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바람의 대지
이선영(미술평론가)
‘대지-好雨知時節(좋은 비는 시절을 알아)’라는 부제를 가진 조병철의 전시는 그림으로 그린 시다. 그것은 두보(杜甫, 712-770)의 시 제목 ‘봄밤에 내린 기쁜 비’(春夜喜雨)의 일부이다. 고대의 시어는 그림으로 시각화됐다. 컴퓨터에 문장을 입력하면 학습된 데이터를 종합하여 그 이미지가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AI 시대에 생생하게 그려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앞으로 더 발전할지는 모르겠지만 문장으로 이미지를 생성하는 것은 (현재로서는) 일러스트에 불과하다. 일러스트와 회화는 다르다. 사진이나 영상 같은 매체의 일상화는 코드화된 시각을 보편화시킨다. 하지만 카메라의 시점이 아닌 육안, 완전히 반복될 수 없는 필촉, 무엇보다도 미묘한 색을 창조하는 화가의 역할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것은 질 들뢰즈가 현대 회화의 가능성을 논하면서 손가락이 아닌 손의 역할을 강조했던 맥락과 같다. 손가락은 단지 시각적 코드를 지정할 따름이지만, 손은 육감과 솜씨를 연결시킨다.

햇살 그리고 바람 60F 유화 2025(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전북도립미술관에 있음)
그림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손수 할 수 있는 영역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조병철의 작품은 자연에 내재한 촉각적인 부분을 촘촘한 붓 터치로 재연한다. 나무나 숲, 논과 밭을 이루는 여러 계열의 녹색 터치는 그 시공간을 향유하는 한 인간의 지각과 기억이 켜켜이 쟁여져 있다. 풍경의 한 부분을 주시할 때 무엇을 재현했는지 잊을 만큼 조형 언어가 자율화되는 단계는 추상미술의 논리가 되었다. 하지만 보이는 세계를 포기하고 미술이 얻어낸 것은 초라하다. 충격과 자극이 흥행을 낳는 시대에 잔잔한 서정시 같은 그림은 한쪽으로 기울어진 추를 완화시킨다. 두보의 시대나 지금이나 긴 겨울잠을 깨우는 봄비는 단비였을 것이다. 신비로운 기운을 뿜어내는 전라도 지역의 능선 아래 야트막하게 자리한 논과 밭, 그리고 그 안에서 띄엄띄엄 노동하는 마을 주민의 모습은 평화롭다. 그가 부모님이 계시던 고향으로 내려온 때가 2006년이다. 고향에서 나고 자라고 묻힌 부모님처럼, ‘내 고향 김제의 삶과 자연의 풍광들’을 그리는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조병철은 어느덧 환갑의 나이를 넘어선 자신을 돌아보며 ‘그림농사’를 반성한다. 그가 그리는 농촌 풍경은 단지 소재를 넘어서 작업 자체가 농사와 비유되는 것이다. 그에게 농촌은 단지 저 멀리 보이는 풍경은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2020년 이후 구순을 넘긴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홀로 남아 그곳에서 작업하는 이에게, 그 풍경은 이미 얼마 전에 지나갔지만 현실에 그 흔적이 남겨진 무엇 아닐까. 따사로운 풍경이라고 해서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풍경은 풍전등화처럼 위협받는 중이다. 대지와 하나 되어 성실하게 살아갔을 농부들이 점차 사라져가며, 농촌 공동(共同)체는 공동(空洞)화 되고, 농촌 소멸까지 말해지는 현실도 미래에 진가가 밝혀질 과거가 아닐까. ‘오래된 미래’(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가치를 생각하기에는 한국의 변화 속도가 너무 빠르다. 하나의 출구만 가진 속도 지향성 사회가 간과한 것들이 하나둘 머리를 들고 있다.

보리무지개 30F 유화 2025

아침미소 30F 유화 2025
여럿의 공존이 아닌 대세를 선점하려는 유일한 방향이 피폐화시킨 것이 이러한 고즈넉한 농촌의 삶일 것이다. 정직한 땅과 밀착해서 살아가는 농부들의 진솔한 모습은 공중에 붕 떠서 전전긍긍하는 많은 도시인에게 이상적으로 다가온다. 작가가 두보의 시구에 ‘대지-’라는 접두어를 따로 붙인 이유는 필자로 하여금 땅과 관련된 리얼리즘을 떠올리게 한다. 도시적 삶이 점점 팍팍해지는 이유가 땅의 문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도시로 사람들을 몰아대는 거센 근대화의 흐름 속에 내려가는 법이 없는 주거비는 양극화의 주범이다. 물론 농촌의 땅이 농사를 짓는 사람의 것이 아닐 수 있지만, 생존 비용에 있어 땅의 비중은 도시보다는 덜하다. 세계화를 통해 여러 지역의 모든 상품과 경쟁하는 일개 품목이 된 농산물의 상황도 엄존한다. 농업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기계화와 시스템화는 그곳에서 살며 노동하는 이들의 입지를 좁힐 것이다. 또한 농촌은 기후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두보가 살던 시대의 농업생산력은 지금보다 떨어졌겠지만 기후위기로 극과 극을 달리는 기후는 없었을 것이다. 조병철의 고향이자 작업장이 있는 전라도 지역은 올해 호우피해가 심했다고 알려진다. 문명이 자연에게 가한 타격은 대지 위에서 노동한 만큼 얻는 이들에게 더 크게 되돌아 왔다. 작품 〈무릉원두〉에서 제목에 포함된 ‘무릉-’이라는 접두어는 풍경을 대한 작가의 의도를 짐작하게 한다. 만약 무릉도원이 있다면, 그것은 일단 세상의 주인으로 자처하는 인간 주체의 거만함이 없는 곳일 것이다. 잘 찾아야 보이는 농부는 산수화 속의 작은 인물처럼 풍경을 상대적으로 크게 만든다. 그는 작가노트에서 ‘대학에서 전공한 유화적 기초에 그간 공부한 동양회화적 시각과 정신을 접목’을 꾀한다고 밝힌 바 있다. 좌우로 긴 스펙터클한 구도는 논과 밭, 그리고 집이 있는 풍경을 완보(緩步)하고 싶은 이상향으로 만든다. 원경의 산은 아늑한 전경에 신성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수선화 엄마 45.5 105.5 유화 2025

휴일-엽집남자 30F 유화 2025

하루-좌포리 50 100 유화 2025
멀리 보이는 봉긋한 무덤은 햇살을 받고 있다. 자연으로 돌아간 이는 이듬해 다시 푸르러질 식물들처럼 거대한 순환 주기로 들어선다. 반면 현대의 발전주의를 특징짓는 선적 시간관은 생과 사를 양극으로 대립시키는 종말론적 미래가 있을 뿐이다. 들녘에서 일하는 농부가 있는 풍경 〈보리무지개〉는 무지개의 후광으로 빛난다. ‘무지갯빛’이라는 일상어에는 긍정적인 내용이 이어지곤 한다. 여기와 저기를 연결하는 듯한 형태는 잠시 지구별의 손님으로 왔다가 돌아가는 모든 생명에게 무지개 다리 건너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그의 작품에서 길의 끝에 무지개가 걸쳐있는 모습이 더욱 그렇다. 그는 작가노트에서 ‘대지는 살아있는 캔버스이자 언제나 영원한 나의 화폭’이라고 말했지만, 미세한 공기의 진동까지 전달되는 하늘 또한 그러하다. 작품 〈휴일-옆집 남자〉에서 하늘과 구름, 산과 물, 여물어가는 곡식과 붉게 핀 꽃이 있는 풍경 속 남자는 관객의 시점을 공유한다. 이상향은 현실의 풍경과 보다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작품 〈햇살 그리고 바람〉이 암시하듯 햇살과 바람으로 가득한 논밭은 이미 풍년을 예고한다. 마치 무대막처럼 내려오는 숲은 잎 하나하나가 햇살과 바람에 반응한다. 침묵 속에서 노동하는 고요한 풍경이지만 세포 단위로 표현된 듯한 조밀한 식물에는 생명의 율동이 있다. 작품 〈아침미소〉에서 여자 농부는 자신이 일군 밭에서 수확하는 작물 만큼이나 햇살이 가득하다. 가까이 표현된 식물적 형상은 빛을 품는다. 빛과 친근한 녹색 계열은 구체적 대상과 무관하게 인간이 일군 자연의 산물임을 말한다. 그의 작품은 자연이 풍부한 촉감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려준다. 작품 〈수선화 엄마〉에서 자리에 무엇인가를 널고 있는 사람은 전경의 활짝 핀 수선화처럼 아름다운 사람이다. 화면을 평행하게 가로지르는 여러 선들이 있는 풍경 〈하루-좌포리〉는 농사짓는 삶이 그저 느슨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에 인간의 규칙이 더해진 엄밀한 것임을 말한다.

용시내의 여름 50F 유화 2025

무릉원두 62.5 148.7 유화 2025
오두막에서 새참을 먹으며 쉬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작품 〈용시내의 여름〉은 농촌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그들은 자연의 주기에 맞춰 일하고 쉬고,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함께 대처한다. 사회학은 전통/현대를 공동사회/이익사회의 관계로 설명한다. 사회학자 페르디낭 퇴니스에 의하면 ‘공동사회는 일차적이며 소규모적이고 전통적이며 통합된 가치’를 ‘이익사회는 비인격적이고 이차적이며 대규모적이고 사회적으로 분화된 가치를 강조하는 체계’라고 정의한다. 성취지향적인 시장사회에서 공동체는 와해되어 간다. 예술은 근대에 자율성을 간취하자마자 늘 위기론에 시달렸는데, 그것은 대지와 연결된 공동체의 와해와 무관하지 않다. 실재와의 끈이 떨어진 사회에서 소통과 유통은 전적으로 시스템의 조작에 맡겨지기 때문이다. ‘문화는 의미있는 행위와 이에 상응하는 질서’(제프리 알렉산더, 『문화와 사회』)라는 기본적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조병철의 그림은 착취되다가 억압되다가 감추어진 실재를 복구하기 위한 대안 문화의 맥락에 놓인다.
출전; 전북도립미술관 서울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