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렬, 〈자연의 초상〉, 162×130cm, 캔버스에 유채, 2000


2025년 6월 30일, 캔버스 위에 생명의 순환과 인간의 희망을 치열하게 그려온 김경렬 화백(1956-2025)이 타계하였다. 그의 부고는 가을 낙엽이 소리 없이 땅으로 돌아가듯, 조용하지만 깊은 아쉬움으로 우리 가슴에 내려앉았다. 그의 화가로서의 삶은 시작부터 녹록지 않았다. 가난은 재능 있는 소년에게 미술 교육의 문턱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독학을 하며 화가를 꿈꿨지만, 부모님의 반대와 현실의 벽 앞에서 그는 홍익대학교 응용미술과에 입학하는 것으로 타협해야 했다. 그러나 시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부친의 별세로 가장이 된 청년, 설상가상으로 폐결핵까지 앓으며 그는 삶의 벼랑 끝에 섰다. 그러나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미술 강사로 뛰며 학비와 생계를 책임졌고, 절박함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졸업 후 대기업 디자이너로 안정된 길을 걸었지만, 그의 영혼은 늘 캔버스를 향해 있었다. 결국 3년 만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것은, 무모함이 아니라 그림 없이는 살 수 없었던 운명에 대한 순응이었다.

그의 초기 예술 세계는 나무를 통해 인간을 탐구하는 여정이었다. 그는 전국의 거목을 찾아 순례하듯 여행하며, 나무의 사계에서 인간의 생로병사를 발견했다. 나무는 그에게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이자, 온몸으로 풍상을 견디며 역사를 새기는 우리 모두의 초상이었다. “나는 자연을 통하여 인생을 배운다. 나는 숲을 통하여 삶을 본다. 나는 나무를 통하여 인간을 느낀다. … 봄은 맑은 영혼을 지닌 어린이 여름은 건강한 젊음의 청년 가을은 우아한 멋을 지닌 중년이다. 겨울은 인생을 회고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노년, 나무의 겨울은 봄을 향한 희망이다. (김경렬, 「자연의 초상」)”  그의 캔버스 위에서 나무는 굳건한 생명력으로, 때로는 완숙한 황혼의 아름다움으로 피어났다. 평론가 이주헌이 “김경렬의 그림에서 만나는 나무들은 우리의 초상화이고 우리 스승의 초상화”라고 평했듯, 우리는 그의 나무 그림 앞에서 자신의 삶을 비춰보게 된다.

김경렬, 〈the battle-Gogh〉, 180×89cm, 캔버스에 유채, 2008


50세를 넘어서며 그의 화폭에는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다. 굳건히 서 있던 나무 대신, 역동적인 ‘비보이’가 등장한 것이다. 이는 인간이라는 화두에 대한 더 깊고 현대적인 탐구였다. 그는 “디지털로 대변되는 우리 시대상을 담기에는 (나무만으로는)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고백했다. 고흐, 아인슈타인과 같은 역사적 인물들의 얼굴을 현란하게 춤추는 비보이의 몸에 결합시킨 이 파격적인 시도는,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었다. 비보이의 몸짓을 이해하기 위해 직접 춤을 배우기까지 했던 그의 열정은, 독특한 에너지를 가진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나무에서 비보이로 소재는 바뀌었지만, 인간의 삶과 시대정신을 담아내려는 그의 일관된 주제 의식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러나 예술혼을 불태우던 그에게 마지막 시련이 찾아왔다. 암이라는 병마는 그의 손에서 유화 붓을 앗아갔다. 항암치료의 고통보다 그를 더 괴롭혔던 것은 “몸에 힘이 없어서 화실조차 가지 못하는” 현실이었다. 평생을 그림과 함께 숨 쉬던 그에게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다. 하지만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화가였다. 집에서 수채화 도구를 꺼내 매일 붓을 들었다. 힘겨운 몸을 이끌고 운동을 하고 식단을 조절하며, “언젠가는 꼭 화실에 가서 수채화 대신 유화를 그리는 희망”을 이야기했다.

이제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남긴 메시지는 여전히 살아 숨 쉰다. 그의 삶은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인간의 존엄성을, 그의 예술은 한결같이 인간을 향했던 따뜻한 사랑을 증명한다.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통해 삶을 배우고, 당신의 인생을 무엇으로 채우고 있느냐고.


- 정다영(1994- ) 명지대 미술사학과 박사수료.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