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덕/ 존재, 순간을 사는, 지속을 사는, 그리고 반복을 사는 


고충환 | 미술평론가


경계 위의 회화, 추상과 구상, 추상과 형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아우르는. 

2025년 이응노미술관은 여성과 추상을 전시 키워드로 삼고 있다고 했다. 관련해서 평생 추상 작업에 진력해온 신중덕 작가를 초대 전시한다고 했다. 작가의 작업이 고암 이응노의 추상 정신에도 부합한다고 보고, 이번 전시를 계기로 평소 작업에 임하는 작가의 태도를 평가하고 재조명한다고도 했다. 

추상미술과 관련한 작가의 세대 감정은 아마도 형식주의와 환원주의 그러므로 형식적 환원주의에 대한 공감으로부터 비롯했을 것이다. 원래 형식주의와 추상성 논의는 미술보다 음악에서 먼저 시작된 것이지만(진즉에 음악은 엄정한 학문인 수학에 기반한 고도의 추상적인 예술로 받아들여졌다), 미술에서는 이보다 뒤늦은 20c 초 소위 모더니즘 패러다임으로 정식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점, 선, 면, 색채, 양감, 질감과 같은 형식요소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회화라고 보는 태도가 그렇다. 여기에 색면화파를 창시한 것으로도 알려진 클레멘테 그린버그의 평면성 개념이 가세한다(그린버그는 평면성으로의 환원으로부터, 그러므로 일종의 작은 평면이랄 수 있는 중첩된 터치로 그린 인상파로부터 현대미술이 비롯했다고 본다). 이런 모더니즘 패러다임에 방점을 찍은 것이 프랭크 스텔라의 전언이다.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이다, 라는 동어반복이 그것으로, 그림은 형식요소와 형식논리의 산물이지, 다른 무언가를 지시하는 의미, 기호, 상징, 표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그림은 의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피에르 부르디외는 이처럼 의미와 상관없는 추상미술을 장식미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과연 그럴까. 그래서 의미 없는 회화, 형식만으로 자족적인 회화가 가능해진 것일까. 돌이켜보면 추상미술을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칸딘스키도 사실은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그런 만큼 음률과 화음과 같은 소리 그러므로 감각을 재현을 위한 도구로 삼았다. 여기에 회화란 가시적인 것을 통해서 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내는 암시의 기술이라고 한 파울 클레의 입장은 또한 어떤가. 나아가 몬드리안의 색면구성 회화가 원래 나무를 추상화하는 과정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각 소리를 재현하고(그렇게 시각과 청각이 하나로 통하는, 나아가 모든 감각이 하나로 통하는 공감각의 길을 열고), 비가시적인 것을 재현하고, 나무와 같은 사물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추상미술이 유래했다. 

그래서일까.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추상 그러므로 의미 없는 추상은 없다고 했다. 모더니즘 패러다임이 간과하고 있는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그러므로 다시, 칸딘스키도 사실은 형식요소를 정신적인 것의 표상으로 봤고, 몬드리안도 신비주의(지금으로 치자면 영성주의)에 심취한 것을 보면 추상미술은 회화를 형식요소로 환원하고 한정한 것이라기보다는 감각적인, 정신적인, 영적인, 그리고 비가시적인 것들(아리스토텔레스는 비가시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것을 유령이라고 불렀다)을 재현하는 것으로 회화의 가능성을 확장한 경우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다시, 작가의 작업으로 돌아가 보자. 작가의 작업은 화면 내에서의 형식요소를 구성하는 형식논리가 강하다는 점에서, 여기에 시종 평면성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 패러다임의 영향권 내에 있다. 그러면서도 평면 위에 이런저런 재현적인 형태를 올려놓고 있다는 점에서(후기로 가면서 더 뚜렷해지는 것이지만) 추상미술에 의미를 결부하고 있다. 추상적인 평면과 재현적인 모티브가 하나의 화면에 공존하면서 재현적인 회화와 추상적인 회화 간 긴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추상미술을 견지하면서도 그 자장 내에 일상을, 삶의 현실을, 존재에 대한 성찰을 끌어들이는 의미론적 추상을 꾀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형식주의로 나타난 모더니스트로서의 면모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형식을 의미와 결부시키는 방법으로 반 혹은 탈 모더니즘을 실천하는, 그렇게 궁극적으로는 모더니즘 패러다임(모더니즘적 추상)을 확장하는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주제와 형식으로 본 작가의 작업 

보통 추상에는 주제가 없거나 있어도 무의미한 경우가 많다. 추상 그러므로 그림을 의미와는 무관한 형식논리의 산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더욱이 작가에게서 보듯이 추상을 단순한 형식논리를 넘어서는 의미의 표상으로 보는 경우라면 문제는 다르다. 주제가 평소 작가가 지향하는 세계관, 우주관, 자연관, 회화관과 같은 관념을 함축하고, 그 관념을 뒷받침하는 인문학적 배경이 되어주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게 지금까지 작가가 제안한 주제를 일별해보면 자기 회귀, 영광송, 생명률, 그리고 만화경으로 이어진다. 작가의 관심사를 반영한 것이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서로 물고 물리면서(겹치면서) 유기적인 전체를 일구는, 그렇게 작가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특히 영광송과 생명률이 그런데, 존재의 존재 방식 그러므로 생명 원리(생명윤리라고 해도 좋을)를 각 신성(다르게는 영성)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풀어낸 것이 그렇다. 당연히 형식변화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인데, 전시 주최 측에서 제안하고 있는 물질(주제로 치자면 자기 회귀에 해당하는)에서 공간(각 영광송과 생명률)으로 그리고 재차 시간(만화경)으로 연이어진 구분에 공감이 가는 편이다. 

자기 회귀(1987_1989, Self_recurrence) 

자기에게로 되돌아간다. 자기를 회복한다. 자기를 되찾는다. 잃어버린 자기를 찾아서 길을 나선다. 존재는 반복된다는 의미의, 니체의 영겁회귀(불교에서의 윤회)에서 온 말이기도 하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것으로 예술은 이야기 그러므로 서사의 기술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당연히 삶을 이야기하고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중 자기 회귀 그러므로 진정한 자기(다시, 불교로 치자면, 진아)를 찾아서 길을 나서는 것은 모든 이야기가 유래한 이야기, 이야기들의 이야기, 그러므로 원형적인 이야기에 해당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존재다움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존재다움은 소여 된 것, 그러므로 처음부터 저절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지향해서 성취하고 도달해야 할 궁극이란 점에서 실존(주의)적이다. 존재를 상실하고, 정체성을 상실하고, 자기를 상실한 시대에 울림이 큰 주제이기도 하다. 

평소 작가의 존재론적 관심사를 반영한 것이겠지만, 추상미술에 바탕을 둔 모더니스트답게 작가는 그 관심사를 회화적인 문제에서 찾고, 회화 자체의 문제로 되돌려놓는다. 회화의 궁극은 뭔지, 회화의 회화다움은 뭔지를 묻는 것인데, 회화를 통해서 회화를 묻는 것이란 점에서 메타 회화(그 자체 비평적 기능을 일부 포함하고 있는)를 형식 실험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하는가. 주지하다시피 캔버스는 날실과 씨실이 촘촘하게 직조된 구조를 하고 있다. 여기서 작가는 그 직조 구조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데, 캔버스의 바탕을 이루는 천에 무수한 칼질을 가해, 또 다른 평면으로 환원한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잘게 저민 화포 위에 긁기, 뿌리기, 흘리기, 칠하기와 같은 격렬한 행위를 부가한 것이다. 1)
 
작가가 나이프 드로잉이라고 부르는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캔버스의 원래 평면은 또 다른 평면으로 거듭난다. 회화를 매개로 한 자기 회귀라는 주제를 적용해 본다면, 캔버스로 나타난 인공적인 물질(물체)을 원래의 천이라는 성분으로 되돌려놓은 것이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회화적 평면을 창출해 물성과 평면성의 강조로 나타난 모더니즘적 형식주의를 실험한 것이다. 물성에 대한 간섭과 변화가 매개되고 있지만, 크게 보면 캔버스 자체(캔버스의 구조와 물성, 그리고 평면성의 조건)를 회화를 위한 도구로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르테포베라(가난한 미술이라기보다는 최소한의 미술을 의미하는)와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부분도 있다. 
물성(앵포르멜 경향의 추상회화에서 집중적으로 형식 실험되고 있는)에 대한 관심사는 당시 추상미술 작가들에게서 곧잘 확인되는 것이지만, 이처럼 캔버스 천 자체를 해체하고 재구성한 경우는, 그렇게 또 다른 평면을 창출하고 제안한 경우는 드문 경우여서 주목이 되고, 그런 만큼 미술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마도 자기를 자기에게로 되돌려놓는다는 의미의 자기 회귀라는 존재론적 주제를 회화를 회화로, 물성을 물성으로, 평면을 평면으로 되돌려놓는다는, 그렇게 본래의 저 자신에게로 되돌려놓는다는 의미의 동어반복으로 풀어낸 경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제안된 또 다른 평면 조건은 모더니즘 형식주의에 대한 작가의 반응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 존재(자기 회귀 그러므로 존재다움을 회복한 존재)의 메타포로 제안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영광송(1991_1994, Doxology)과 생명률(2002_2011, The Rhythm of Life) 

기독교에서 삼위일체의 영광을 찬미하는 기도문을 영광송이라고 한다. 작가의 개인적인 종교적 신념을 주제화한 것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한 본성으로서의 신성(다르게는 영성)을 함의하고 있을 것이다. 관련해서 작가는 순수회화는 신성을 지녀야 하고, 절대 이성(진리)의 감각적 외화이어야 한다고 했다. 특히 지금과 같은 다원주의 시대에 예술은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어야 하고, 모든 것을 꿰뚫는 우주의 체계를 정립하는 행위이어야 한다고 했다. 탄생과 소멸의 우주적 순환 고리를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일이어야 한다고도 했는데, 2) 이 부분이 영광송으로 대변되는 존재의 신성과 생명률로 나타난 존재의 생명 원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예술은 절대 이성 그러므로 진리를 드러내는 감각적 도구(외화)여야 한다는 대목이 의미심장하다. 관련해서 하이데거는 진리를 과학적 진리와 예술적 진리로 구분한다. 과학적 진리는 증명 가능한 진리를 말하고, 예술적 진리는 증명 불가능한 진리를 말한다. 이처럼 증명 불가능한 것이지만, 과학적 진리가 미치지 못하는 더 깊은 진리를 드러낸다. 이처럼 증명 불가능한 진리, 애초에 증명의 대상도 아니면서 더 깊은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예술이다. 

그렇게 예술은 신성의 표상 형식이 된다. 굳이 신성이 아니더라도 예술은 가시적인 것을 통해 비가시적인 것을 드러내는 암시의 기술이라고 한 파울 클레의 말에 나타난 비가시적인 것의 표상 형식이 된다. 앞서 말했듯,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가시적인 존재 방식을 가진 것을 유령이라고 불렀는데, 그런 유령의 표상이기도 하고, 도처에 편재하면서 숨은 신(루시앙 골드만)의 표상이기도 하고, 원래는 먼 것인데 실제로는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감각경험을 의미하는 아우라(발터 벤야민)의 표상 형식이기도 할 것이다. 의미론적으로 볼 때 그렇고, 형식적으로는 삼위일체 대신 형식과 내용의 이위일체 그러므로 그림에서 형식과 내용이 하나라고 보는, 형식이 내용이고 내용이 곧 형식이라고 보는 모더니즘 형식주의의 형식논리를 반영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예술은 인간의 한 본성으로서의 신성을 드러내는 표상이 된다(영광송으로부터). 그리고 또 다른 한 본성으로서의 생명을 드러내는 표상이기도 하다(생명률로부터). 관련해서 작가는 생명은 초물질성과 자기 회귀성을 본질로 한다고 적고 있는데,3) 여기서 초물질성은 아마도 신성을 의미할 것이고, 자기 회귀성은 존재의 존재다움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 회귀로 나타난 전번 주제를 소환하는데, 앞서 말했듯 작가의 작업에서 주제는 서로 구분되면서 하나로 통하는 유기적 전체를 이루고 있다고 보아야 하고, 그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추구하는 생명은 어디서 어떻게 오는가. 흔히 그렇듯 작가 역시 자연에서 생명을 찾는다. 자연이 내재하고 있는 생명력 그러므로 자연의 본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작가는 무질서와 우연성에서 생명력을 보고, 자연의 본성을 본다. 자연현상에 바탕 한 불규칙하고 우연한 형태에서 생명을 찾는데, 건강한 생명력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분출을 통한 자기실현으로 나타난 디오니소스적 충동(흔히 생명력의 전형으로 알려진)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의미론적으로 그렇고, 형식을 보면, 자연 모티브를 변형하는 방법으로 추상미술의 가능성을 연, 초현실주의에 바탕을 둔 호안 미로와 아실 고르키의 바이오모르픽아트(생태유기추상)와의 형태적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림을 보면, 이 시기 작가의 화면에 나타난 형식적 특징으로 수도 없이 분할된 크고 작은 면들이 포개지면서 화면을 채우고 있는 면 분할 기법이 주목된다. 사실은 모과를 자른 단면이라고 했다. 모과의 단면을 화면에 대고 찍어낸 것이라고 했다. 그런 만큼 기법적으로 공판법과도, 콜라주와 데콜라주와도, 그리고 이를 통한 회화의 확장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처음에는 정직하게 찍어내는 방법으로부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 점차 찍기와 그리기를 병행하는 것으로 변화했을 것이다. 모티브 자체도 모과라고는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 이런저런 꽃잎을 연상시키기도 하고(어떤 그림은 벚꽃 천지를 떠올리게도 한다), 종래에는 모티브의 출처가 무의미해지는 추상적인 형태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은 자연 모티브를 추상화한 생태유기추상의 형태를, 화면을, 회화를 열어놓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부분이 왜 면 분할인가, 하는 것이다. 그림을 보면, 최초 격자무늬가 있고, 모과의 단면이 격자의 크기에 맞춰 절단된 형태로 들어있기도 하고, 더러 격자 밖으로 확장되면서 경계가 지워진 부분도 있다(종래에는 이마저도 해체되고 재구성되면서 자유자재한 지경에 이르지만). 아마도 격자무늬를 통해서 질서 의식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비정형과 우연에 가까운 모과의 형태를 통해서는 무질서가 갖는 생명력을 표상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명력을 매개로 한 질서와 무질서의 상호작용과 영향 관계를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에 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인 관계 아래 놓이는 전통적인 관념을 반영할 것이다(질서 의식을 강조한 경우). 아니면 부분은 부분일 뿐 전체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보는, 부분 자체가 이미 자족적인 전체라고 보는 동시대적 관념을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개별 존재의 생명력을 강조한 경우). 나아가 면과 면이 모여 전체를 일구는 화면이 비정형 모듈 구조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하나의 모나드(원소, 단자)가 반복되면서 패턴을 만드는 것을 모듈 구조라 하고, 정형 모듈 구조라 한다. 반면, 작가의 그림에서처럼 반복되지만, 비정형 패턴을 만드는 경우가 비정형 모듈 구조에 해당한다. 

그렇게 작가는 각 영광송과 생명률 연작을 빌려 반복을 통한 질서 의식을 끌어들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비정형을 통해서 개별 존재의 생명력을 강조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전통적으로 질서는 신성의 표상 형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여기에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으로 나타난 또 다른 성정을 통해서 존재의 본성(각 신성과 생명력으로 나타난)을 증거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만화경(2011_2025, Kaleidoscope)  

만화경. 19세기 초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가 발명한, 아름다운 형상을 관찰할 수 있는 기구라고 했다. 천변만화한 형상과 이미지, 그러므로 밑도 끝도 없이 변하는 형상과 이미지가 인간의 감각을 이미지가 온통 장악한 이미지 시대의 담론들, 이를테면 이미지 현상학과 이미지 정치학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단서가 되어주는 기구다.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전언 이후 인간은, 존재는, 생명은 항상적으로 변화하는 와중에 있고, 이행하는 도중에 있다. 매 순간 새로운 생성이 있지만(같은 순간이 없으므로),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전면적인 소멸을 향해, 그러므로 엔트로피 지수(불확실성과 무질서 지수)가 증가하는 쪽으로 이행하고 있다. 그런 변화와 이행을 추동하는 원인이 여럿 있지만, 그중 결정적인 것이 시간이다. 그렇게 시간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존재는, 생명은 없다. 그러므로 만화경은 덧없는 삶의 알레고리로도 유용하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그러므로 감각적 이미지에 현혹되지 말라는 불교의 주문과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다시, 그러므로 감각적 이미지가 유혹하는 시대에, 불안과 불안정성이 현대인의 징후며 증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만화경이란 주제는 여러 면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관련해서 작가는, 어느 날 나는 모든 것이 어느 차원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변화한다는 것을 돌연 깨달았다고 했다.4) 연결 그러므로 연기의 이치와 상호의존적 존재성을 시사하는 말이고, 향후 작업의 지향이 사물의 존재성에서 사물의 관계성으로 이행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생명에 대한 고찰을 시사하기도 할 것이다. 무한한 시간 속에서 생명의 순환을 일깨우는 한편으로,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놓기도 할 것이다(여기서 다시, 전번 주제가 소환되고 포개진다). 

다시, 관련해서 작가는 우주의 모든 현상은 본질적으로 무질서한 방향으로 진행된다. 부단한 현실과의 만남 즉 엔트로피의 증가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싶다.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선 더 큰 무질서를 만들어내야 한다고도 했다.5)

 질서를 전제로 한 무질서를 말하고 있는 것인데, 앞서 봤던, 질서 의식과 우연하고 무분별한 생명력을 대비시킨 주제 의식을 재소환하면서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연결 그러므로 관계에 대한 언급이 불교의 인드라망을 떠올리게 한다. 존재와 존재는 서로 반영하고 반영되는 유리구슬 망으로 밑도 끝도 없이 연결돼 있다. 그러므로 네가 없는 나는 없고, 내가 없이 네가 있을 수가 없다. 다시, 그러므로 나는 타자다, 다름 아닌 내가 타자다, 라고 선언하는 타자론에도 이어지는 부분이 있고, 소셜네트워크로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 초연결 시대를 선취하는 부분도 있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처럼 만화경으로 표상되는 변화, 관계, 연결, 시간, 차원, 그리고 불연속성(전체로 환원되지 않는 부분, 그 자체 자족적인 전체로서의 부분 개념이 확대 재생산된)의 개념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이 시기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특이한 점으로 마치 종이에 먹지를 대고 꾹꾹 눌러 그린 것 같은 가녀린 선묘가 주목된다. 알만한 모티브를 최소한의 실루엣으로 환원한 연후에 그 가장자리 선을 따라 그린 그림을 생각하면 되겠다. 대개 이중 삼중으로 포개져 그린 선묘로 인해 사람의 신체나 나무 등 그림 속 모티브가 마치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흔들리는? 그러므로 중심을 상실한 사람들, 흔들리는 사람들, 부유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표상한다고 해도 좋다. 포개진 선묘, 엄밀하게는 나란히 평행선을 그리면서 중첩된 선묘가 시간의 차이와 간격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존재의 꼴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항상적으로 변화하고 있고, 이행하고 있다. 그렇게 변화하는, 이행하는 존재의 꼴을 그려놓고 있다고 해도 좋다.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이미 과거지사가 된 존재의 꼴과 현재의 꼴이 하나의 결로 겹쳐 보이는 순간을, 그러므로 지속되는 순간을 그려놓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렇게 차원과 차원이 겹쳐 보이는 순간을 포착해 그린 것이라고 해도 좋다. 이 차원에서 저 차원으로 건너가는 관문이 잠시 열리는 순간을 그린 것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차원과 차원, 세계와 세계가 공존하는, 그렇게 혹 다른 차원, 다른 세계에 또 다른 내가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평행세계를 그려놓고 있다고 해도 좋다(실제로도 보르헤스는 소설에서 현재의 내가 과거의 자신과 만나는 현실을 그려놓고 있기도 하다). 그렇게 다른 차원으로 열린 관문을, 틈새를 그려놓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리고 이 시기에 해당하는 그림에 나타난 또 다른 특징으로 사실적이고 감각적이고 재현적인 모티브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점이다. 모과, 국화와 수국 같은 꽃과 꽃잎, 나목 그러므로 헐벗은 나무, 조각배, 모래시계, 인체, 석상, 구체관절인형,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각종 도형과 숫자, 뫼비우스의 띠, 입방체, 유영하는 돌, 그리고 계단과 같은 모티브가 그렇다. 그 대략의 의미를 보자면, 모래시계는 시간을(그러므로 덧없는) 의미할 것이다. 계단은 차원에서 차원으로 이동하는 계기를 의미할 것이다. 조각배는 망망대해를 저 홀로 떠가는(그러므로 고독한) 삶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뫼비우스의 띠는 하나로 닫힌 체계 속에서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존재, 순환하는 존재를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무한순환을 반복하면서 결국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려지는 자기 회귀를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여기서 재차 전번 주제가 소환되고 포개진다). 그리고 꽃과 나무는 자연을, 인체는 인간을 표상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알레고리로 풀어낸 것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은 무심하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순환하는 생명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순식간에 피었다가 지는,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벚꽃처럼 순간을 사는 존재를 일깨워주고 있었다. 어쩌면 작가의 그림 전부가 무한반복 되는 존재를 의미하는 니체의 영겁회귀 사상에 대한 작가 식의 반응과 해석으로서 제안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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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진섭, 예술과 통찰, 1992. 
2) 작가 노트. 
3) 작가 노트. 
4) 작가 노트.
5) 작가 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