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담는 살아있는 기하학
제임스 터렐 전 (6.14—9.27, 페이스 갤러리 서울)
이선영(미술평론가)
2008년 한국에서의 전시 이후 열린 제임스 터렐(1943-)의 ‘귀환(The Return)’ 전의 백미는 페이스 갤러리 3층에 설치된 [after effect]이다. 1-2층의 전시장 벽에 설치된 다른 작품들도 그렇지만, 작품에 꼭 맞는 체험을 위해 공간을 거의 재설계했다. 그의 평생 예술적 주제인 빛을 담기 위한 공간의 중요성 때문이다. 작품과 맞춤형 공간의 밀접한 관계는 ‘무용수와 무용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류의 미학적 질문과 비슷하다. 담을 수 없는 것을 담으려는 노력은 근대미학에서 숭고로 명명되었으며, 재현주의를 거부하는 현대미술의 상수가 되었다. 하기야 그가 1977년 이래 현재까지도 진행 중인 애리조나 플래그스태프 인근 분화구에서의 작업에 비한다면, 쐐기 형태의 공간 변형은 작은 실험실에 불과할 수도 있다. ‘after-’라는 제목처럼 몸통이 무엇인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몸통은 경계를 전제하는데, 숭고는 경계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도 분화구에서의 작업인 로든 크레이터(Roden Crater) 프로젝트는 그 개념이 평면 작품으로도 나와 있다. 그 프로젝트 또한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빛과 관련된다. 대지예술처럼 거대한 규모의 작품이 개념적 형식으로 전시장에 들어오는 것과 비슷한 경우다. 뉴턴이 프리즘이라는 도구로 빛을 분석한 이래, 빛을 다루는 문제는 정교한 장치와 관련되었다. 가는 빛으로 구획된 예리한 외곽선으로 일상 공간과 구별되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 또한 마찬가지다. 설치작품의 개요와 더불어 그 시각적 효과를 사진이나 종이 등에 담은 평면 작품들이 1층과 2층 전시실에 걸려 있다. 건축적 스케일의 작품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모형도 보인다. 그 모두가 그의 관심사인 빛과 공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실험과 관련된 것이다. 그의 수십년간의 실험은 빛과 공간(Light and Space)의 지각이라는 주제에 집중되었으며, 현대미술사에서 이러한 흐름을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 이번 전시는 오랫동안 몰두해온 명상적인 빛의 공간 연출에 대한 실험의 연장이다.
명상적인 빛의 공간
관객은 극장같이 컴컴한 공간으로 들어가서 아무도 없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빛의 드라마를 본다. 일반적으로 무대는 빛과 밀접하다. 조명은 연극적 서사의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요즘은 일반 무대 뒤편에도 영상을 투사하여 환영의 공간을 확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제임스 터렐의 ‘무대’에는 빛만 존재한다. 무대 가장자리에 사각형으로 패인 홈을 통과하는 빛은 매우 선명해서 관객이 있는 공간과 완전히 분리된 막이 드리워진 듯하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 일종의 가상적 접면이다. 작품 속에 여러 빛의 줄기가 등장해도 뒤섞임 없이 순차적으로 전개된다. 공간 속에 또 다른 공간이 열리고 닫히는 듯한 과정이 서서히 진행된다. 선명하기는 하지만 은근슬쩍 바뀌는 여러 색 빛이 공간을 열고 연결하고 닫고 다시 여는 흐름을 지속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는 다른 색의 사각 틀들은 또 다른 문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서로 다른 문턱을 넘어야 하는가. 아무리 두들겨도 열리지 않는 문도 있고 예상외로 홀연히 열리는 경우도 있다. 인간 사회는 원시시대부터 통과의례가 있었으며, 정보혁명의 사회에서는 매일 수많은 보이지 않는 관문들을 통과해야 매사가 순조로울 수 있다. 눈에 확 띄는 것만 잠시 관심을 보이는 크고작은 스펙터클의 문화 속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오로지 작가가 연출한 장면에 집중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 빛의 흐름 외에 아무것도 없는 곳을 관객이 채울 수 있다면 그 시공간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다. 최상의 효과를 위해 조율된 공간은 빛의 흐름과 의식의 흐름 같은 무형의 요소와 함께 활성화된다. 해가 뜨거나 질 때의 장관처럼 다른 요소 없이 빛으로 가득한 공간의 시간적 추이만으로 충만하다. 짧은 시간 동안 지속되는 현존의 체험은 어떻게 작품에 담을 수 있을 것인가. 미학은 이 문제를 숭고로 명명했다.

제임스 터렐 전시전경(사진출전은 페이스갤러리 서울에 있음)
숭고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칸트로부터 시작된다. 리오타르는 [칸트의 숭고미에 대해서]에서 칸트에게 이성은 양적으로 평가된다고 말한다. 리오타르에 의하면 양의 관점에서 이성은 크기들의 연속을 추구하며, 크기들의 표상을 위해서는 구성이 필요하다. 그에 의하면 직관의 형식인 구성요소들은 선험적 원리에 의해 조직된다. 이러한 논리적 방법은 한정된 원리만을 따른다. 하지만 상상력의 산물인 예술은 그런 방법에 한정되지 않는다. 특히 모든 강력한 것, 절대적인 것은 표상되지 않고, 느껴지는 것이다. 제임스 터렐의 주제인 빛이 바로 그렇다. 특히 서구인에게 빛은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상징성을 가진다. 르네 위그는 [예술과 영혼]에서 빛은 그 자체로 머물러 있으면서도 수없이 많은 조각으로 불어나는 것이니, 그 점에 있어서 빛은 신과 흡사하다고 말한다. 그렇게 순수한 빛은 곧 정신적 세계, 영혼의 상징이 된다. 빛과 같이 숭고한 것은 재현될 수 없고 제시될 수 있을 따름이다. 빛으로 공간을 구획하고 포화시키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 앞에서의 신비로운 느낌은 숭고의 한 양상이다. 근대미학에서 숭고는 낭만적이거나 고전적인 양식을 통해 공간적, 시간적 차원을 확장하곤 했다. 전후 기하 추상미술에서 숭고는 각 작가마다 준 종교적 체험들로 표현된다. 안나 모진스키는 [20세기 추상미술의 역사]에서 격자무늬 추상으로 알려진 에그네스 마틴의 ‘넓은 바다를 보면서 형태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그가 자연이나 자아로부터 벗어나 엄격한 격자의 움직임에 도달하였다고 평가한다. 역설적으로 숭고는 경계의 문제다. 장 뤽 낭시는 숭고에 대한 저서 제목을 [숭고에 대하여-경계의 미학, 미학의 경계]으로 정한다. 그는 이 책에 포함된 글 [숭고한 봉헌]에서 ‘미적인 것은 그자체가 인식의 예견’이며 ‘개념 없이 작용하는 도식을 통해 제시되는 형상’이라고 말한다. ‘도식의 조건은 바로 자유 자체다. 나아가 도식을 만드는 것도 자유’라고 하면서 예술과 숭고의 밀접한 관계를 말한다.
제임스 터렐에게는 빛이라는 무한을 담는 유한한 그릇의 문제였다. 그의 주요 작품에서 전시 공간 전체를 다시 설계해야 하는 대규모 공사는 담을 수 없는 것을 담기 위한 장치의 중요성을 말한다. 빛은 대자연에 편재하며, 인간이 밤을 정복하여 24시간 돌아가는 시대가 열린 이후 일상에서 여러 실용적 기능을 맡고 있지만, 그것만을 온전히 빼내어 심미적 대상으로 변화시키는 일은 쉽지 않다. 1943년생인 제임스 터렐의 젊은 시절에 비해 전기 조명 기술도 엄청나게 발달했다. 그의 작품은 시간의 추이에 따른 미묘한 변화가 핵심이다. 시간은 생각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요인이다. 무념무상의 몰입이라 할지라도 흐름은 있는 것이다. 어두운 공간에서 투사된 빛의 평면들이 교차하는 작품은 관객의 상상의 전개에 있어 여러 문턱들로 다가온다. 특히 변화무쌍한 색감은 공간 저편에서 또 다른 공간이 열리거나 닫히는 것같은 효과로 나타난다. 그의 작품은 변화하는 순간순간 장면의 밀도가 높아서 움직이는 기하 추상회화 같다. 가령 마크 로스코나 버넷 뉴만의 추상화 앞에서 관객은 색과 선을 통해 모종의 움직임을 상상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움직임은 실제로 일어난다. 전기조명 기술과 결합한 현란한 스펙터클과 달리, 벽의 일부처럼 고정되어 최초의 감흥이 소비된 후 장식화된 회화나 시간에 떠밀려 가면서 영상을 소비하는 대중문화의 방식과 다르다. 그의 작품은 회화와 영상의 장점을 절충한 셈이다. 2층 전시장에 홀로그램을 활용한 작품도 시시각각 흥미로운 각도로 빛의 면을 연출하는 움직이는 추상이다. 이때는 모니터의 가장자리가 액자 역할을 한다. 작가는 시간의 추이에 따른 공간의 단면들에서 결정적 지점들을 뽑아서 판화 작품들로 보여준다. 2층에 걸린 웨지워크(Wedgework) 판화 시리즈들은 작은 스케일로 설치작품을 추체험할 수 있다. 그 밖에 빛의 특성을 묘사한 아쿠아틴트와 목판화도 전시됐다.
여러 형식의 작품군이 여러 공간에서 따로 또 같이 작동하면서 작가의 구상부터 구체적인 설계안, 그리고 기대되는 효과와 결과까지를 단편적으로나마 추측하게 한다. 갤러리 내의 카페와 다른 전시 공간 벽 안에 설치된 글라스워크(Glassworks) 시리즈는 원형과 마름모 등 여러 외곽선을 가지며, 실내에 거는 그림같은 스케일로, 극장같은 이상적인 어둠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 내부에서 서서히 변화하는 빛의 흐름을 온전히 감상하기 위해 그 앞의 의자에 한동안 앉아 있어야 한다. 그의 작품을 매개로 하여 정지한 채 내적인 여행을 권유받는다. 제임스 터렐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화려한 스펙터클의 기술을 절도있게 활용하며 명상적으로 연출한다. 지상의 잡다함을 초월한 숭고미에 기반하는 추상미술을 빛의 흐름으로 표현한다면 바로 이 모습일 듯하다. 전시 때 해당 작품 및 그의 다른 작품에 대한 개념들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며, 때로 그 일부가 또 다른 작품이 되는 점, 그리고 관객에게 작품을 보여주는 방식이 빈틈없다는 점은 그의 작품이 철학과 과학, 그리고 예술 사이 어딘가에 있음을 알려준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철학은 개념들을 끌어내는 반면, 과학은 전망들을, 그리고 예술은 지각과 정서들을 끌어낸다고 비교한다. 세가지 사유들은 서로 교차되고 얽히지만, 그렇다고 동일화되지는 않는다. 제임스 터렐의 작품은 ‘기능들에 의하여 사물의 상태를 구축하는 과학’(들뢰즈와 가타리)을 잘 활용함으로서 무한하기에 표현하기 힘든 것을 담아내려 한다. 수십년 지속하고 있는 프로젝트를 보면 그는 여전히 목표에 근접해 나가는 과정에 있다. 작가가 빛과 공간을 제시함으로서 가능해지는 지각이란 ‘세계를 가득 채우며, 또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생성하게 해주는 감지불능한 힘들을 감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들뢰즈와 가타리)이다.
출전; 아트인컬쳐 2025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