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따라 걷는 길
이선영(미술평론가)
전시를 앞두고 문혜정이 그리고 있던 작품 [빛을 따라 걷다]에는 70평생 그가 걸었던 또는 걷고자 했던 길이 보인다. 이번 전시는 일본과 독일, 그리고 한국을 무대로 한 50여년 간의 작업 여정 중에서 회화 작품만 골랐다. 초기에 나중의 씨앗이 담겨있듯, 현재의 작업에는 이전의 여정이 포함돼 있다. 이번 전시의 중심은 독일에서의 초기 유화 작업 위주지만, 새로운 작업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엮여 있다. 2007년에 편집된 [along the way]는 길에서 찍은 사진들로 만든 동영상으로, 나무, 숲, 하늘 등을 배경으로 서사의 축은 그 사잇길이다. 포장된 길, 가시밭 길, 황톳길, 가기 힘든 길,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 가로지르는 길, 징검다리 길, 차바퀴가 찍힌 길 등 다양하다. 여러 길을 다 거친 후 마지막 부분에 탁 트인 바다 풍경이 배치된 것은 마치 자연적 과정이 그러하듯 모든 길이 하나로 통한다는 메시지다. 그가 찍은 길섶에는 사람도 동물도 거의 보이지 않고 식물은 남아있다.

숲길 Ⅰ-2025-97x162 cm-oil on canvas
그의 영상 속에서 고속도로같은 지름길은 없다. 장면 속 모든 길이 하나하나 밟고 지나가야 하는 길이다. 빠른 교통수단으로 휙 지나가는 것과 걷기는 얼마나 다른가. 도보는 빠르지는 않아도 자기 방식대로 길게 갈 수 있다. 많은 매체 실험에도 붓은 놓지 않았던 작가의 선택은 효율성보다는 지속 가능성에 방점을 찍는다. ‘道’라는 개념은 동서고금의 석학들에 의해 엄청난 형이상학적 의미가 부여되었지만, 그것이 누군가의 일상과 관련된 것이며, 몸과 마음이 하나 된 꾸준한 실행이라면 그런 것도 감히 ‘道’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한 실행을 뺀 자신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삶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예술의 길이다. 작가는 한강이 보이는 작 업실 창문은 막아버렸고 그 자리에 그가 최근에 그리는 나무숲 풍경을 놓았다. 자연은 큰 영감을 주어왔지만, 작가의 심신을 통과한 것만이 작품으로 인정된다. 식물적 소재에도 동물적 꿈틀거림으로 가득한 것은 그것들이 자연의 재현이 아닌 자연적 과정의 표현임을 말한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나무숲 사이로 난 길이 있는 작품 [빛을 따라 걷다]는 나무가 빛을 향해 자신의 모든 것을 뻗듯이 작가 또한 그렇게 빛을 따르고 싶다는 바램이다. 자크 브로스는 [식물의 역사와 신화]에서 나무는 긴 수명과 곧게 뻗어 올라가는 수직성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나무의 큰 키와 부피감은 인상적인데, 나무는 일생동안 계속 키가 자라고 지름이 두꺼워 진다는 점이 인간과 다른 점이다. 그리고 ‘나무의 골조는 나무의 중심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부에 있다’(자크 브로스)는 점도 지배적 사회 속에서 타자로 존재하는 예술과 닮은 점이다. 문혜정의 작업에서 빛이라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식물과 연관된다. 자크 브로스는 나무의 내부에는 절대로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나무는 그 자신만으로도 하나의 세계를 구성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태양에 가까이 가려는 식물의 반사적 또는 본능적 움직임과도 닮았다. 물론 자크 브로스가 강조하듯이 뿌리 부분에서의 경쟁은 훨씬 더 치열하다.

움트기-2022-130x130cm-oil on canvas
독일의 작가 안젤름 키퍼의 그림에도 나타나듯이, 나뭇가지들은 눈에 보이는 뿌리에 해당한다. 나무는 지상과 지하를 잇는 기념비적인 기둥을 매개로 자신의 뿌리와 저 높은 곳과의 연결한다. 문혜정의 나무숲 그림은 나무의 수직적 지향과 길의 수평적 지향이 교차되면서 무한의 움직임을 낳는다. 같이 제작한 [싹돋음]은 멀리 보이는 나무를 카메라 렌즈로 잡아당긴 듯한 장면이다. 그의 작업 목록에는 사진과 영상이 많이 포진해 있다. 이러한 미시적 광경은 단지 작품 크기의 문제는 아니다. 작품 [나무]는 작아도 숲이다. 자연의 엽록소 생산 공장이기도 한 식물이 가장 좋아할 빛을 받는 나무들은 가득 충전된 에너지 때문인지 그림자조차도 초록빛이다. 로베르 뒤마는 [나무의 철학]에서 나무는 식물의 표상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나무의 독특한 형태는 빛 에너지를 끌어들이고 흙 속의 자양분과 수분을 길어 올리기에 가장 적합한 모습으로 진화한 결과다.
나무 이외의 식물에서 작가는 어떤 흐름을 나타내는 줄이나 끈을 강조한다. 연꽃, 인삼밭, 그리고 삼베로 만들어진 오브제 등에서 선들이 편재한다. 그것은 동물과 달리 움직일 수 없는 식물 내부의 여러 교통을 연상시킨다. 자크 브로스는 [식물의 역사와 신화]에서 식물 내부에는두 가지 흐름이 정착하는데, 땅속에서 빨아들인 수분과 무기질을 전달하는 상승 수액과 탄소 동화작용의 결과물을 뿌리에까지 전달하는 하강 수액이라고 하면서, 식물은 두 끝점에서 왕성하게 생장함을 강조한다. ‘흡입하고 그 흡입물을 여러 곳으로 흘려 보내는 내부체계’(자크 브로스)는 동물적 능동성 없이도 창조의 에너지를 수급할 수 있는 것이다. 문혜정의 작품에서 식물은 단지 식물에 머무르지 않는다. 식물 내부에 동물성(여러 관들의 복잡한 얽힘 등)이나 광물성(기둥같은 기념비적인 구조)이 발견된다. 연꽃부터 나무까지 그의 식물은 자연의 대표자로서의 위상을 지닌다.

연꽃풍경-2004-130x520cm-oil on canvas

풀숲-2004-65x120cm-oil on canvas

묘사된 자연-1999-130x390cm-oil on canvas
그러한 가치평가는 지구 생명체를 지속 가능하게 했던 식물의 선재(先在)성을 생각할 때 무리는 아니다. 문혜정은 구불구불한 작은 나무들 보다는 크고 곧은 나무가 좋다고 말한다. 포플라 나무 이전에 가로수로 많이 심어졌다는 미루나무는 그 모델일 수도 있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오랫동안 타국에 있었던 이의 향수가 배어 있다. 풍경 속 나무는 고향으로 이동시키는 매개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풍경은 식물이 있는 자리인 셈이다. 곧게 뻗은 가로수 길을 끝없이 걸을 때 작가가 젊은 날 이국에서 만난 유적지의 기둥들을 생각할 수도 있다. 문명 또한 길게 보면 자연에 포함된다. 지상에서 가장 부피가 크고 오래 살아있는 유기체가 바로 나무다. 천궁을 받쳐주는 듯한 나무 기둥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보들레르가 나무숲에서 신전의 기둥을 보았듯이, 나무숲 길은 피톤치드만큼이나 신성한 기운을 내뿜는다. 매해새로운 잎을 내고 꽃피우는 나무는 인류에게 부활이라는 개념을 상상하게 했다.
회화가 중심이 되는 이번 전시에도 식물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의 회화는 드로잉에 바탕하며 드로잉의 선은 식물처럼 자연스럽게 성장하기를 바란다. 선은 성장이고 길이다. 인삼밭이나 연꽃밭 등은 회화뿐 아니라 여러 형식으로 표현되곤 했다. 2000년대 초에 주로 발표한 연꽃 소재의 작품들은 연꽃의 형태와 생태와 관련된다. 어둡고 질척한 바닥에서 공기를 가득 품고 위로 날아오르려는 듯한 밝은 뭉치는 연꽃으로부터 출발한 생명에 대한 이미지다. 탯줄처럼 연결된 긴 선은 자신의 성장 에너지를 하늘로부터 오는 빛만큼이나 지상의 현실계에 닿아 있음을 말한다. 문혜정의 연꽃은 동물같은 느낌이다. 긴 줄기는 창자를 연상시키며 벌어진 꽃봉오리는 장의 말단인 구강을 닮았다. 어두운 바탕에 밝은 선으로 그어진 형상은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고통을 전달한다. 식물은 동물과 달리 스스로 소리를 낼 수 없지만, 그의 식물은 어둠 속에서 외친다.

꽃-1994-60x120cm-oil on canvas

정원-1994-80xx120cm-oil on canvas

겨울-1994-120x150cm-oil on canvas

가을-1992-120x150cm-oil on canvas
식물 주변에는 집이나 거처를 연상시키는 구조물이 있다. 그것의 기둥은 작가가 유적지에서 본 거대한 기둥과는 다르지만, 여전히 굳건한 의지를 표명한다. 연꽃은 무채색으로 그려질 때 도 탱글탱글 탄력있는 모습이 생명의 리듬과 활력을 담고 있다. 식물을 포함한 여러 소재들이 그려진 1990년대 작품은 곧잘 대조의 어법을 구사한다. 무채색 톤의 배경 속에 떠 있는 듯한 두 개의 긴 덩어리는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형태다. 하지만 배경/형태, 무기물/유기체라는 대조항이 느껴진다. 그것이 무엇이든 심연으로 가라앉지 않고 떠 있으면서 어디선가 들어오는 빛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접힙과 펼침, 상승과 하강의 대조도 있다. 수술이 달린 채 떨어진 꽃잎 같은 형상은 꿈틀거리는 듯한 생의 의지를 표명한다. 위로 일으켜지려는 형상들은 아래로 끄는 삶의 중력을 이겨내려는 의지다. 물론 보는 이의 심리에 따라 누우려는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다.
반복되는 선의 중첩은 움직임을 느끼게 한다. 배경 색과의 대조되는 밝은 형상은 빛을 머금고 있다. 천상의 빛을 잡아 지상의 존재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식물 특유의 생태와 관련된다. 만개했던 모습만큼 시든 잎도 예술적 성찰의 대상이 된다. 문혜정의 작품에서 두 개 또는 한 쌍으로 나타나는 형상들은 날개와 비교된다. 개화가 하늘을 향해 한껏 날개를 펼친 상태라면, 뿌리와 단절된 채 수분을 잃고 돌돌 말리는 꽃잎은 거대한 순환의 주기 속에서 다음을 기약한 채 접혀 있는 날개와 비교할 수 있다. 펼침/접힘에 얽힌 현실성/잠재성의 관계에 대한 질 들뢰즈의 사상은 씨앗(알) 시작해 다시 씨앗으로 돌아가는 주름잡힌 생명과의 비유에서 직관된다. 문혜정의 작품을 이루는 배경과 형상은 음과 양의 색감으로 대조를 이룬다. 2000년대에 그려진 연꽃밭은 활력이 넘치는 연꽃 무리들이 화면 가득히 잡혀있다. 작가의 조건이 밝아졌다기 보다는 어둠 속에서 밝은 기운을 얻기 위한 역설적 방식이다.

꽃잎-1991-100x200cm-oil on canvas

날개-1992-70x140cm-oil on canvas

세송이꽃-1992-80xx120cm-oil on canvas
때로는 녹색의 큰 잎 위에 자리한 밝고 화사한 연꽃의 무리나 어두운 배경 속에서 빛나는 꽃의 무리 등, 재현적 형태에 충실하기도 하다. 양평에서 작업했을 때 많이 그렸던, 이름 모를 야생화 무리가 표현된 작품을 포함하여, 대개는 추상적이다. 꽃은 시작에 불과하고 그가 도달하는 곳은 꽃이 아니다. 자신을 포함한 생명의 과정이다. 꽃은 영감의 시작일 뿐 붓질은 생명에 내재한 춤으로 이어진다. 파도처럼 하얀 포말로 보이는 물 위의 형상에서 하트 모양의 형상이 보이는 작품은 마치 붕 떠 있는 듯한 역동적인 감정을 표현한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는 걷기보다는 유영하듯, 날아가듯 지나간다. 어두운 바탕과 밝은 형태의 대조는 움직임의 속도와 궤적을 나타낸다. 연(蓮)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꽃, 잎, 뿌리 등 모든 것이 유용한 식물이기도 하다. 문혜정의 또 다른 주요 식물성 소재인 인삼은 더욱 그렇다. 그의 작업 많은 부분이 육체적 노동을 포함한다.
길게 작업해야 하는 이들에게 체력 관리는 중요하다. 특히 여러 나라를 오가는 작업과 전시일정 속에 있는 대형 설치작품이 그렇다. 설치작품이 사진이나 동영상, 오브제, 회화와 드로잉 등으로 변주되는 일도 흔하다. 인삼밭 시리즈는 힘들 때 작가의 원기를 북돋아 주었던 인삼으로부터 출발했다. 독일 체류 시부터 발표됐으며, 고양 스튜디오 1기 작가로 발표한 것 등 여러 버전이 있다. 식물의 주요성분인 섬유질이라는 소재는 1990년대 초 삼베와 면을 활용한 오브제작업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작가에게 힘을 주었던 인삼을 달여 먹기 위해서는 그 소재를 접했을 것이다. 삼베의 원재료 또한 의학적 기능이 있다. 삼베 소재의 오브제들은 무언가를 싸고 싼 것이 풀어져 터져 나오고 하는 이미지가 있다. 때가 되어 포자가 흩날리는 모습은 디아스포라를 연상시킨다. 문혜정은 유럽과 한국을 오가면서 보따리를 수없이 쌌는데, 포장된 작품을 확인해야 할 때가 종종 생겨 포장을 약간 벗기거나 반투명한 종이로 덮은 또 다른 작품을 파생시켰다.

풍경 Ⅰ-1992-95x150cm-oil on canvas

풍경 Ⅱ-1992-95x150cm-oil on canvas
독일에서 공모전에 수상까지 한 사진 또한 처음에는 작품의 기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모두가 어느 정도는 물적 자원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는 결핍으로부터 창안된 아이디어다. 설치와 드로잉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대규모 설치작품을 바다 건너로 이동시켜야 하는 문제가 있다. 전시에 따라 설치와 드로잉을 함께 연출하기도 한다. 2005년 고양 스튜디오에서 재연된 인삼밭 설치작품은 조형적으로 점, 선, 면의 모든 요소가 어우러진다. 솜이나 발, 무엇보다도 많은 인삼뭉치들은 문혜정의 작품에 일관적으로 보이는 선적 요소와 관련된다. 인삼밭 시리즈는 나무의 수직적 구조를 보충할 수 있는 횡단적 구조다. 얽히고 섥혀 어디로 이어질지모를 복잡한 선적 요소가 두드러진다. 그의 회화는 기본적으로 드로잉에 바탕한다. 유려하게흐르는 선이든 얽히고설킨 선이든 촉수처럼 뻗어나가는 선은 무엇으로 변모될지 모른다. 그 선들 모여 결국 그가 걸어왔고 걸어갈 길이 되지 않았을까.
이번 전시 작품에서 자연은 푸르기도 하고 색이 빠지기도 하지만, 문명은 거의 무채색으로 표현된다. 1990년대의 무채색 톤 풍경 속 문명은 굳건한 수직 기둥 형상들로 나타난다. 모든 스러지는 존재의 직립 의지는 역설적이다. 산이나 나무를 떠올리는 인공 구조물들은 사람은 가도 구조가 남는다. 1986년 기둥만 남아있는 파르테논 신전을 보고 영감을 받은 이후, 인도, 이집트, 그리스 등 문명 발상지에 있는 기둥에도 주목했다. 그러한 기둥 유적들에서 ‘내 나라를 세우겠다’는 왕의 포부와 의지를 느끼면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열망을 키워갔다. 문혜정이 오랫동안 머무르고 작업했던 독일의 초월적 감수성, 절대, 관념, 정신, 의지 등도 떠올린다. 독일의 대도시들을 혼자 횡단하곤 하는 여정을 통해 그 나라를 서서히 이해할 무렵, 1990년 여름 방학 때의 미국 방문은 작가에게 양자 간의 문화적 차이를 크게 느끼게 한다. 이러한 문화적 풍토의 차이는 많이 지적되어 왔다.

흰꽃 Ⅰ-1991-150x150cm-oil on canvas

흰꽃 Ⅱ-1991-150x150cm-oil on canvas
피터 게이는 [바이마르 문화]에서 독일 지식인들은 영미권의 ‘장사꾼’ 같은 심리상태와 독일인의 정신성과 비교하였다고 말한다. 피터 게이에 의하면 ‘서구의’ 가치로부터 분리시켜, 자신을 이보다 격상시키려 했던 것은 독일적 이념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그가 든 다음의 대표적인 예들은 나름대로 설득력 있다; 베르너 좀바르트의 [상인과 영웅]은 (서구의)상인들과 (독일의)영웅들을 대비시킴으로서 상업적 정신을 비난하였고, 퇴니스의 사회학 고전인 [공동사회와 이익사회]에서는 공동체의 진정한 유기적 조화와 거대한 사회의 물질주의를 대비시켰다.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혀졌다. 피터 게이의 결론은 독일인에게 적들이란 인간성을 빼앗는 기계, 자본주의적 물질주의, 신이 없는 합리주의, 뿌리 없는 사회, 세계주의적인 유태인들, 거대하고 모든 것을 삼키려는 도시 등이었다.
이러한 총체적인 사고가 정치적으로는 파시즘으로 기울어지기도 해서 전범국가로서 금기사항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와 달리 예술은 남들을 동원하지 않는 자기만의 총체성이 자리 하는 곳이다. 문혜정은 1989년부터 2010년까지 이어진 독일에서의 수학 및 작품활동의 시기에 ‘기둥은 나의 의지이고, 꽃은 나의 자연이고, 풍경은 나의 작은 세계다.’(1994)라고 밝힌 바 있다. 독일에 가서 유화나 아크릴 중심의 회화 작업에서 다쟝르로 전환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회화 특히 선적 요소는 2005년 이후 한국 정착 이래에도 작업의 근간을 이룬다. 1988년 겨울 독일에서 작가는 지도 교수와 말이 잘 안 통하는 상황에도 당시까지 그렸던 드로잉 뭉치들을 보여주어 높이 평가받았다고 회상한다. 문혜정의 작품이 주로 무채색이었던 것은 예술하는 삶의 불안과 우울을 포함해서 드로잉이라는 모태 언어의 특성이 반영된 것은 아닐까. 구불구불한 선이든 똑바로 된 선이든 말이다.

기둥이 있는 풍경-1991-70x140cm-oil on canvas

풍경-1991-100x200cm-oil on canvas

섬-1991-45X70cm-oil on canvas
꽃대에 꽃이 달리듯, 건축의 허리는 기둥이다. 문화 또한 개화와 퇴화의 주기가 있다는 점에서 자연과 닮았다. 빛 이외에 자연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직선은 인공물의 특징이며, 문혜정의 풍경 속에 자주 등장한다. 어떤 철학자는 높은 곳을 향하는 건축에의 의지 속에서 서양 형이상학의 본 모습을 본다. 무채색 톤의 구조 사이에 자리한 분홍과 노랑의 띠는 한국의 봄 풍경의 색감을 결정짓는 식물과 관련된다. 어둠 속에 놓인 긴 상자는 관을 떠올린다. 삶과 죽음은 빛과 어둠의 관계와 같다. 하늘을 향하는 나뭇가지만큼의 뿌리가 땅 깊숙이 박혀있지 않은가. 생명의 환희가 가능한 것은 그만큼의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무게중심의 추를 잊지 않는다. 유화 앞에 놓인 오브제는 그림 속 형상을 현실 속에 형태화했고 첨가한 가시를 통해 찌르는 듯한 감정을 표현한다. 흰 구름 두 가닥이 걸쳐있는 섬 하나가 화면 한가운데 배치한 작품은 섬같이 존재하는 고고하고도 고독한 자아를 보여준다.
섬은 무의식과 의식의 세계를 층지어 구별한 모델이 연상된다. 하늘을 향한 섬 꼭대기는 승화하는 초자아의 영역이다. 진흙탕에서도 꽃을 피우는 연꽃과 같은 방식이다. 연꽃은 40대 전후에 돌아온 고국이 타국보다 그를 더욱 힘들게 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그려졌다. 연꽃에 대한 상징주의는 불교가 대표적이지만, 깨달음의 과정과 관련된다는 점에서는 보편적이다. 문혜정의 연구에 의하면 문명의 발상지에는 모두 연꽃이 등장한다. 총체적 위기의 순간을 맞은 후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작업과 일치시키는 과정은 표현보다는 수행과 더 가깝다. 그에게 연꽃은 생명이다. 까맣게 그려진 관은 죽음까지 포함하는 삶을 상징한다. 최근에 그린, 가운데 빛이 흐르는 나무숲 풍경에는 ‘내가 가는 길이, 내가 저런 모습이면 좋겠다’는 소망이 투사되어 있다. 초월적 의지를 상징하던 기둥은 자연스러우면서도 기념비적인 나무로 변화했다. 작가는 굳이 의지를 불태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굳건한 나무의 모습에 공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