Space’ 시리즈는 현미경으로 세포를 들여다 모든 듯한 유동적 선이 특징이다. 전시장에는 현미경도 구비 해 놓았고 그 앞에는 동영상을 볼 수 있는 대형 모니터가 배치되어 소우주와 대우주를 교차하는 이강욱의 탐구적 방식을 반영한다. 출렁이는 선은 관객의 시선을 안으로 끌어들이며 마치 프랙털 도형처럼 증식한다. 섬세한 드로잉에 비즈(beads)가 뿌린 은은한 작품은 빛이나 물을 머금어야 살 수 있는 유기체와 닮음 꼴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유기체적이라고 해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유기적인 것은 아니다. 작품은 크든 작든 자체의 질서를 가지고 있고 양자는 상응 관계를 가질 따름이다. 다른 시리즈에서 가로 20미터의 대작과 작은 작품이 비슷한 이미지로 반복된다. 그는 ‘white gesture’ 시리즈에서 작은 화면 140여개를 미니멀한 방식, 즉 유기적 관계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걸어 놓았다. 기계적으로 배치된 작은 작품들은 전체의 부분이 아니라 각각이 전체이다. 소우주는 대우주와 닮았으며 서로를 비추는 이러한 유사(類似) 관계는 끝없이 펼쳐진다. ‘gesture’ 시리즈는 알갱이 형상이 화면을 도포한다. 움직이지 않는 매체인 회화에 크기와 밀도의 차이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울렁거리는 듯 연출한다. 


이 시리즈는 여러 도구를 동원한 행위뿐 아니라 캔버스 앞에 선 작가의 호흡을 담은 흔적이다. 이번 전시에 처음 공개되는 ‘white gesture’ 시리즈는 빛의 상징이기도 한 화이트를 층층이 쌓아 만든 공간이다. 일상적 체험에서 빛은 형태를 이루는 선을 왜곡하곤 한다. 같은 크기의 캔버스가 다양한 색면이 동원되어 빛은 곧 색임을 말한다. ‘Invisible Space-Image’ 시리즈는 씨앗이나 작은 열매, 이파리가 연상되는 작은 형태들이 조밀하게 집합된 구조이다. 같은 형태의 단위가 여러 방식으로 반복됨으로서 세포나 입자처럼 종횡무진 증식하는 듯이 보인다. 철학적으로는 ‘모나드’(라이프니츠)가 연상된다. 계절의 여왕 5월이 그대로 실내로 쏟아져 들어오는 통창을 가진 전시장은 바람에 나부끼는 신록 이파리의 움직임을 그의 작품과 비교하게 한다. ‘geometric’ 시리즈는 20대의 청년 작가 이강욱을 화단에 알린 시작에 해당된다. 첫개인전이 열렸던 2000년대 초반 그의 관심은 기하학적 엄밀성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한다. 다양한 크기의 원은 별이나 궤도를 떠올리며 마치 거품처럼 부글거리며 증식한다. 그에게 점, 선, 면이라는 조형적 언어의 기본은 우주적 질서에도 적용된다. 이강욱에게 다양한 차원의 조화로운 연결망에 대한 사유는 우파니샤드부터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 니콜라우스 쿠자누스까지 이른다. 다른 시리즈보다 추상적 원근감이 더 확실한 ‘geometric’ 시리즈는 이미지를 확대해서 봐도 비슷한 강도와 밀도의 형상들이 계속 나타난다. 유한한 화면에 무한을 접어 넣는 방식은 우주여행처럼 계속 나아간다. 작품이라는 대안의 세계를 창조하는데 몰입한 만큼 미시적이자 거시적인 풍경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 

 




 장승택, Layered Painting 150-28_2024_Acrylic on canvas_220x170cm(사진 출전은 학고재)



 장승택, Layered Painting 80-20_2023_Acrylic on canvas_145x112cm



 장승택, Layered Painting 40-22_2024_Acrylic on canvas_100x80cm



장승택의 [겹회화] 전에는 ‘거의 푸르른(Layered Painting : Almost Blue)’이라는 부제가 또 붙는다. 색면의 중첩으로 겹이 만들어지는 화면의 주요 색을 블루지만, 실제로는 여러 색이 깔려있다. 이번 전시와 가까운 개인전인 《겹회화》(2021), 《레이어 컬러스 페인팅》(2019), 《色들》(2016), 《線들》(2012) 등은 작가가 겹과 색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왔음을 말한다. 그의 작품은 《단색화의 태도들: 완료에 정주하지 않는》(2024), 《한국의 후기 단색화》(2018), 《한국의 단색화》(2012) 등, 단색화라는 맥락에서 조명되기도 했다. 작가가 만들어 놓은 형식적 장치에 의해 블루를 포함한 여러 색면들은 화면 위에서 직접 섞여 관객의 눈에 도달한다. 겹이 어떤 형태로 환원되지 않듯 색 또한 그러하다. 작가에게 블루는 여러 색 중의 하나가 아니라 환원될 수 없는, 또는 종합적인 색을 대변한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파랑은 하늘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영원한 색으로 해석한다. 저자는 ‘지속되기를 바라는 모든 것,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모든 것’에 파랑을 결부시킨다. 하지만 장승택의 ‘거의 푸르른’은 영원을 고정시키지 않는다. 이상은 무한히 다가가기 위한 참조점일 따름이다. 다른 여러 색들과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는 수많은 블루는 하늘빛처럼 다양하다. 그의 작품은 추상이어서 공기원근법의 대가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의 블루 또한 공기를 품고 있다. 색채학자들에 의하면 물과 공기는 실제로 파란색이 아니지만 파랑으로 느껴진다. 여러 다른 색면들도 겹쳐서 만든 깊이가 다양한 뉘앙스의 블루에 가까워지는 것은 그의 작품이 추상이어도 자연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말한다. 


장승택의 작업 과정은 ‘대형 붓을 사용해 아크릴 물감과 특수 미디엄을 혼합한 안료를 얇게 칠하고, 이를 수십 번 반복하면서 화면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층층이 쌓아 올린 색들은 해체주의의 중요 개념처럼 ‘말소하에’ 둔 흔적으로 남아 또 다른 흔적들과 함께 차이를 만든다. 그가 회면에 쌓은 색면들은 반투명해서 붓의 흔적이 남고, 그 흔적들이 중첩된 화면은 수많은 수직의 선으로 흐른다. 마치 미세한 섬유질같은 선들은 겹쳐서 걸려있는 반투명 천들처럼 사이들에 공기를 품는다. 그것은 호흡을 가다듬고 한번에 훅 가야하는 작업 과정과도 연결될 것이다. 옷깃을 스치는 미풍에도 반응할 섬세함이 있지만, 시원하게 흘러내리는 팽팽한 선들은 그 또한 중력에 반응하는 실체임을 말한다. 작가는 ‘어둠이 내리면 색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라고 묻는다. 두려움과 신비로움이 담긴 이 질문은 빛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요구를 반영한다. 우리는 매일 동이 트기 직전의 새벽녘 하늘의 짙푸름이 지상의 모든 것들을 그림자로 만든다는 사실을 관찰한다. 지상의 잡다한 형과 색은 짙푸른 하늘 아래의 어두운 실루엣으로 사라지는 점은 현실에서도 블루가 강력함을 암시한다. 동이 트고 지는 거대한 캔버스인 하늘은 시시각각 변화한다. 작가는 그에 해당되는 시간적 감각을 화폭에 담고자 한다. 자신의 작업을 ‘삶에 대한 생각과 태도의 변화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블루로 상징되는 영원함은 고정된 중심이 아닌 영원한 변화를 말한다. 전시된 20여 점의 작품들은 비슷한 시각상을 가지지만, 그것은 기계적 반복이 아닌 푸른 지구별이 지속될 때까지 ‘영원히 회귀하는’(니이체) 반복이다. 


출전; 아트인컬처 2025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