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원, 전광영/ 원형적인 이미지, 어른거리는 빛과 약재의 향기 


고충환 | 미술평론가


빛의 질감으로부터, 원형적인 이미지 

지금은 그렇지도 않지만, 1950, 60년대 한국현대미술 초기만 해도 작가 중심의 주요 그룹 운동이 미술계를 선도하는 분위기였다. 이런저런 그룹이 있었지만, 그중 그룹 악튀엘(1962년 창립)과 그룹 오리진(1962년 창립), 그리고 그룹 A.G(1989년 창립)의 존재가 주목된다. 그룹 악튀엘이 앵포르멜 경향의 추상표현주의를 지향했다면, 그룹 오리진은 엄정한 화면 구성에 바탕을 둔 기하 추상을 추구한 것이 다른 점이다. 이를 두고 혹자는 소위 뜨거운 추상과 차가운 추상의 경향이 상호 대비되면서 건강한 긴장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회화적 도구로서 각 파토스가 강한 경향과 에토스 위주의 경향이 대비되는 것으로 비교 분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세부적인 차이를 도외시하고 본다면, 동시대 추상 화단의 두 경향, 이를테면 프리 페인팅과 기하 추상을 위한 초석이 마련된 시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그룹 악튀엘과 그룹 오리진이 주로 회화적 평면 안에서 추상회화의 가능성을 타진했다면, 그룹 A.G는 개념미술과 행위예술 그리고 설치미술과 같은 소위 탈회화를 표방하면서 현대미술의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 다른 점이다. 

그중 서승원은 각 그룹 오리진에도, 그리고 그룹 A.G에도 창립 멤버로서 참여하고 활동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만큼, 한국현대미술 형성기에 중추적인 역할을 도맡아 했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작가가 시행 초기부터 자신의 회화적 정체성을 위해 제안(1967년)한 이후 현재에 연이어지고 있는 주요 개념이 동시성이다. 동시성 개념의 정립과 변주, 확장과 심화를 평생 회화의 과업으로 스스로 부과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작가가 의미하는 동시성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동시성이란, 형태와 색채 그리고 공간(일차적으로는 회화적 공간을,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작품이 놓이는 공간과의 관계를 의미하는)이 똑같은 가치를 얻으면서 발현되는 것, 그렇게 균일(그리고 균질)한 가치 발현과 더불어 하나의 화면 속에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에 차이는 있지만,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과 같은 형식요소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회화라고 보는, 소위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대한 작가 식의 반응과 해석과 적용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형식논리와 함께, 어쩌면 더 결정적인 의미로, 동시성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가청적인 것과 비가청적인 것, 보고 들을 수 있는 존재 방식을 가진 것들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들, 이를테면 빛과 공기와 바람과 같은 것들, 그리고 그것들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적인 경험과 같은, 비물직적인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하나의 화면 속에 공존하면서 암시되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가시적인 것은 비가시적인 것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러므로 예술을 암시의 기술이라고 했는데, 그처럼 암시의 기술을 실현한 경우라고 해도 좋다. 여기에 동시성은 다른 계가 하나의 층위로 포개지면서 공존하는 평행계(평행세계)를 의미할 수도 있겠다. 돌이켜보면, 당시에 어떻게 이런 개념을, 그러므로 동시대적 담론을 예견하고 있는 듯한 개념을 생각할 수 있었는지 놀라운 부분이 없지도 않다.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이 동시에 발현되는 현상 혹은 현실 정도로 정리를 할 수가 있을 것인데, 그 발상에 대해서는 아마도 작가의 평소 생활감정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정작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격자 문양의 문창살 위에 붙인 창호지를 투과해 어른거리는 햇빛과 달빛에서, 그 투명하고 맑은 빛의 질감에서, 그 질감이 불러일으키는 운율과 내적 울림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흰 옷감과 이불보와 같은 빨래를 널 때, 하얀 천을 흔드는 바람과 흰 천을 투과해 보이는 은근한 빛의 질감에서 온 것이라고도 했다. 아마도 작가가 자신의 유년에서 찾아낸 원형적인 기억일 것이고, 원형적인 이미지에 해당할 것이다. 실제로도 크고 작은 사각형들이 희붐하게 경계를 허물면서 서로 포개지거나 잇대어진 그림의 형태를, 연노랑 빛과 하늘색 빛, 연분홍빛과 살 색과 같은, 부드럽고 우호적인 빛의 질감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색채감정을, 그러므로 그림의 유래와 근원을 설명해주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에 작가는 최근 들어 무념과 침묵의 세계를 생각한다고도 했는데, 이런 원형적인 이미지와도 그 결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약재로부터, 치유하는 이미지 

이처럼 문창살에 덧바른 창호지를 통해 본, 마치 계를 나누면서 통하게 하는 것 같은 반투명한 막을 통해 본, 어른거리는 빛의 질감이 서승원 작가의 원형적 이미지에 해당한다면, 정광영 작가의 원형적 이미지는 한약방의 추억으로부터 온다. 작가의 유년 시절 큰아버지는 한약방을 했고, 한지에 각종 약재를 싸서 보관해놓은 정경이, 약재에서 나는 향기가 작가의 기억에 남았다. 모더니즘 소설의 효시로 알려진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은 마들렌 과자를 깨물 때 나는 소리와 맛과 향을 매개로 마치 타임머신이라도 타듯 과거로 되돌아간다. 여기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라는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라는 제목 그대로 잃어버린 자기를 찾아서, 그러므로 어쩌면 원형적인 이미지(자기)를 찾아서, 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그러므로 원형적인 이미지에는 잃어버린 자기를 소환하고, 상실된 자기와 대면하는 자기반성적인 측면이 있다. 

흥미롭게도 전광영 작가의 이번 전시 주제에 시간이 들어있다. Time Blossom이 그것으로, 시간의 꽃, 혹은 시간을 꽃 피우다, 정도를 의미하겠다. 어떻게 이런 주제설정이 이루어졌는지 자세한 경위를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작가의 작업에 이미 시간 개념이 함축돼 있다는 의미일 수 있겠고, 작가 스스로 자신이 지나쳐온 길 그러므로 시간을 되돌아본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작가의 작업에 이미 시간 개념이 함축돼 있다? 작가의 작업은 어쩌면 그 자체 형태도 색깔도 없는 시간에 몸을 부여해준 것이고, 그런 만큼 시간을 형상화한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작가의 작업이 어떻게 시간을 형상화하는지 볼 일이다. 그 이전에 우선, 작가의 작업은 수많은 단위원소(모나드)가 모여 하나의 작품을 일구는 집적구조가 특징이다. 다르게는 모듈 중에서도 비정형 모듈 구조를 취하고 있다. 보통의 모듈 그러므로 정형 모듈 구조가 하나의 단위원소가 반복되면서 패턴을 만드는 경우라고 한다면, 작가의 작업에서처럼 크기도 형태도 제각각인 단위원소가 집적된 경우, 그래서 한눈에 들어오는 패턴과는 비교되는 우연적인 형상을 만드는 경우가 비정형 모듈 구조에 해당한다. 비정형인 만큼, 우연적인 형상에 대해 열린 구조를 취하고 있는 만큼 평면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렇지만, 평면과 저부조, 입체와 설치, 아상블라주와 오브제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우르는, 유연한 작업과 가변적인 전시공학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다. 

작가는 이 단위원소 그러므로 모나드 하나하나를 고서로 감싸고 실로 묶는다. 그리고 형태를 한자리에 집적시켜 평면을 만들고, 입체를 만든다. 그리고 작품을 감물, 먹, 황토, 쑥, 인디고, 홍화, 울금, 석류 껍질, 연지와 같은 천연염료로 물들이는데, 그중에는 실제 약재도 있어서 치유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실제로 치유한다기보다는, 정서적인 공감을 통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예술의 존재 의미를 표상한다고 보면 되겠다. 여기서 낱낱의 형태를 감싸고 있는 고서는 책이다. 모든 책이 그렇지만, 특히 고서는 시간의 집이다. 시간이, 사건이, 역사가, 일화가,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도록 박제해 놓은 집이다, 요새로 치자면 데이트베이스라고 해야 할까. 여기에 실 역시 전통적으로 시간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형태를 시간으로 싸고, 다시 시간으로 묶어서 보존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시간을 보존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작가만의 방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시간을 조형한 두 가지 버전의 작업을, 그러므로 어쩌면 시간의 두 유형을 제안한다. 평면 위로 돌출된, 색깔마저 울긋불긋한, 한눈에도 동적인 형태의 작업이 꽃 피운다는 의미의 제목처럼 시간이 막 생성되는 현장(현상)을 떠올리게 만든다. 반면, 모를 심듯 모나드 하나하나를 틈이 없이 채워 넣어 돌출된 형태가 없는 평면적인 작업이, 여기에 색깔 역시 은근하게 스며들면서 깊이를 만드는 물색의 화면이 정적인 느낌을 주면서, 마치 물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같은, 시간이 숨을 쉬는 것 같은, 내면적이고 관조적인 시간 경험으로 유도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생성되는 시간과 관조하는 시간 앞에 서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