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석/ 원형적 존재로부터 발신된 상형문자 같은, 기호 같은
고충환 | 미술평론가
기억의 벽, 상실한 것들을 되불러오는
터실터실한 표면 질감의 벽면을 보는 것 같은. 비정형의 얼룩이 물이끼가 말라붙은 것도 같고 희미한 흔적으로 남은 알 수 없는 낙서를 밀어 올리는 것도 같은. 얼마나 오랫동안 거기에 그렇게 있었는지 모를 그을음 같고 언제 어떻게 스쳤는지도 모를 누군가의 때 묻은 손길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같은. 벽의 상처라고 해도 좋을 우연한 스크래치와 균열 같은. 그 균열을 시멘트로 땜질해 놓은 것도 같은. 빛바래고 색 바랜 회벽이 세월의 흔적을 증언하고 있는 것도 같은. 손바닥으로 벽면을 쓸고 지나가면 손가락 끝에 감촉돼 오는 표면 질감과 함께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렇게 잇대어진 담벼락을 손으로 쓸며 내달리던 골목길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유명한, 모더니즘 소설의 효시로도 알려진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마들렌 과자를 깨물 때 나는 소리와 향에 실려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타듯 유년 시절로 되돌아간다. 이후, 유년 시절을 상기시키는 현실 속 계기를 프루스트 효과라고 부른다. 여기서 현실 속 계기는 향이 될 수도, 맛이 될 수도, 소리가 될 수도, 어떤 장면이 될 수도, 모르는 누군가가 될 수도,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작가는 빛바랜 색감의 터실터실한 벽면 질감을 매개로 어쩌면 상실한 유년 시절의 추억을 되불러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라는 제목에서처럼 잃어버린 시절을 되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최소한 잃어버린 시간을, 상실한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실한 것을 그리워하는 그림, 그러므로 그리움을 상기시키는 그림을 자신의 그림으로 삼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상실한 것만이 그리움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다르게 말하자면 결핍한 것만이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고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토마스 만은 예술이란, 결핍 위로 솟아오르는 무엇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결핍이 없으면 예술도 없다. 결핍한 것, 상실한 것, 잃어버린 것은 어느 정도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자의식이 문제다. 절실함이 문제다. 예술가는 유독 이런 결핍에 대한 감각에 민감하고, 결핍 의식의 촉이 발달 된 부류들이다. 예술가의 두 눈 중 하나가 현실원칙을 향한다면, 다른 한쪽 눈은 이런 결핍을 향한다. 창작 주체의 성향을 말한 것이지만, 이런 성향에 비추어볼 때 작가는 현실원칙보다는 결핍 의식 쪽이 더 강한 것 같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런 결핍 의식, 잃어버린 것에 대한 자의식, 그러므로 지극한 상실감이야말로 현대인의 보편적인 징후이며 증상일 수 있다. 그는 중심을 상실하고, 유년을 상실하고, 자기를 상실하고, 자연을 상실하고, 고향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다. 여기서 상실한 고향은 지정학적 장소와는 상관없는, 따로 마음 둘 곳이 없는, 의지가지없는, 심리적 장소를 의미한다. 작가가 앞세우고 있는 화면에 해당하기도 할 것이다. 그 화면에 작가는 상실한 유년과 같은, 상실한 자연과 같은, 상실한 고향과 같은, 그러므로 어쩌면 상실한 자기라고 해도 좋을, 상실한 것들을 불러서 들어 앉힌다. 그렇게 보는 이로 하여금 무엇을 어떻게 상실한 삶을 살고 있는지 주지시킨다. 주지 자체가 이미 위로임을 인정한다면,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상실된 것을 주지시키면서 위로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터실터실한 표면 질감과 알 수 없는 비정형의 얼룩이 잃어버린 시절을 되불러오는, 상실과 위로로 나타난 양가감정의 벽 앞에 서게 만든다.
원형의 바다, 존재가 유래했을지도 모를
물이끼 같은. 물 위에 떠다니는 부유물 같은. 물을 휘저으면 떠오르면서 흩어졌다가 가라앉는 침전물 같은. 그렇게 물속에 가라앉은 바닥 같은. 부유물이 숨을 쉬면서 만든 기포의 흔적 같은. 달 표면의 분화구 같은. 물이 지나간 자리가 여실한 이름 모를 행성의 지표면 같은. 갯벌이나 모래와 같은 침전물 위로 갯지렁이가, 물고기나 물벌레가 지나가면서 남긴 흔적 같은. 모래밭 위에 아로새겨진 알 수 없는 상형문자 같은. 미증유의 기호 같은. 칠흑 같은 밤에 달빛에 의지해 물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물속에서 돌인지 생명인지 알 수 없는 존재가 발하는 파리한 빛의 기미 같은. 물속에 보이는 돌의 질감 같은. 돌의 결 같은. 물속에서 더 선명한, 알록달록한 생명체 같은. 물속에 이는, 그러므로 어쩌면 마음속에 일어나는 파문 같은. 파토스 같은. 심해 같은. 심연 같은. 밤하늘을 미아처럼 떠도는 별빛 같은. 검은 바닷속에 흐르는 은하수 같은. 검은 물속을, 우주를, 우주적 자궁을 떠도는 빛 같은. 빛 점 같은. 빛 점들의 군집 같은. 그러므로 존재의 씨앗 같은. 생명의 씨알 같은.
지금은 퇴직해서 전업 작가로 작업에 매진하고 있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이전에 오랫동안 작가는 남해안에서 중등학교 교사로 재직했었다. 알다시피 남해안은 지형상 바닷가를 끼고 있어서 바다가 작가의 일상의 한 부분으로 녹아들었던 시절이었고, 그런 만큼 바다가 제2의 고향이라고 해도 좋은 시절이었다. 그런 어느 날 밤바다를 산책하다가 작가는 달빛 아래 하얗게 빛을 내는 무언가를 보았다. 그리고 그 빛이 굴 껍데기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근해의 굴 양식장에서 나오는 빛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굴 껍데기를 이용한 이런저런 형식실험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고, 마침내 유례가 없는 자기만의 작업을 성취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운 좋게 걸려든 소재라기보다는, 자기만의 소재, 자기만의 형식, 자기만의 작업을 궁리하고 골몰해온 평소 치열한 의식의 레이더가 감지해낸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칠흑 같은 밤바다에서 가만히 빛을 내는 소재, 칠흑 같은 밤바다와 어스름한 달빛의 하모니에 가만가만한 빛으로 반응하는 소재, 그러므로 어쩌면 빛의 질감이 연출한 신비와 아우라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칠흑 같은 밤바다와 심연과도 같은 어둠이 경계를 허무는,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존재의 자궁과 우주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미지의 장소에서 고독하게 가물거리는 빛의 기미 그러므로 존재의 기미(존재의 숨이라고 해도 좋을)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거저 굴 껍데기를 오브제로 사용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굴 껍데기를 이용해 자기만의 작업으로 녹여내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저런 시행착오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고, 마침내 어느 정도 손에 잡히는 방법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 대략의 과정을 보면, 먼저 굴 껍데기를 채집해 물로 세척 하는 과정을 통해 소금기를 뺀다. 그리고 충분히 소금기를 뺀 굴 껍데기를 곱게 빻아 가루를 만든다. 가루를 만든다고는 하지만 균일하지는 않아서 크고 성근 알갱이와 고운 가루 형태의 알갱이가 어우러진, 다른 질감의 화면을, 다양한 표정의 화면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가루를 천연아교에 풀어 화면에 발라 밀착시키는데, 화면에 밀착시키는 과정에서 이미 작가가 원하는 어느 정도의 형태와 질감이, 굴곡과 요철이 결정된다. 그림을 위한 큰 틀이 결정되는 과정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리고 화면이 충분히 건조한 연후에 그 위에 아크릴과 먹을 올려 채색을 하는데, 가루 형태의 알갱이가 마치 종이에 물감이 스며들 듯해서, 종이가 젓은 상태에서 먹이 종이에 스며들어 종이와 먹이 일체를 이루는 수묵 선염법과 같은 미묘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천연재료를 사용한 것이면서도 마치 동양화 같은, 한국화 같은, 수묵화 같은 그림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수묵화로 치자면 종이와 먹을 빼놓을 수 없고, 그 미학적 장치로서 여백(그리지 않으면서 그린, 그리지 않음으로써 그린 그림을 위한 공간, 그러므로 어쩌면 그린 그림보다 더 결정적인)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이렇게 만든 화면 위에 한지를 덮어서 가리는데, 반투명한 한지가 일정한 양의 빛을 투과시켜 마치 화면의 밑바닥에서 화면 위로 우러나오는 형태를 보는 것 같은, 시간의 지층을 보는 것 같은, 희미한 기억의 질료를 더듬는 것도 같은, 부드러운, 우호적인, 암시적인, 비결정적인, 의미론적으로 열린 분위기의 그림을 얻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바탕 화면을 그라인더로 갈아내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 한지로 덮지 않고 화면의 맨살 그대로를 노출하기도 한다. 아마도 빛의 질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인데, 그라인더로 갈아내면서 숨은 빛 알갱이가 살아난다. 그리고 한지로 덮어서 가린 화면에서 빛의 질감이 은근하다면, 맨살 그대로 드러난 화면에서 빛 알갱이는 하나하나가 올올한 것이 신묘한 느낌을 준다.
다시금, 작가가 굴 껍데기를 처음으로 발견한 순간의 감동을 되새길 일이다. 앞서, 칠흑 같은 밤바다와 어스름 달빛이 어우러진 하모니에 반응하는 빛의 질감이라고 했다. 그 빛의 질감이 주는 신묘한 느낌에 대해서는 어쩌면 물질적 상상력(바슐라르 가스통)의 결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질을 매개로 촉발된 상상력과 같은, 유물론적 상상력과 같은, 몽상적 상상력이라고 해도 좋을, 어떤 상상력이 작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빛으로 표상되는 존재의 궁극에 대한 상상력, 그러므로 원형적 상상력이 작용했을 터이다. 칼 융은 개인의 기억을 넘어서는 아득한 기억을 집단 무의식이라고 했고, 그 집단 무의식이 반복해서 나타나는 상징 그러므로 반복 상징을 원형이라고 불렀고 원형적인 이미지라고 불렀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칠흑 같은 밤에 어스름 달빛에 반응하는, 마치 꿈이라도 꾸듯 아롱거리는, 바다에 사는, 밤에만 나타나는(그러므로 밤에만 볼 수 있는, 다시 그러므로 절대 어둠과 더불어서만 대면할 수 있는) 혼불들이 아롱거리는 밤바다 앞에 서게 만든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도 모를, 오직 절대 어둠 속에서 고독하게, 알아보기 힘겹게, 희미하게, 겨우 가물거리는 존재의 원형적인 이미지 앞에 서게 만든다. 모든 존재의 자궁인 바다 앞에, 밤 앞에, 어둠 앞에 서게 만든다. 그렇게 어둠과 더불어서 원형적인 존재를 꿈꾸고, 상상하고, 몽상하게 만든다.
내면 풍경, 추상과 구상을 재정의하는
그리고 여기에 추상과 구상의 문제가 있다. 얼핏 보기에 작가의 그림은 추상화처럼 보인다. 분방한 붓질과 우연한 스크래치, 그리고 크고 작은 비정형의 얼룩이 어우러져 자국을 만들고 흔적을 만드는. 보통 추상은 색면구성과 같은 형식논리에 천착한 기하학적 추상과 분방한 붓질이 떠올려주는 정서적 환기를 중시하는 서정적 추상으로 구분된다. 이런 구분에 비추어보면, 작가의 그림은 비정형의 얼룩이, 자국이, 흔적이 감성을 자극하고 정서를 건드리는 서정적 추상에 가깝다. 여기서 자국과 흔적은 침묵하는 언어의 한 형식일 수 있다. 자국은 언제나 무엇의 자국인 것이고 흔적 역시 무언가의 흔적임을 생각한다면, 의미가 물화 된 형식 그러므로 잠재된 의미의 질료라고 해도 좋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고향의 뒷산과 마을을, 밤하늘의 별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새벽녘 하얀 물안개를 그린 것이고, 큰 산 주변을 돌아가는 하얀 구름의 움직임을 그린 것이라고 했다. 가만히 보면 그림 속에 산이 있고,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고도 했다. 그림 속 점은 나뭇잎으로 생각할 수도, 새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는 마음속 이미지를 그린 것이라고도 했다. 아마도 마음속 이미지를 그린 것이라는 대목이 힌트가 될 것 같다. 작가의 그림은 마음속 이미지를 그린 것이다. 마음의 눈으로 본 풍경, 그러므로 내면 풍경이고, 심의적인 풍경이라고 해야 할까.
이런, 마음의 눈으로 본 풍경 속에서 추상과 구상의 전통적인 구분법은 설득력을 잃는다. 빛바랜 벽면의 표면 질감 위에도 구상은 있고, 칠흑 같은 밤바다의 수면에서 반짝이는 빛 속에도 구상은 있었다. 투명한 깊이를 내장한 밤하늘의 별빛 속에도 구상은 있고, 큰 산을 휘돌아가는 구름의 운행 속에도 구상은 있었다. 추상은 구상 속에 잠재해 있었고, 구상은 추상의 가능성을 예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작가는 일상 속에서 추상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캐낸다. 그렇게 추상과 구상을 재정의한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유년과 같은 상실한 시절을 되불러오는 기억의 벽 앞에 서게 만들고, 어쩌면 존재가 유래했을지도 모를 칠흑 같은 밤바다(그 자체 투명한 깊이를 내장한 밤하늘로 변주되는, 그리고 관념적으로는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확장되는)와 대면하게 만든다. 추상과 구상이 경계를 허물면서 재정의되는, 일상적인 경험과 창작적 경험이 경계를 허물면서 하나로 몸을 섞는 내면 풍경 앞에 서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