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엘/ 사랑의 연대, 소외된 시대에 보내는 메시지
고충환 | 미술평론가
예술은 언어다. 소리를, 색을, 때로 몸짓을 통해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감정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예술 언어는 정해진 형식이 따로 없다는 점에서 비정형적이다. 예술 언어는 정상적인 언어와는 다른 방법으로 언어를 표현하고 의미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비정상적이다. 여기에 예술 언어는 행간과 사이와 이면을 파고든다는 점에서 보통 언어의 표면적인 의미를 넘어선다. 그렇게 예술 언어의 의미는 열려있다(움베르토 에코). 여기에 작가 박엘은, 색은 나의 언어이고 감정은 나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색이라는 언어로 세상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언어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하이데거는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가 그의 인격을 결정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이라는, 특히 색이라는 언어를 도구로 작가가 어떤 회화적 인격체(모든 그림은 작가 저마다의 자화상이다)를 표현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형상화 과정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볼 일이다.
표면적으로 작가의 작품(그러므로 언어)은 추상미술처럼 보인다. 아마도 추상미술의 세대 감정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추구하는 추상미술의 미술사적 배경은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인가. 어느 정도는 점, 선, 면, 색채, 양감, 그리고 질감과 같은 형식 요소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회화라고 보는 모더니즘 패러다임으로부터, 그리고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이다, 라는, 그러므로 그림은 형식의 소산이지 의미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프랭크 스텔라의 동어반복으로부터 왔을 것이다(작가의 그림은 형식적인 요소가 강하다). 회화적 평면 그러므로 평면성을 강조한 클레멘테 그린버그의 환원주의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작가의 그림에서는 평면성이 강조된다). 그런가 하면 그 자체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추상미술은 없다는 전언으로 혹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간과하고 있을지도 모를 부분을 지적한 게르하르트 리히터에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작가의 그림은 추상미술이면서도 의미를 매개한다. 혹은 기호처럼 의미를 표상한다).
작가는 지난 수년간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 체류하면서 지중해의 자연과 색채에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 감명은 특히 부드럽고 우호적인, 밝고 화사한, 때로 투명한 깊이 속에 빛의 기미를 내장하고 있는 에메랄드 물빛과 같은, 그림 속 색채로 남았다. 작가 개인적으로도 그리움을 부르는 색채감정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는 추상미술과 함께 특히 색채감정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예술은 표현이고, 회화에서는 색채가 곧 표현이라는, 색채 주의자 마티스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는 추상적 평면과 함께 색채감정이 강조된다. 모더니즘 패러다임에서처럼 순수추상으로 환원하거나 한정된다기보다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전언에서처럼 의미를 매개하는 추상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고, 의미를 표상하는 추상으로 귀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이 어떤 추상의 결을 취하고 있는지 그 과정과 구조를, 그리고 그 과정과 구조가 어떤 의미를 표상하는지 볼 일이다.
한눈에도 작가의 그림은 단순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런저런 과정이 중첩되고 포개지면서 하나의 화면을 만든다. 칠하고, 뿌리고, 긁어내고, 물로 씻어내는, 그리고 여기에 테이프를 붙이고 떼어내는 반복과정을 보여준다. 크게는 일정한 순서를 따르는 것이겠지만, 그때그때 상황을 봐가며 더러 순서가 뒤바뀌기도 수정되기도 할 것이다. 매번 독립적인 과정으로서보다는 과정 간 상호작용하면서 유기적인 전체를 일구는 방식과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지우고 덧그리기가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뭔가를 치열하게 찾고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변증법적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드러난 작가의 그림은 크게 이중구조(겹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드리핑 된 화면과 일종의 망 구조가 하나의 화면으로 중첩돼 있다. 망을 통해 그 이면에 드리핑 된 비정형의 얼룩을 엿볼 수 있는 것. 엄밀하게는 삼중구조라고 해야 할 것인데, 망 뒤편으로 드리핑 된 화면과 함께 빗살무늬 토기나 기와 파편을 연상시키는 돋을새김 된 화면이 보인다. 아마도 테이프를 붙이고, 칠하고, 긁어내고, 재차 테이프를 떼어내는 유기적인 과정으로 얻어진 결과일 것이다. 그렇게 돋을새김 된 화면이 전통에의 관심과 생활감정을 반영하고 있다면, 비정형의 얼룩은 우연에 맡겨진 삶이 겪는 상처를 의미할 것이다. 반면, 기하학적 패턴을 보여주고 있는 망 구조는 계획적이고 의도적이고 필연적인 삶의 의지를 표상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에 나타난 이중구조는 그대로 삶의 이중구조, 다르게 말하자면 삶의 양가성에 대한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우연과 필연이 대비되는. 우연적인 삶과 삶의 의지가 대비되는. 삶의 의지와 삶의 의지가 억압하고 있는 상처가 대비되는. 나아가 개별주체로 치자면, 사회적 주체(페르소나)와 억압된 자기(아이덴티티)가 대비되는. 이로써 작가의 그림(그러므로 그림으로 나타난 작가의 회화적 인격체)은 추상 언어를 빌려 우연한 삶과 삶의 의지가 대비되는, 우연과 필연이 대비되는 삶의 본질을, 존재의 본성을 표상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이제 작가의 그림에서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그러므로 가장 강력한 형식적 특징에 해당할 망 구조를 보자. 그림을 가만히 보면, 십자가 형태의 모나드(최소한의 단위원소)가 밑도 끝도 없이 연결되면서 하나로 연이어진 일종의 그물망 구조가 화면 전체를 뒤덮고 있다. 모나드가 반복 재생산되면서 하나의 통일된 패턴을 이루는 경우를 모듈 구조라고 한다. 정형 모듈이다. 반면,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반복적이지만 균일하지는 않은 패턴을 만드는 경우가 비정형 모듈에 해당한다. 아마도 패턴을 만들면서도, 패턴에 움직임과 리듬 그리고 내적 울림(그 자체 패턴과 구조로 나타난 그림의 형식과 작가 간 상호작용을 증거 한다고 해도 좋을)과 같은, 유기적인 생명력과도 같은 어떤 성질을 부여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십자가인가. 아마도 십자가로 표상되는 사랑을 의미할 것이다. 십자가의 형태가 꼭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사람 형상 같다. 그리고 십자가와 십자가가 연결된 것이 꼭 사람과 사람이 손을 맞잡고 서 있는 것도 같다. 아마도 사랑을 매개로 한 연대, 그러므로 사랑의 연대를 의미할 것이다. 비정형의 얼룩과 우연한 스크래치로 표상되는 삶의 상처가 아무리 크다 해도 사랑의 연대가 갖는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망 자체를 보면, 네트워크를 의미하고, 관계의 망을 의미하고, 소통의 망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소셜 미디어로 나타난 시대 감정을 반영할 것이다.
혹자는 소셜 미디어가 보편화된 현실에도 불구하고 정작 관계도 없고 소통도 없는, 오히려 소외와 자기소외가 일반화된 시대적 현실에 대한 역설적인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그런 시대적 현실에 대해 치유와 위로의 손길을 내미는 제스처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망 자체에는 불교에서의 인드라망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다. 밑도 끝도 없이 연결된 유리구슬 그물로서, 나는 너를 반영하고 너는 나를 반영한다는, 그렇게 존재와 존재가 서로 반영하고 반영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아마도 이런 망 구조를 통해서 작가는 사랑의 연대와 함께, 그리고 타자에 대한 이해와 함께, 소외된 관계의 회복을 제안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그림을 가만히 보면, 희붐한 빛의 기미와 함께, 그림 속에 하트 모양과 같은, 얼굴 형태와 같은, 사람의 형상과 같은 실루엣이 숨어있다. 비록 숨은그림찾기에서처럼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 자체 빛의 흐름이라고 해도 좋고, 빛의 형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 또 다른 치유와 위로의 계기를 마련해놓고 있다. 아마도 숨겨진 상처와 같은 숨은 의미에 대해서는 타자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해서만 비로소, 겨우, 자기를 열어 보인다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