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구니로 구매한 쓰레기봉투에 물건을 사들고 올 때마다 마치 쓰레기 한 봉지를 사오는 느낌이 든다. 여기엔 충동적인 과잉구매도 한몫한다. 이러한 과잉은 빈자부터 부자까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여러 계층에서 비슷하게 나타난다.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구매 자체의 만족과 관련되는 물신주의는 필수적이다. 상품을 손안에 넣어 약속된, 또는 기대된 미래가 성취되면, 곧 관심에서 멀어져 쓰레기에 가까워진다. 변덕스러운 소비자의 짧은 욕망에 부응했던 잔여물은 모두 어디로 가는가? 한 철 입고 의류수거함에 버려진 ‘패스트 패션’은 극히 일부만 재활용 되고, 대부분 개발도상국으로 수출된다. 선진국으로부터 수입한 폐의류가 산처럼 쌓인 광경은 마치 먼지로부터 탄생한 우주가 다시 먼지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반복하듯 묵시록적이다. 자료 사진에 따라서는 대형 추상표현주의 회화같은 질감과 색감을 보여주기도 한다. 1970년대 서울의 쓰레기 매립지였던 난지도 풍경도 이와 비슷했다. 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나라는 오염이 없으니 자연풍광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공장과 시장, 자연과 인간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그들이 사지도 사용하지도 않은 상품의 찌꺼기다.



배종헌, <기후의 원천_콜로세움>, 2010, 319개의 나무상자에 발견된 오브제와 텍스트,
5채널 영상, 가변설치 *경기도미술관 소장

“일상에서 버려지는 사물들, 분리수거의 대상들에서 ‘기후’, ‘환경’과 관련한 텍스트들을
찾아 각 사물들의 해당 진열장의 전면 유리에 표기하였다. 작가는 이상기후를 단순히
지구환경 문제가 아닌 사회 문화 현상으로 해석하였다.
(배종헌, 작업집서, 2015, 서울:모노클, p.505)”


질곡의 총량은 줄지 않은 채 폭탄돌리기처럼 약자에게 전가되었다. 인도네시아의 한 마을에 집집마다 쓰레기가 허리만큼 쌓인 마당의 모습을 전한 기사(경향신문 7.8)에 의하면 이 작은 마을에 다국적 쓰레기가 모인 이유는 재활용 종이를 만드는 큰 공장에 쓸 수 있는 재료를 재가공하는 일에 온 주민이 매달리면서부터다. 그 이전에 농사를 짓고 살았던 그들이 수십 년째 사들인 다국적 쓰레기는 과잉 생산과 소비의 산물이며, 이는 막연한 환경 오염이 아닌 누군가의 삶의 터전 그자체를 잠식한다. 오죽하면 ‘쓰레기 식민주의(Waste Colonialism)’라는 용어까지 생겼을까. 대량생산/소비 사회와 더불어 쓰레기가 양산되는 또 하나의 현장은 전쟁터다. 천문학적 가격의 최첨단 무기는 단시간에 소중한 삶의 터전을 쓰레기로 만든다. 2년간 수만명이 죽어 나간 전쟁터 가자지구에서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녹여 만든 연료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유일한 밥줄이라고 한다.(AP/뉴시스, 6.25) 얼굴과 손이 온통 숯검댕이가 된 채 작업중 발생한 유독성 물질에 노출된 청년의 모습은 자원이 재활용되는 현장일까? 전쟁 이후 하루 평균 90명이 굶거나 총에 맞아 죽는(mbc 뉴스, 7.30) 생지옥이 끝나지 않는 것은 인종‘청소’로 분쟁지역을 ‘정화’하겠다는 정치 지도자의 편집증적 이데올로기다.

쓰레기의 전가는 약자가 감내해야 하는 운명이 아니라, 사회적 해법이 필요한 사안이다. 환경 오염의 주범은 많이 생산·소비한 계층이나 국가이다. 빈번한 자연재해도 인간이 유발한 측면이 있는 쓰레기의 원천이다. 쓰레기를 양산하는 전쟁은 누군가의 사업을 성장시킨다. 산업혁명을 먼저 겪고 시장과 원료의 공급원인 식민지를 거느렸던 선진국들은 이제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면서 자신들이 올라간 사다리를 걷어차고, 또 다른 진입장벽을 쌓기에 바쁘다. 대개 쓰레기는 플라스틱/병/ 종이 등, 분류가능한 단계에서 자원으로 재활용된다. 하지만 분류되기 어려운 최종 국면에서 쓰레기는 진짜 쓰레기가 된다. 쓰레기는 그저 생산과 소비의 주기 속에서 생겨난 부산물이 아닌, 사회적 의미를 담고 있는 만큼 예술적으로도 중요하다. 초현실주의 이후에 버려진 사물에 대한 시적인 해석이 가능해졌다. 자연과 문명이 만들어낸 모든 것을 다루는 예술은 사용과 분류의 끝에 있는 최종적인 잉여물이나 나머지들 또한 작업의 대상으로 삼는다. 탈코드화를 지향하는 문화적 흐름 속에 나머지 것들을 의미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때 예술은 마지막 재활용의 장으로, 천한 소재를 귀하게 변화시킨다. 작품의 메시지는 천함과 귀함 사이에 내재한 역설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