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치유의 공간
이선영(미술평론가)
일상어에서 ‘감각적이다’라는 표현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감각적인 작품’이라는 표현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그것은 현대미술이 다른 분과과학과 마찬가지로 자기비판과 정의에 치중하면서 개념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념화가 미술의 정체성을 더 확실하게 해주었다거나 풍부하게 해준 것은 아니다. 손기술을 넘어서는 개념의 탑재는 필수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기술과 개념 이상의 것이 또 요구되었을 때 감각은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대안으로 다가온다. 작은 새가 며칠간 먹지도 쉬지도 않은 채 여러 대륙과 대양을 건너 서식지로 되돌아오는 등의 기적 같은 생존의 기술은 본능적 감각에 의한 것이다.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자율화되었다는 믿음에 의해 잃어버린 것들도 상당하다. 이예린의 작품에는 신체의 감각기관들이 자주 등장한다. 소재뿐 아니라 회화 자체가 감각의 장이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눈, 귀, 뇌 등은 유기적 총체의 관계를 벗어나 몸에서 적출된 기관인 양 제각각이다. 기관들 간의 가느다란 연결망도 보이지만, 각자의 존재를 강조하는 것은 분열적이다.

전시전경

빛이 물든 자리에, Oil on canvas, 145.5x112.1, 2025
시대를 정신상태와 비교한 저자들은 근대적 편집증의 대안으로 분열증을 상찬하기도 했다. ‘자본주의와 정신 분열의 관계’(질 들뢰즈, 프레드릭 제임슨)는 정치적 관점에 따라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해석된다. 부조리한 시스템이나 주체는 해체돼야 하지만, 결정적 해체는 우연에만 의지하지 않는다. 한편은 현대사회 자체가 분열증적이니 동종요법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하나만 잘해서도 안 되고 여러 가지를 동시에 잘해야(multitasking) 한다. 다른 한편은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분열되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분열은 이윤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보수적이다. 분열적 현상은 감각의 확장일수도 해체일 수도 있다. 이예린이 감각기관을 화면에 분열적으로 배치한 것은 각 작품에 담긴 여러 경험은 그에 상응하는 주된 감각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가령 소리가 중요하면 귀가, 본 것이 중요하면 눈의 비중이 커진다. 본 기억을 조합한 풍경에서 합리적 원근법은 무시된다. 그것은 고대의 이미지처럼 개념적이다. 작가는 감각에 대한 개념을 그리는 것이다.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온 이는 눈과 손의 관계가 보통 사람보다 더 직접적일 것이다. 보통 사람은 보고도 그릴 수 없지만, 화가는 안 보고도 그릴 수 있다. 이예린의 작품이 추상은 아니지만, 보이는 것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현재의 관심사에 따라 과감하게 (재)배치한다. 대개 자신이 직면한 현실이나 일상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서 생각의 단편들이다. 지나온 날보다 미지의 날이 더 많은 젊은 작가는 생각이 많다. 특히 환경의 변화는 커다란 자극으로 작동한다. 이번 전시의 부제인 [머물다, 물들다]는 자신이 새롭게 위치한 공간/자리에 물드는 과정을 작품으로 표현한다. 작업은 철저히 내적인 것이어서 스며들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새롭게 머물게 된 곳에 빨리 물드는 것은 작업실을 자주 옮겨 다녀야 하는 젊은 작가에게 매우 중요하다. 낯선 환경에 던져졌을 때 감각은 부챗살처럼 펴지면서, 현재를 파악하고 과거를 기억하며 미래를 예측하려 한다.

고요를 품은 섬, Oil on canvas, 33.4x24.2, 2025

노을의 품, Oil on canvas, 33.4x24.2, 2025

생각의 미로, Oil on canvas, 140x50, 2025

속삭이듯 건네는 평온, Oil on canvas, 140x50, 2025
작품 [빛이 물든 자리에]는 창작소에 입주한 후 자기 좌표를 확인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작업실 창가로 보이는 평범한 거리 풍경을 그린 것이다. 이예린에게 그림은 낯선 대상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게 한다. 그려진 후 그곳은 비로소 자신의 장소가 될 수 있다. 미술계의 어디쯤에 작가를 위치시켰을 ‘추상적 공간은 구체적인 자리’(조너선 스미스)가 되는 것이다. 오후의 따스한 햇살이 가득한 작품 속 풍경은 낯선 공간에서 ‘나만의 공간’으로 변한 상황을 전달한다. 그곳은 공적인 장소지만 한 작가가 머무는 순간 온전히 그만의 곳이 된다. 한편 적대적 환경에서 작가는 움츠러들며, 보다 안전하고 독립적인 자기만의 시공간을 희망한다. 작가에게 움츠림/펼쳐짐의 관계는 시공간의 전환, 가령 여행 같은 것에서 찾아진다. 여행 등을 통해 접한 낯선 환경은 때로 좋은 자극이 되어 감각을 활성화할 것이다. 바다같이 작가가 선호하는 장소는 감각이 최대한 펼쳐지며 갱신되는 장이 되곤 한다. 작가는 이전 작업에 대한 노트에서 ‘기억을 상기시키는 요소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 기억 속 감각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장소에서 떠오르는 기억을 재구성하고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해왔다’고 한다.
그에게 시선은 ‘기억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기억이 중요한 만큼 눈도 중요하다. 인간에게 눈의 위상은 얼굴과도 같다. 아르멜 르 브라 쇼파르는 [철학자들의 동물원]에서 얼굴이라는 말 속에는 시각이라는 단어와 같은 어원이 있다고 밝힌다. 저자는 ‘천상의 높은 것들을 볼 수 있도록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눈은 온 몸의 창이자 영혼의 거울이다’(P. 보에스튀오)라는 말을 인용한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를 탐구하는 그 책에서, 이예린의 작품과 관련해 참고할 만한 지점은, 특정 기관이 전체를 대신할 수 있는 은유법(제유)이다. 사람마다 무엇이 전체를 대변할 수 있는지는 다르다. 이예린의 감각기관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전체를 대신한다. 모든 감각기관을 총괄하는 뇌는 편재한다. 의학은 눈이나 귀가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뇌가 그렇게 한다고 한다. 환경공해로 뇌에 미세플라스틱이 쌓인다는 최근 연구도 있고, ‘뇌에 칩 이식해 시력 회복하려는 인공눈 개발에 도전’(매일경제, 7월 28일)한다는 소식도 있다. 뇌가 손상되면 외부감각 기관은 물론 운동기관도 무력해진다.

우연이 주는 선물, 마음속에 품고 싶어, Oil on canvas, 162.2x130.3, 2025

스치듯 우연한 위로, Oil on canvas, 162.2x112.1, 2025
울산 염포 전망대를 소재로 한 작품 [스치듯 우연한 위로]에서 뇌는 그 자체가 얼굴이 되었다. 뇌-얼굴로부터 출발하는 길은 어디를 향하는지 불확실하다. 몸이 의지하는 바닥은 그리 단단한 토대로 보이지 않는다. 눈알은 따로 나와서 달걀처럼 흘러내린다. 눈은 보기보다는 보인다. 분열적 상황은 풍경으로서 갖춰야 할 정합적인 논리를 초월한다. 그 풍경은 어디에도 없는 상상의 장소이다. 감각된 장소는 무의식의 심연으로 내려가 불현듯 다시 떠오르는 기억의 아카이브가 된다. 작품 [우연이 주는 선물, 마음속에 품고 싶어]는 눈, 코, 귀, 입이 변형되어 괴물같이 변한 존재가 화면 오른쪽에 웅크리고 있다. 관객과 더불어 보게 되는 광경을 크게 받아들이고 크게 내뱉는다. 큰 귀는 도시 축제의 폭죽이나 자연의 파도 소리를 듣고 큰 눈은 변화무쌍한 하늘을 본다. 작가에 의하면 ‘시선을 따라, 몸을 따라, 보고 듣고 만졌던 모든 것은 결국 풍경이’ 된다.
재구성된 풍경과 신체를 통해 인식된 감각의 정보를 화면에 담는다. 감각 정보는 신체의 일부, 의인화한 형태로 드러난다. 작품 속 또 다른 분신들은 각각 귀, 눈, 코 등을 하나의 얼굴로 삼아 자신이 자리한 주변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인다. ‘얼굴’을 차지한 감각기관을 제각각이지만, 몸은 유니폼을 입은 듯 익명적이다. 이 작품에서는 눈보다는 귀나 코가 더 큰 역할을 하는 듯하다. 화가에게 시각은 필수지만, 다른 감각이 더불어 활성화되어야 충분조건이 완성된다. 확장된 감각에 비한다면 몸은 다소간 수동적인 모습이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구름이나 연기는 고정되지 않고 자유롭게 변화하는 모습으로 작가의 희망에 따라 흘러간다. 그에게 구름은 ‘생각의 움직임이자 감정의 흔적이며, 자유의 상징’이다. 공간과 시간이 연결되듯, 기억과 지각은 연동된다. 그리고 ‘낯선 장소에서 마주한 우연한 풍경 속에서 위로받는’ 작가에게 자유와 치유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다. 자유로울 때만 치유될 수 있고 치유는 자유를 준다.
출전; 울산북구 예술창작소 소금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