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가 내렸다. 작년 7월, 평택 한 아파트에 작가 유가족을 만나기 위해 방문한 날의 기억이다. 창 밖으로 빗소리가 들리던 그날, 작가 김영배(1947-99)의 사모님을 통해 작가님의 삶과 예술, 평택과의 관계, 그리고 갑작스런 사고까지의 이야기를 ‘평택 미술실태 기초 자료 조사’ 연구원 자격으로 들을 수 있었다. 해당 사업은 평택미술사 개괄원고, 인물 연구 원고 작성 그리고 미술사 세미나 개최를 골자로 했다. 삼성반도체 공장과 전세계에서 미국 본토를 제외한 가장 큰 미군기지가 있는 곳이라는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평택의 내밀한 이야기를 사업이 진행되던 작년 말까지 듣고 정리할 수 있었다. 평택과 관련하여 여러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평택시가 평택군, 송탄시와 통합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지 불과 30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현재 전국 지자체는 통합과 해체의 과정을 거쳐 226개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중 약 절반이 문화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문화재단이 설립되지 않았더라도 규모나 지향점에 차이가 있을 뿐 지자체 사업으로 다양한 형태의 시각예술 사업은 대부분 존재한다. 이러한 인프라가 갖춰진 배경에는 시민 참여 확대, 권력 분산과 균형, 행정 적합성과 같이 민주주의가 우리의 일상이 되어가는 과정, 지방자치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지방자치 또한 위기를 겪은 바 있다. 1961년 군사정권 수립과 동시에 지방의회가 해산되는 것으로 중단되었다가, 1991년 시·군·구의회 의원선거가 치러지면서 다시 시작되기도 했다. 이 당시 다시 시작된 지방자치에 대한 기대는 사회 곳곳에서 보여졌다. 

「특집:지방자치시대와 지역미술」, 『가나아트』, 1991년 9월호

한국 미술계도 마찬가지였으며, 2편의 총론과 수원, 인천, 강원, 대전, 전북, 광주, 대구, 부산, 제주 순으로 지역미술계의 형성과정과 현황, 연혁을 정리한 「특집:지방자치시대와 지역미술」(가나아트, 1991년 9월호)이 이를 잘 보여준다. “지역문화는 지역성이라는 특수성으로 지역주민의 일체감과 자긍심을 함양하는 것이고, 지역주민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유발함으로써 지역발전을 선도하는 활력소가 된다.”라는 특집기사의 서술은 오늘까지도 여전히 유효하다.

김영배는 서울 사직동에서 출생하여 대학 졸업까지 그곳에서 성장한 후 1975년 한광여자고등학교 미술교사로 평택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토박이는 아닌 셈이다. 하지만 그는 평택에서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1995년 평택 통합 이후에도 평택미협과 송탄미협 양쪽의 회원으로 활동하며 가교 역할을 했으며, 작품을 여러 지역에서 활발히 발표하였다. 작가 사후 1주년을 추모하며 개최된 전시의 자료에는 한영섭, 김재관, 백준기, 조순조, 이상권과 같이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배이자 동료들의 글이 수록되어 그의 넓은 관계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그의 예술세계는 1970년대 무분별하게 수용되던 서구 모더니즘과 거리 두기를 시도하고, 1980년대 중반부터 모더니즘 이론을 분석한 후 일상 경험과 사적 감수성을 바탕으로 모더니즘의 어휘를 재해석함으로써 자신만의 작업 세계를 구축했다. 이외에도 작가는 다양한 매체에서 여러 소설가와 삽화가로 협업하며 미술과 만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미술의 다변화를 탐색하기도 했다.

송탄미술학원에서의 김영배 작가와 가족들, 1985년경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작가의 화풍만큼이나 지역의 물리적 경계도 가변적이다. 이 가변적인 것 안에 담긴 특수성을 때로는 가까이에서 때로는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보편적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다. 이러한 일이 ‘자치’라는 말만큼이나 우리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서두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사모님께서 작가님이 만들어 두신 포트폴리오를 가지고 갈 것을 권하셨다. 아파트에서 나와 차로 향하는 그 시간에는 비가 멈춰서 다행히 자료가 젖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