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상의 추상, 저우 리/ 삶을 증언하고 존재를 증명하는 추상
고충환 | 미술평론가
길 위의 추상. 여기에 길에서 추상한다는 부제가 주제를 부연하고 있다. 주제에서 한번, 부제에서 한번 길이 재차 반복되고 있다. 그렇게 길이 주제라고는 할 수 없으나, 주제에 해당하는 추상 이상으로 강조되고 있다. 비록 추상이 주제이지만, 정작 방점은 길에 찍혀있다. 그렇게 다시, 길 위의 추상 그러므로 길에서 추상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추상이 길에 결부될 수밖에 없고, 결부되어야 마땅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길은 뭔가. 삶에 대한, 사회적 현실에 대한, 존재에 대한 메타포다. 그러므로 길에서 추상하면, 삶의 현장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다시, 그러므로 어떤 식으로든 삶의 현장이 반영되지 않은 추상은 없다. 예술은 삶과 예술, 사회와 예술의 관계를 조망하는 예술사회학의 관점에서 논의돼야 하고, 추상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그렇게 이번 전시는 예술사회학을 매개로 추상에 대한 지금까지의 정의를 재정의한다.
그렇다면 추상에 대한 재정의 이전에 정의를 보자. 여기에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이다(프랭크 스텔라), 라는 동어반복이 있다. 그림은 다만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과 같은 형식요소의 산물이라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형식논리에 방점을 찍은 말이다. 그림은 다만 형식요소 자체일 뿐, 다른 무언가를 위한 의미도, 기호도, 상징도, 표상도 아니라는 말이다. 그림과 의미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추상은 없다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말이 이런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을 수정한다. 생각해보면 추상미술의 선구로 알려진 칸딘스키도, 그리고 파울 클레도 의미 없는 그림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주지하다시피 두 사람 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그런 만큼 화음(칸딘스키)과 리듬(파울 클레)과 같은 소리 그러므로 감각을 재현의 도구로 삼았다. 그렇게 이번 전시는 길에서 일탈한 추상을 다시 길 위의 제자리로 돌려세우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 일단을 기하학적 패턴을 변주한 일련의 작가들에서 엿볼 수 있다. 화구를 매개로 한 김서울(메타 회화?), 단청의 패턴을 매개로 한 김아라(전통의 재사용?), 색띠와 가구를 매개로 한 박미나(생활미술?), 직조의 차승언, 포토콜라주에 페인팅을 부가한 이희준 같은 작가들이 그렇다. 삶의 현장을 매개로 한 추상이라고 해도 좋고, 삶이라는 숙주에 기생하는 추상이라고 해도 좋다. 소위 차가운 추상으로 형용 되는 기하학적 추상을 재사용하는 방법론의 스펙트럼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도 좋다.
기하학적 추상이 정형 비정형의 패턴과 구조에 주목하고 있다면, 그 반대편에 자유구상이 있다. 박경률, 최영빈, 심혜린, 심우현 같은 작가들이 그렇다. 몸이 부르는 대로 그리고 감각이 이끄는 대로 그린, 소위 몸 그림의 전형을 예시해주고 있다. 현상학(특히 메를로 퐁티의 몸의 현상학)으로 치자면 주체와 세계가 만나는 몸의 최전선에 해당하는 감각을, 감각의 경험을 그려놓고 있다고 해도 좋다. 심리학 혹은 정신분석학으로 치자면 억압된 욕망 그러므로 무의식의 다른 이름이라고 해도 좋을 파토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분출을 그려놓고 있다고 해도 좋다. 방법론과 형식논리로 치자면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부르는 자동기술법, 하나의 의미가 다른 의미를 부르는 자유연상 기법, 그리고 여기에 의식이 흐르는 대로 그리는 의식의 흐름 기법이 실현 혹은 실험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추상표현주의와 액션페인팅으로 나타난 소위 뜨거운 추상을 재사용하는 방법론의 스펙트럼을 예시해주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런가 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가시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것을 유령이라고 불렀다. 어쩌면 그 자체 색깔도 형태도 없는 시간 역시 유령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은 크게 선형적인 시간과 비선형적인 시간으로 나뉜다. 선형적인 시간이 객관적인 시간, 개념화된 시간이라면, 비선형적인 시간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시간이다. 주체의 주관에 따라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흐르고, 쌓이고, 포개지고, 뒤집히고, 휘어지고, 얼어붙는 시간이다. 작가들이 주로 천착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안종대, 양자주, 이은경 같은 작가들이 그런데, 흐르는 시간 혹은 축적된 시간이 남긴 흔적 그러므로 어쩌면 시간의 몸을 만든다. 투명한 레진으로 오브제를 가두어 시간을 고정하는데, 채집된 시간 혹은 박제된 시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층층이 중첩된 화면을 갈아내 속살의 레이어가 드러나게 만드는 것에서는 시간의 지층을 오롯하게 조형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사물을 재구성한 작가들도 있는데, 박정혜, 조경재, 조재영 같은 작가들이 그렇다. 사물의 재구성으로 치자면, 마르셀 뒤샹의 변기 이후 사물 자체에 주목한 네오다다, 최소한의 미술에 천착한 아르테포베라가 미술사적 선구에 해당한다면, 인간소외에 대한 역설적 현실을 증명하는 사물 인격체에 이르는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림과 사진,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우르는, 그렇게 재현의 의미를 재고하게 만드는 추상 사진이 흥미롭고, 미니어처로 축약된 기념비적인 조형물이 정작 골판지로 만든 것으로 판명되는 것에서 오는 의외성과 비판적인 태도가 주목된다. 이외에도 빛바랜 색채감정이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그렇게 감각의 흔적을 예시해주고 있는(송은주), 또는, 내면적이고, 영적이고, 상업적인 빛을 매질로 한 형식실험을 보여주고 있는(이창원), 추상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일련의 작업이 있다.
노을로 붉게 물든 하늘을 보는 것 같은. 멀리 산허리가 보이고, 산 아래 계곡으로 폭포가 흐르는 풍경 같은. 부드럽고 우호적인 색채와 강렬한 원색이 부닥치고, 빛과 어둠이 스며드는 것도 같은. 만개한 꽃잎이 수술과 같은 속살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같은. 알 수 없는 기호 같기도 하고, 의미 없이 끄적거린 흔적 같기도 한. 암시적인. 가시와 비가시가 경계를 허물고 몸을 섞는 것도 같은. 빛이 어둠을 여는 것도 같은. 우주 창생의 극적 순간을 보는 것도 같은. 식물을 모티브로 한 드로잉이 현저한 페인팅을 보는 것도 같은.
개인전 형식으로는 한국에 첫선을 보인 중국 국적의 작가 저우 리의 그림이다. 앞서 추상을 재고하는 전시를 본 여파 때문일까, 반무의식적으로 그림 속에 숨어있는 재현적인 형태며 알만한 형상을 눈으로 더듬어 찾게 된다. 학습효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앞서 작가의 그림에 대한 인상을 열거하면서 00 같다고 했다. 형식적으로, 특히 의미론적으로도 열린 그림이어서 보는 사람에 따라서 저마다 다른 형상을, 모티브를, 의미를 보거나 읽어도 무방한 그림이다. 관객과 상호소통하면서 관객 속에서 최종적인 의미가 결정되는 그림이다. 생성하는 것들을 그린, 생성 중인 것들을 그린, 그러므로 생성회화라고 해도 좋은 그림이다. 결국, 감각의 흔적, 그러므로 어쩌면 몸의 증명이고 존재의 증명이라고 해도 좋은 그림이다. 꽃과 같은 구상적인 형태로 읽어도 좋고, 빛과 어둠으로 표상되는 두 세력이 부침하는 내면 풍경으로 읽어도 좋고, 우주적 차원으로 열린 거시적이고 미시적인 풍경으로 읽어도 좋은 그림이다.
여기에 한 송이 꽃 속에 우주가 피어난다는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존재 저마다 우주라는, 소우주와 대우주가 하나로 통한다는, 한 알의 모래알 속에 존재가 들어있고 우주가 들어있다는, 불교의 인드라망에서처럼 존재와 존재가 서로 반영하고 반영된다는,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하나의 망으로 연결돼 있다는 거대 담론을 함의할 것이다. 참고로 예시해 놓은 만다라 도상(우주를, 우주의 원리를 도해한 그림)이 부제처럼 거대 담론을 뒷받침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게 두 전시(길 위의 추상과 저우 리)는 추상이라기보다는 추상과 구상, 추상과 형상의 경계에 있는, 그러므로 추상으로도 아니면 구상으로도 정의하고 범주화하기 어려운, 말하자면 경계 위의 회화를 예시해준다. 어쩌면 그림을 추상과 구상, 추상과 형상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구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을 수도 있다. 여하한 경우에도 그림은 어쩔 수 없이 담론(예컨대 모더니즘 패러다임과 같은, 형식주의 예술론과 같은)을 넘어선다는, 그러므로 담론 밖에 있다는 사실도 주지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이 전시를 통해 추상이 재정의되었다고 하기보다는 재정의를 위한 논의의 장을 마련해놓고 있다는 생각이다. 존 버거는 다르게 보기를 제안하는 것에서 예술의 존재 의미를 찾는다. 그렇게 이번 전시가 추상을 다시 보게 만드는, 다르게 보게 만드는(이를테면 삶을 반영하는 추상, 존재를 증명하는 추상, 삶과 결부된 추상) 계기가 되고 있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