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과 나를 동시에 변모시키는 기술
이선영(미술평론가)
이수현의 작품은 지하 자원하면 석탄 정도밖에 연상되지 않는 우리나라에도 금속자원을 다루던 전통 기술이 있었음을 환기시킨다. 마을마다 있었을 대장간은 물론, 이제 철물점조차도 찾아보기 힘들만큼 급격한 변화의 물살을 타고 있는 시대에 시간의 시험을 이겨낸 유물에도 빈칸은 많다. 작가는 이 빈칸을 예술적 상상력으로 보충한다. 하지만 재료를 다루는 기술이 뛰어난 그에게 작품을 상상만으로 채우는 것은 만족스럽지 않다. 물론 작가가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재현은 역사가의 몫이다. 굳이 비슷하다면 역사보다는 고고학이다. 새로운 유물이 발견될 때마다 촘촘하게 짜여진 기존의 역사적 그물망은 흔들리며 재맥락화 되곤 한다. 어디선가 뚝 떨어진 운석같은 모습을 한 이수현의 작품은 여러 가닥의 실로 다시 짜여진다. 한국처럼 역사적 단절이 심한 경우에는 선사시대 뿐 아니라, 얼마 전 역사도 고고학적 방식으로 탐구될 수 있다. 역사가 기원과 목적을 단선적으로 연결하여 때로는 역사주의 이데올로기에 빠지기도 한다면, 고고학은 보다 겸손하게 한계를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당대의 과학기술적 역량을 적용하여 성과를 내기도 한다.

붉은 착륙지 전시전경

붉은 착륙지, 울산 쇠부리복원사업에서 발생한 슬래그, 토철, 가변설치, 2025
영상과 설치, 평면과 아카이브 등 여러 방식을 동원하여 서로 보충하는 관계를 이루는 이수현의 작품들은 그 엄격함과 치밀함이 유사(類似) 과학적 면모를 띈다. 작가는 토철을 기반으로 철을 생산하던 달천철장에 대한 자료조사로부터 우주적 상상력으로 뻗어나간다. 토철의 붉은 색감은 화성을 떠올린다. 불과 몇백년 전 역사의 현장이라도 지금은 작가가 가볼 수 없다는 점에서 먼 곳의 별과 다를 바 없다. 과학 기술은 머나먼 우주를 더욱 친숙하게 하기도 했다. 관객들은 그동안 접해온 화성의 이미지 자료를 통해서 이전 시대의 철공 유적에 다가가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붉은 착륙지]라는 제목은 그가 연출한 광경이 화성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붙여진 역설적 제목이다. 창작소에서 진행한 최근 작품의 출발은 작가가 우연히 접한 쇠부리 축제에서 재연된 과거 제철 기술의 찌꺼기들이다. 그가 수집한 실물 찌꺼기는 더 이상 재사용할 수 없는 최종 산물이다. 이 수수께끼의 대상은 복잡한 표면의 굴곡과 형태, 색감 등이 특징이다.
현실은 상상보다 더 상상적일 수 있고, 작가를 사로잡은 상상은 현실화를 이끄는 추동력이 된다. 상상의 뿌리는 현실이다. 현실에 대한 조금의 알리바이라도 있어야 상상은 더욱 활활 타오를 수 있다. 실물 수집과 탐색, 탐구는 작품이 구성되는데 중요한 징검다리가 되며, 과정 자체가 작품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쇠부리 축제에서의 경험에 대해 ‘거대한 가마에서 덩어리들이 하나씩 꺼내져 바닥에 툭툭 내려졌다...불에서 갓 꺼낸 덩어리는 마치 용암처럼 뜨겁고 붉었다...’고 회고한다. 그것들이 서서히 식으면서 만들어진 슬래그는 기기묘묘한 형상으로 작가의 관심을 끌며, 상상의 물꼬를 튼다. 이번 전시에도 ‘과거 달천철장의 토철을 모티프로 직접 제작한 붉은 토철과 쇠부리 복원 사업에서 채집한 슬래그가 주요 재료로 쓰였다’고 밝힌다. 작가가 탐색한 만큼이나 관객도 탐색해야 하는 미지의 풍경이 연출된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와 공원이 들어선 그곳은 불현듯 산화철로 붉게 물든 화성의 표면과 겹쳐진다. 무수한 시공간의 층위는 연결되기도 단절되기도 하지만, 가상적 ‘채굴’을 통해 그만의 맥락으로 재배열된다.

(세부사진) 붉은 착륙지, 울산 쇠부리복원사업에서 발생한 슬래그, 토철, 가변설치, 2025

붉은 착륙지 전시전경

탐사구역지도, 순지에 염색, 아크릴, 93×63cm, 2025
한쪽 벽면에 투사되는 영상과 그 아래에 설치된 작품은 과거 토철이 깔려있던 달천철장 부근을 미지의 행성 표면처럼 연출한 풍경이다. 토철은 지금 수집하기 힘든 재료이기에 산화철과 황토를 혼합해서 직접 제작했다. 전시장 바닥에는 슬래그 수집물들이 자리한다. 거시적 풍경으로 전환된 미시적 풍경은 영상 기기로 가능한 차원의 변주 덕분이다. 이러한 전환은 한 줌의 흙을 산이나 산맥처럼, 돌멩이 하나를 바위나 암벽처럼 변화시킬 수 있다.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관객이 미지의 대륙을 걸으면서 탐사하는 1인칭 시점이다. 1인칭 시점은 작은 범위도 크게 확장 가능하다. [운석채집 기록]은 ‘화성과 같은 미지의 행성을 상상하며, 행성에 흩어진 운석을 채집하고 기록하는 가상의 탐사프로젝트’이다. 작가는 ‘달천철장을 20여 차례 방문하며 발견한 표본들을 행성 곳곳에 떨어진 운석처럼 설정하고, 20개의 각 표본에 대한 가상의 기록을’ 남겼다. 미지의 대상으로부터 출발하며 끝말잇기처럼 이어기는 이야기가 드로잉과 탐사일지에 담겨진다. 전시장 벽면에 자리한 20여 개의 파일은 관객들이 직접 읽고 관찰할 수 있다.
그것들은 마치 신대륙이 ‘발견’되던 르네상스 시대 수집광의 진열장처럼, 현실과 상상이 복합된 수집 선(選)들이다. 문예사조사는 전대미문의 대상에 대한 수집과 분류의 열정으로부터 박물관과 미술관도 생겨났음을 알려준다. 남겨진 사실적 흔적으로부터 출발한 드로잉은 상상이 개입될 여지가 많다. 무엇으로도 환원할 수 없고 이름도 붙일 수 없는 것들은 불규칙적인 구멍들 만큼이나 빈칸(missing link)이 많다. 전시장 벽에는 토철을 포함한 여러 재료를 섞어 ‘화성의 단층을 연상시키는 지층 이미지’를 표현한 4개의 평면 작품을 걸었다. 특이한 질감과 색감을 가진 표면은 소금을 비롯한 비(非)미술적인 재료를 활용하여 만든 이전 작업 노하우가 활용된다. 종유석이나 수정 기둥처럼 이후에 추가된 시간들은 아무도 직접 본적이 없는 영토에 대한 상상으로 자라난다. 그것은 마술과 기술, 예술과 종교 등이 뒤섞인 이전 시대의 연금술과 대장장이의 방식을 연상시킨다. 과학적 실험을 추동한 것은 상상이었으나, 그것을 통해 진보한 실험과학은 상상을 추방했다.

운석채집기록, 탐사기록일지, 슬래그 드로잉. 가변설치, 2025

(세부사진) 운석채집기록, 탐사기록일지, 슬래그 드로잉. 가변설치, 2025

충돌지점, 복합재료, 110×145×185cm, 2025
미술도 그냥 미술에만 한정됐다. 융복합이라는 관념도 있지만,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은 작가만의 도가니를 필요로 한다. 작가는 자신이 넣은 모든 것을 녹여내는 온도에 도달할 수 있어야 원하는 것을 뽑아낼 수 있다. 작가는 연금술사나 대장장이처럼 대상을 다루면서 주체도 다룬다. 종교학자 미르치아 엘리아데는 [대장장이와 연금술사]에서 ‘연금술사는 대장장이, 그리고 도공과 마찬가지로 불의 지배자이다. 그가 물질을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시킬 수 있는 것은 불에 의해서 가능하다. 자연적 열이라면 천천히 숙성시킬 것을 불은 놀라운 속도로 이룩했다’고 말한다. 연금술은 ‘물질뿐 아니라 물질의 완성에 참여하는 인간의 완성을 동시에 가능하게 한다’(엘리아데)는 점에서, 근대의 분과과학과 다르다. 하지만 엘리아데는 연금술이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물질의 본성과 자기 자신을 동시에 탐구한 종합적인 시도였다고 본다.
연금술은 금속의 정련이나 변환을 넘어 우주적 질서에 참여하고자 하는 인간의 영적 행위였다는 것이다. 많은 과학사가들이 인정하듯, 연금술이나 야금술은 현대과학의 출발이었다. 전통적 야금술의 산물로 우주적 풍경을 연출한 이수현의 작품은 ‘천상계의 행성들이 지상계의 물건들에 영향을 미친다'는 대우주와 소우주 간의 유비(analogy)론도 연상시킨다. 모든 것을 모든 것과 연결시키는 상징주의는 전문화된 근대적 패러다임에 의해 사라졌다. 미지의 대상과 만났을 때 기존의 어법과 분류체계로 환원시키는 방식은 거부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 과학 또한 연금술이 비판되었던 상황을 공유한다. 기존의 패러다임이 문제시될 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촉이다. 이때 차이에 대한 감식안이 있는 예술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이때는 설명보다는 묘사를, 사실주의 보다는 자연주의적 방식으로 대상 그자체와 밀착할 필요가 있다. 작품 [충돌 지점]은 어디서 날아온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충돌하는 순간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그의 충돌은 지속해서 해석되어야 할 원초적 사건으로 다가온다.
출전; 울산북구 예술창작소 소금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