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촘히 쌓아 올린 삶이라는 경기장


이선영(미술평론가)

 


이지영의 [긴 달리기] 전은 우선 인생을 떠올리고 미술 전시라는 맥락으로 보자면 예술하는 삶을 비유한다. [---하는 삶]이라는 제목도 많다. 아마도 ‘그림 그리는 삶’이 가장 중심에 있겠지만, 그것은 다른 삶들을 보여주는 것 자체로 대신한다. 예술이 아니라면 삶은 그저 사는 것으로 소진되었을 것이다. 여러 상황에서의 달리기인 [--한 달리기]라는 작품도 많이 보이는 전시에서 삶은 달리기와 비교된다. 달리기의 기간은 평생으로 가정된 긴 여정이다. 그는 이번 전시 작가노트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삶의 길 위에 놓였다고 생각한다’ ‘내 의지와는 무관한 삶의 끝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달리기라는 행위로 시각화하고자 했다’고 밝힌다. 작가가 이해한 삶 속 인물들은 다양한 은유적 상황에 놓인다. 작품 [달리는 삶]에서 검은 해바라기밭 사이를 달리는 이는 마치 성화 봉송 주자처럼 숭고한 여정에 있다. 하지만 예술은 현대적 삶을 구성하는 여러 직업군 중의 하나가 되기에 힘든 요소가 있다. 



 검은 해바라기로부터1  33.5 ×24.5 ㎝ 장지에연필,아크릴 2025(이하 모든 사진출전은 갤러리 인)


예술은 생산력 향상을 위한 시스템인 현대적 분업에 부응하지 않고 우열의 기준도 모호하다. 그쪽으로 재능 있는 이가 좋아서 하는 일이며, 여기에 의지와 운이 더해주면 좋을 뿐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넣는 일이기에 완급 조절이 더 필요하다. 긴 달리기에서 필수는 체력이며, 자기에 맞게 체력을 분배하는 자율성 또한 요구된다. 인생을 길게 보고 자기 길을 자기 페이스대로 가는 것은 이상적이다. 하지만 현실은 긴 여정보다는 단거리이며, 자기만의 길이 아닌 대세를 따르는 것이고, 각자의 페이스가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입된 기준이 좌지우지한다. 이지영 전은 긴 달리기로서의 이런저런 삶의 풍경 뿐 아니라, 이 당연한 삶의 원칙이 얼마나 도전받고 있는지도 보여준다. 소위 말하는 무한경쟁의 시대, 누군가 달성한 최고 속력을 맞추는 일은 다른 이에게는 억압으로 작용하며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비인간적이고 무분별한 속도전에 기계까지 가세하고 있지 않는가. 


[긴 달리기]는 어릴 때 교과서에 나왔던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라는 우화도 떠올리는 제목이다. 길게 보고 가겠다는 결심은 중간의 여러 변수에 대해 일희일비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그것은 1980년생의 작가가 살아오고 살아갈 중간 지점쯤 깨달은 진리이다. 작가는 실제로 달리기를 취미로 하고 있다. 많은 육체 에너지기 필요한 화가가 걷기도 아니고 달리기라니! 하여튼 그 시작이 흥미롭다. 작업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준 달리기는 모든 것이 멈춰서던 팬데믹 기간이 그 시작이었다. 학교도 전시장도 작업실도 정상화되지 않은 시기, 하지만 그는 자기 방식대로 계속 가고자 했다. 이러한 선택은 이지영이 그동안도 부지런히 어떤 여정을 밟아왔음을 의미한다. 또한 작업의 필수조건이 체력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슬기로운 판단이다. 20-30대는 영감이나 기회만으로 작업이 진행된다고 믿어지지만, 더 시간이 흐르면 체력이나 의지 같은 원초적 요소의 중요성이 커진다. 



 검은 해바라기로부터2  33.5 ×24.5 ㎝ 장지에연필,아크릴 2025



 검은 해바라기로부터3  33.5 ×24.5 ㎝ 장지에연필,아크릴 2025


인생을 긴 달리기로 본다함은 순간순간 배반당하면서도 결국은 그게 정도(正道)라는 믿음이다. 인생, 특히 작업하는 삶을 긴 달리기로 본다면 서두를 필요도 무리수를 둘 필요도 없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꾸준히 가면 된다. 그 방식이 다른 사람보다 더 느릴 수도 더 빠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지속 가능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연필로 빼곡히 쌓아올린 삶이라는 경기장을 표현함에 있어 자기 나름의 속도감은 중요하다. 동양화과 출신이니 일필휘지로 휘두르는 작업 방식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언뜻 보기만 해도 작품 하나 완성에 매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것과 그 안에 쏟아부은 에너지의 막대함이 전달된다. 작업실 한 켠에 모아놓은 몽당연필은 그만큼의 노력을 갈아 넣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성실함이 작품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은 된다. [긴 달리기]에는 인생관이 표현되어 있다. 아무리 말 없는 회화지만 인물이 등장하는 순간 이야기는 활성화된다. 일련번호만 다른 제목은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여러 인물이 등장함으로서 생기는 잠재적 움직임이 이야기한다. 그림에서 서사를 배제하려는 시도는 어떤 역사적 시기에 한정된 미학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클레멘트 그린버그로 대변되는 모더니즘 미학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지영의 작품이 현대미술이 다져왔던 논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외과시술을 하는 듯한 여러 도구(그의 경우 여러 굵기와 강도의 연필)로 평평한 면(종이)에 그린 작품들은 연필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뽑아낸다는 점에서 매체에 충실하다. 이러한 점은 이번 전시부제와 같은 제목의 작품 [긴 달리기]에 잘 나타난다. 거기에는 모든 빛을 다 흡수할 듯한 완전 블랙 배경이 특징이며, 연필로 가능한 다양한 표현이 집약돼 있다. 칠흑같은 배경은 연필의 원래 재료인 광물질로 되돌아가려는 듯 단단하다. 다섯가지 종류의 연필을 사용하는 그의 작품은 가는 연필 선부터 쌓아가며 한 화면에 여러 계열이 있다. 작품에는 미묘한 차이들이 나타난다. 



 바다달리기1  33.5 ×24.5 ㎝ 장지에연필,아크릴 2025



 바다달리기2  33.5 ×24.5 ㎝ 장지에연필,아크릴 2025



 검은 해바라기 달리기1  33.5 ×24.5 ㎝ 장지에연필,아크릴 2025



 검은 해바라기 달리기2  33.5 ×24.5 ㎝ 장지에연필 2025


‘1-100까지의 계열을 연필로 담아낸다’는 생각으로 임한다. 그는 2022년 연필을 주 매체로 활용하는 작품들을 모은 전시 [펜슬리즘](기획;김범중) 전에서 ‘그림의 한 화면 안에 그림을 그리는 처음부터 끝까지의 모든 행위가 담기기를 원한다. 가는 연필 선의 아주 연약하고 섬세한 특성과 그것들이 쌓여 만들어내는 광물성 단단함이 내게는 참 매력적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에게 작품은 하나를 중심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작은 요소들이 쌓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조그만 것들이 쌓이면서 생기는 응집된 힘을 좋아한다. 그의 작품은 동양화처럼 다(多)시점이다. 여러 종류의 연필로 그어가면서 펼치는 선적 표현은 원근법적 깊이감 보다는 평면적 화면의 가능성을 살린다. 마틴 제이는 [모더니티의 시각체제들]에서 루카치를 참조하면서 깊이가 있는 리얼리즘과 표면적인 자연주의를 대조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캔버스의 2차원적 표면 보다는 3차원적 공간을 강조하는 원근법은 리얼리즘적이다.


반면 자연주의는 그것이 형태들을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갖는 시각적 깊이로 환원시킴 없이 그 형태들의 다양성을 묘사한다는 면에서 표면에 관심을 둔다. 이때 세계는 리얼리즘적으로 설명(narration)되기 보다는 묘사(description)된다. 묘사에서 원근법의 단일한 눈은 상대화된다. 이지영의 작품에서 시선과 같은 방향에서 쏟아지는 빛의 다발이 보여주는 시야는 넓지 않다. 어떤 작품에서는 밝기는커녕 어둡기 조차하다. 앞의 ‘장면을 보고 있는 눈에서부터 방사상으로 퍼져 나가는 공간은 마찬가지로 기하학적인 공간’으로 ‘그 눈은 정상적인 시각에서의 두 개의 눈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단일한 눈’(마틴 제이)이다. 그러나 작품 속 인물로 나타난 이지영의 관점은 움직이며, 심지어는 달린다. 그것은 ‘불규칙하고 단속적인 움직임들로서 하나의 초점에서 다른 초점에로 옮겨 다니는 동적인 눈’(마틴 제이), 즉 육화된 눈이다. 기계적이며 기하학적인 상징의 세계를 탈주하는 육안의 도입이다. 



 거부할 수 없는 사건 (전체)  33.5 × 98 ㎝ 장지에연필 2025



 가면 달리기 (전체) 33.5 ×122.5 ㎝ 장지에연필 2025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이는 관점은 여러 시점을 낳는다. 물론 여러 시점은 불확실할 수 있다. 작가는 ‘우리는 각자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삶을 선택하고 수정하며, 때로는 방황하면서 예측할 수 없는 끝을 향해 나아간다’고 말한다. 그는 무엇이 옳으며 어디로 가야하는지 확신하지 않는다. 달리기와 비슷한 삶은 ‘어떤 트랙에 놓여있지만 끝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에게 달리기가 ‘나를 만나는 일’인 것은 분명하다. 동시에 보편성 또한 추구한다. 이 전시의 작품은 ‘이것은 단순히 나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인간의 여정을 비추는 장면이 되기를 바란다.’ 작품 [긴 달리기]에서 원래 검어야 할 그림자는 글자들로 이루어진다, 그의 기억과 감정, 책의 구절 등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인물은 시야와 그림자 사이를 가늘게 연결하는 매개일 따름이다. 사유와 행동이 결합된 이상적인 상태이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검은 해바라기는 광자(光子)처럼 빛줄기를 채운다. 그에 의하면 검은 해바라기는 자신이 타고 태어난 환경이다. 단단한 대지가 아닌 허공에 둥 떠서 달리는 인물은 홀로임이 강조된다. 


우주같은 심연 속에서 오로지 자신의 관점을 의지하면서 달리는 인물에서 궤도를 도는 행성 또한 연상된다. [검은 해바라기로부터1]에는 텃밭을 가꾸는 두 인물의 배경을 이루는 식물들이 연필의 선처럼 자라난다. 특히 말단이 뾰족한 식물들은 방향성이 있다. 자연의 유기적인 선과 대조되는 기하학적 패턴들이 한 화면에 공존한다. 화면을 가득 메워가는 선적 흐름은 그의 작품에 편재하는 특징이다. 작품 속 검은 해바라기의 출처가 밝혀지는 시리즈의 첫 작품은 그것이 정성껏 키워진 것임을 말한다. 검은 머리는 인간의 상징 아닌가. 그의 작품에는 많은 인간이 등장하지만, 인간들은 검은 해바라기 무리로 변신하여 등장하는 셈이다. 검은 해바라기는 꽃다발처럼 들 수 있고 패턴이 되어 건축적 공간의 일부가 된다. [검은 해바라기로부터 3]에서 밀림같이 무성한 자연은 장막이 되어 불밝히고 나아가야 할 어둠이다. 달리는 이의 머리 조명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줄기들은 암중모색 중의 누군가를 안내한다. 



 가면 달리기1 33.5 ×24.5 ㎝ 장지에연필 2025



 가면 달리기5 33.5 ×24.5 ㎝ 장지에연필 2025


철인 N종 경기처럼 달리던 이가 수영(‘바다달리기’)도 한다. 인생이라는 ‘긴 달리기’에는 수중전과 공중전 또한 포함된다. 육지에서 거대 식물로 연출된 심연의 공간은 바닥을 알 수 없는 극히 불투명한 공간인 바다가 된다. 후레쉬는 밝지만 일부만 비출 뿐 자신이 위치한 객관적 좌표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럿이 한 방향을 비추면 심연도 밝아질 수 있다. 이지영의 작품에는 개별적이면서도 때로 ‘우리’가 되는 상황이 나타난다. 작품 [우리] 시리즈에서 기차놀이처럼 한 팀이 되어 한 방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우리다. 이 시리즈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끈이 얽혀있는 양상은 작품마다 사람마다 다르다. 그들은 잎이 가득한 숲길을 뛰는데, 뒤로 갈수록 배경은 어두워진다. 공간적 배열에 따라 시간대가 다른 것이다. 계속 연결될 수 있는 작품은 열려있다. 작품 [어떤 공동체]에서 연잎이 둥둥 떠 있는 연못을 운동장의 트랙처럼 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평소에 고립된 개체로 있다가 운동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가진 일시적 공동체이다. 팬데믹 이전의 그림이지만, 마주치기 보다는 한 방향이 편하고 자연스러워진 움직임이다. 하나이자 집단인 다중(多衆)의 모습이다. 다수가 보람있는 행동을 같이 할 때 축제적인 활기가 있다. 얼마 전의 한국의 급진적 정치 상황과 관련하여 작품 속 인물들의 행동은 스포츠이자 무브먼트이다. 실존적 차원으로 본다면 끝없는 추구이자 탈주이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혁명의 시간]에서 ‘결정하는 다중(multitude)’을 강조한다. 다중은 점차 제국화되어 가는 세계에서 대안적인 주체를 말한다. 다중은 대중이나 민중과도 다르게, 개인성을 보유한 집단적 주체이다. 파올로 비르노의 [다중]에 의하면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채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유지하는 복수적 존재’(스피노자)가 다중이다. 근대적 국가가 중앙집권주의를 추구한 것은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탈근대적 국면에서 중심은 해체된다. 



 네 면의 공간3  33.5 ×24.5 ㎝ 장지에연필,아크릴 2025



 네 면의 공간5  33.5 ×24.5 ㎝ 장지에연필 2025



 앞을 보는 검은 해바라기  33.5 ×24.5 ㎝ 장지에연필,아크릴 2025



 뒤를 보는 검은 해바라기  33.5 ×24.5 ㎝ 장지에연필,아크릴 2025


다중의 개념에서 이지영의 작품과 맞닿는 부분은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여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다. [긴 달리기]는 수많은 시간의 결합을 전제한다. 오르막과 내리막, 뻥 뚫린 길과 장애물이 있는 길의 속도감은 다를 것이다.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도 각자 다를 것이다. 긴 달리기는 자기 보폭을 스스로 규정짓는 자율성을 전제한다. 가타리와 네그리는 [자유의 새로운 공간]에서 중앙집권적인 지배 권력(potestas)에 대항하는 또다른 힘(potentia)을 예시한다. ‘전자는 중앙집권화하고 매개하고 초월적인 명령의 힘임에 비해, 후자는 지역적이고 직접적이며 활동적인 구성적 힘’(가타리와 네그리)이다. 예술에서도 중요한 것은 삶의 지평을 다수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무정부주의적 다수성이 아닌 ‘공통적인 것(the common)의 형성 혹은 구성을 둘러싼 진행’(네그리)이다. 자기만의 시간 감각을 지키며 긴 달리기를 수행하는 인생은 하나의 기준을 강요하는 지배적 질서를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하는 행동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한 이지영의 방식은 분절구조화(articulation)이다. 분절구조화는 [자유의 새로운 공간]에서 예시된 바, ‘새로운 사회적 주체들에 있어서 각 구성성분들의 단수성과 이질성을 확장시켜 나가면서도 상호 연합적으로 자신을 재구성하는 형태’를 지칭한다. 작가의 분신같은 인물과 그와 유사한 인물들은 나이자 우리가 된다. 같은 제목에 번호만 다른 시리즈 작업은 개별적으로도 연속적으로도 작품이다. 같은 크기의 작품들은 따로 또같이 작동한다. 죽 이어서 설치되면 퍼레이드같은 서사가 연출된다. 그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을 보는 관점과 작품의 형식을 교차시킨다. 전시에는 여러 종류의 작품들이 나오지만, 그것이 중구난방이 아닌 것은 기존의 맥락을 확장시키는 방법론 때문이다. [검은 해바라기 달리기] 시리즈는 검은 해바라기+달리기인 것이다. 검은 해바라기 숲인지, 그런 무늬의 장막인지 알 수 없는 평면적 배열의 형태들 속을 불밝히며 나아간다. 미로같은 그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유영하는 삶  33.5 ×24.5 ㎝ 장지에연필,아크릴 2025



 뿌리 내린 삶  33.5 ×24.5 ㎝ 장지에연필,아크릴 2025



 달리는 삶  33.5 ×24.5 ㎝ 장지에연필,아크릴 2025


[검은 해바라기 달리기2]는 숲에 갇힌 것같은 또는 숲이 지켜주고 있는 듯한 양면적 상황이다. 그의 작품 중 집이 등장하는 시리즈처럼 보호와 예속은 동전의 앞뒷면같은 관계를 가진다. 작품 [거부할 수 없는 사건1]에서 하얀 선들이 만드는 주름은 바다나 산의 표현에 공통적이다. 시리즈를 죽 붙여놓고 보면 자연은 인간적 드라마가 펼쳐지는 무대처럼 이어진다. 이때 산을 이루는 주름은 연속성을 제공한다. 지금 단단한 산도 그것의 형성기에는 유동적이었을 것이며 식으면서 형태화되고 주름을 남겼을 것이다. 바다로 모일 지류의 주름은 훨씬 작을 것이다. 어디선가 떨어지는 물줄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과 가던 길 가는 사람들이 대조를 이룬다. 취향과 선택에 있어 다수와 개인의 차이는 늘 존재한다. [거부할 수 없는 사건2]에서는 모든 물줄기가 향하는 대세와 거리를 두고 관조하는 한 인물이 웅크리고 있다. [거부할 수 없는 사건4]에서는 자연적 물줄기를 흉내내는 가짜가 숨어있다.


[가면 달리기] 시리즈는 인생이라는 긴 달리기에서 끼어들 수 있는 불편한 상황의 단면이다. 민화의 호랑이 가면을 쓴 무리의 달리기 장면은 마치 연극적 공간같은 사각 바닥과 잎새 무늬 장막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얼룩말 탈을 쓰고 의상 또한 연속적인 무리들이 한 방향으로 달리며, 이를 엿보는 사람도 있는데, 관객은 엿보는 사람의 입장이다. 얼룩말도 그렇지만 기린도 무리를 짓는 동물이다. 한 시리즈에 여러 종류의 가면 무리의 등장은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얼굴을 바꿔가며 살아가는 처세술을 떠올린다. 홍학 가면들을 쓴 무리는 마치 학춤을 춤추는 듯한 자세다. 가면 속 얼굴은 가면과 닮아가며 본모습은 없어지거나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다. 가면 시리즈는 비유법을 구사하는 그의 작품 맥락에서 동물원(2006-)으로 시작되어 ‘인물원’이 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인간 또한 동물과 마찬가지로 갇혀있다는 진단이며,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많은 상황극의 바탕이 된다. 



 우리1  33.5 ×24.5 ㎝ 장지에연필,아크릴 2025



 우리3  33.5 ×24.5 ㎝ 장지에연필,아크릴 2025



 긴 달리기 100 × 81㎝ 장지에연필,아크릴 2025


또한 배경을 이루는 ‘검은 산수’는 ‘동물 우리의 느낌’으로, ‘보호와 감금’이라는 두 역설을 결합하는 은유이다. 집 안팎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여주는 [네 면의 공간] 시리즈는 지붕이 평면으로 펼쳐져 있는 집들이 다른 작품들과 죽 연결된다. 집은 사람들 간의 잡고 끄는 등의 관계가 일어나는 내밀한 곳이다. ‘네 면의 공간’은 내면의 공간이기도 하다. 집안의 사람은 밖과 안을 본다. 집은 나의 연장이자 세상과 마주한 베이스 캠프같은 곳이다. 종이 위를 활주하는 부지런한 연필은 빈공간을 거의 남겨두지 않는데, 건물을 이루는 단위 구조나 무성한 식물은 자연스럽게 공간을 채운다. 그의 작품에서는 물조차도 일렁이는 파(波)로 가득하다. 다음 작품에서 집안을 살펴보는 구경꾼은 더 많아져 바깥에서 안을 보는 관점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보고 보이는 관계 속에 사회의 진면목이 있다. 집은 인간관계가 은유적으로 펼쳐지는 무대이다. [네면의 공간] 시리즈는 2022년 갤러리 인에서의 개인전 [네 면의 집]과 같은 맥락에 있다. 


그는 이 전시의 작가노트에서 ‘나는 평소에 집들을 유심히 바라보는 버릇이 있다’면서 ‘창문을 통해 보이는 일부분의 내부 모습에서 조금의 힌트를 얻는다’고 말한다. ‘비슷한 외형을 갖춘 집 속에 수없이 많은 형태의 다른 삶이, 다른 이야기들이 존재하고 있다’ 관찰자의 예리한 시선이 내재한 그의 작품은 그림처럼 보여지면서도 소설처럼 읽혀진다. 하지만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는다. 마르트 로베르는 [기원들의 소설과 소설의 기원]에서 소설가의 욕망은 그가 현실을 변형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기에 현실을 참조한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작가의 능력은 현실을 재현하는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삶에 끊임없이 새로운 조건들을 재창조하기 위해, 삶의 요소들을 재분배하기 위하여 삶을 자세히 검토하는 능력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능력이 제대로 발휘된다면 작품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꿈인 것과 현실의 대행자, 세계 밖으로의 도주와 세계로의 귀환, 신화와 과학,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을 신기하게 결합시킬 수 있다’(마르트 로베르). 



 탑달리기 72.5 x 60.5 장지에 연필,아크릴 2024



 탑달리기2  162 ×130 ㎝ 장지에연필,아크릴 2025


이지영의 이야기체 이미지 또한 소설처럼 ‘꾸며낸 것과 사실을 섞기 위해 무수한 기술들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마르트 로베르). 한 여인의 머리를 양분삼아 자라는 식물을 그린 [앞을 보는 검은 해바라기]는 하나의 뿌리로 무성하다. 풍부한 결실을 낳는 사유와 고통의 관계를 보여준다. 하지만 지나친 사유는 행동을 굼뜨게도 한다. [뒤를 보는 검은 해바라기]에서는 마치 서커스하는 사람처럼 엄청난 무게와 부피를 머리 위에 얹고 움직여야 한다. 짝을 이루는 듯한 두 작품 [유영하는 삶]과 [뿌리내린 삶]은 대조되는 삶이 실제로는 유사함을 보여준다. [유영-]에서 찰랑거리는 심연 속의 두 발은 어디에도 디딜 곳이 없다. 그의 작품 속 인물의 손과 발이 매우 작다. 이동이나 노동 등, 보다 적극적인 활동적인 삶을 지향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하지만 작품 속 인물을 끝없이 행위한다. 나아가기 위해서는 물론, 제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도 움직인다. 


땅속의 뿌리들과 얽힌 삶에서도 인물은 영양 공급선과 연결된 채 자리를 지킨다. 뿌리는 아래로도 양옆으로도 종횡무진 확장하는 유연성을 가진다. 뿌리줄기는 보기와 달리 자유롭다. 작품 [검고 밝은 달리기]에서는 검은 해바라기, 거대한 깃털처럼 잎으로만 된 식물 등이 가로수처럼 길가에 배열되어 있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달린다. 식물들은 마치 물속의 식물처럼 유연하게 움직인다. 다른 작품에는 드문 색이 흐름을 더욱 강조한다. 머리의 조명에서 검은 빛줄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 이색적인데, 시야와 동 방향을 확보하는 빛은 맹목(盲目)일 수 있다. [탑 달리기] 시리즈의 주요 무대인 촘촘하게 쌓아 올린 탑들은 공든탑일 것이다. 수직 구도의 작품은 거의 전지적 시점이다. 동물원 대신에 인물원이라는 개념으로 인간사회를 관찰했던 시점이다. 예술 자체가 거리두기의 산물이니, 예술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바벨탑의 신화가 떠오르는, 한 방향의 높은 탑은 유아론에 빠진 이처럼 폐쇄적이다. 



 검고 밝은 달리기  91 × 117 ㎝ 장지에연필,아크릴 2025



 어떤 공동체 117×162cm 장지에 연필, 색연필  2017


반면 그 탑들 사이로 달리기하는 이들은 보다 개방적이다. 목마를 한 이들도 여럿 보인다. 어떤 작품보다도 인물들 간의 연대가 돈독하다.  [탑달리기2]에서 높은 탑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사람들은 주변과 담쌓은 배타적인 동일성의 원리를 보여준다. 동일성이란 자기만을 지칭하는 태도 그것이 유치한 유아론이자 공허한 동어반복이고, 아무 근거도 없이 법칙을 선포하는 지배적 질서의 특징이다. 작품 [싸리밭 달리기]에서의 고독한 주자는 브라탑과 팬츠의 조합의 의상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거의 육상선수의 복장이다. 비율이 엉성한 인물은 오히려 행위에 집중하게 한다. 작품 속 인물의 달리기는 프로다. 비경의 무성한 식물과 달리는 인간은 조합은 자연이 무수하게 행하는 반복을 인간 또한 그만의 방식으로 함을 보여준다. 인간의 시야가 전방을 관통하듯 이파리들 또한 달리는 인간에 걸쳐있다. 반복이 차이를 낳은 것도 마찬가지다. 이지영의 연필 작업 자체가 그렇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예술이 최대한 접근된다.


출전; 갤러리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