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DAC대구문화예술회관에서 뜻깊은 전시회가 열렸다. 《2025 격물개신(格物開新): 도전의 시작, 대구현대미술》(6.4-6.15)이 그것이다. 석재서병오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이 행사는 6전시실에서 열린《한국실험미술과 김기동》전을 비롯하여 7전시실 《60-70년대 대구 현대미술 아카이브전》, 8전시실 《35/128 작가전》, 9전시실 《展開전개 그룹작가전》, 10전시실 《대구현대미술가협회 협회-아트마켓》전까지 5개의 전시로 구성되었다.


김기동, 〈무제 Untitled (편재)〉, 1970년대 초, 112×162cm

이 전시 가운데 가장 눈에 띈 것은 《한국실험미술과 김기동》전이었다. 그 이유는 한국미술계에서 비운의 작가로 알려진 김기동의 작품세계와 행적이 이번 전시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는 기획자인 김진혁 학강미술관 관장의 숨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가 오래전에 어떤 계기로 소장하게 된 미술수첩 등을 비롯한 다량의 미술서적과 도록, 사진, 편지, 원고, 작품 등 김기동 작가의 유품이 기반이 되었다. 석재기념사업회 운영위원회는 1974년에 창립한 《대구현대미술제》(1974-9)의 공로자로서 “1960-70년대 한국현대미술사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며 서울과 대구에서 활동을 펼친 김기동 작가의 앞서 간 예술정신을 재발견하고자 그를 수상자로 결정하였다.”고 밝혔다. 따라서 초창기 대구현대미술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故 김기동 작가에게 ‘2025 석재문화상’을 수여하고 기념전을 갖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미술인에게 비교적 생소한 편인 김기동은 과연 누구인가? 1937년 대전 생인 김기동은 부유한 집안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현대미술가협회와 함께 전후 앵포르멜 미술운동을 추진한 ‘60년미술가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이 단체에서 “서울대에 윤명노, 홍대에 김기동”이라 할 만큼 주목을 받았다. 김기동은 60년미술가협회 창단 후에 군에 입대, 제대한 후에 신촌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작업에 몰두했다. 청년 시절인 이 무렵 그는 오광수를 비롯하여 故 송수남, 故 조성묵, 강우방 등등 훗날 한국미술계의 거목이 된 인사들과 교류한 흔적을 편지로 남겨 그 일부가 이번 전시에 아카이브 자료로 공개되었다. 젊은 시절 김기동과 하숙을 같이 하기도 한 《청년작가연립전》(1967)의 무동인 멤버 이태현(1941- )은 그를 ‘큰 키에 눈이 부리부리한’ 호남형의 인물로 기억한다. 그는 60년대 중반에 인천에서 잠시 교편을 잡은 뒤, 대구에서 경북예술고등학교를 거쳐 1968년부터 85년까지 대륜고등학교 미술교사를 지냈다. 일찍이 1960-70년대부터 섬유산업이 발달한 대구는 막대한 문화자본을 형성, 미술시장이 번성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컬렉터 층의 형성과 함께 미술대학의 증설, 미술인구의 팽창, 견고한 작가층에 기반을 둔 화랑, 아트센터, 미술관 등등 기반시설의 확충은 대구를 현대미술의 메카로 인식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김기동은 김영진, 김재윤, 김종호, 이강소, 이명미, 이묘춘, 이향미, 이현재, 최병소, 황태갑, 황현욱 등과 함께 제1회 대구현대미술제의 창립 기획인이 되어 대구를 현대미술의 메카로 만들기 위한 주춧돌을 놓았다. 대구현대미술제는 이듬해인 1975년에 창립된 서울현대미술제를 시발로 부산, 광주, 전주, 강원 등 전국에서 ‘현대미술제’의 봉화가 오르는 기폭제가 되었다.

김기동의 대표작 중 하나인 〈무제 Untitled (편재)〉(1970년대 초, 112×162cm)는 흰색 바탕에 붉은색으로 X자를 크게 그린 작품이다. 개념적인 측면에서 치우치지 않음을 의미하는 ‘편재’에 관심이 많았던 김기동의 의식의 단면을 보여주는 이 작품은 국전에서 붉은색 작품이 낙선하는 등 당시의 반공법과 관련된 시국의 단면을 상징한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2000년대 초반, 서울로 상경 후 생활고로 좌절과 실의로 방황을 거듭하던 김기동은 서울역 앞에서 노숙인이 되어 비극적인 삶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