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경성 남산에 일본 사찰이 들어섰다. 한때 대한제국의 군인들을 기리던 장충단(獎忠壇)이 스러진 자리였다. 박문사(博文寺), 한국통감부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도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세운 사찰이었다. 이듬해 그 본당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고요하고 아름다운 불상 하나가 안치되었다. 당대 일본 최고의 조각가이며, 우리에게는 김복진의 도쿄미술학교 조각과 스승으로 잘 알려져있는 다카무라 고운(高村光雲)이 깎아낸 목조 석가여래좌상이었다.
부드러운 나무의 결 위에 표현된 온화하면서도 깊은 명상에 잠긴 듯한 표정, 아름다운 신체. 보는 이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이 불상의 자태는 숭고한 종교적 아우라와 거장의 예술혼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고요한 아름다움은 순수하지 않았다. 그 안에는 한 정치인의 망령과 식민 지배라는 제국의 야망이 소란스럽게 깃들어 있었다. 본래 총독부가 구상했던 것은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이었다. 그러나 동상이 주는 노골적인 위압감 대신, 그들은 더 교묘한 방식을 택했다. 왜 하필 불상이었을까? 동상은 거리에서 모두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가시적인 권위의 상징이다. 반면 사찰 깊숙한 곳의 불상은 종교의 외피를 쓰고 더 은밀하게, 더 내면적으로 파고든다. 권력은 때로 가장 성스러운 공간에 자신의 욕망을 숨겨두는 법이다.

좌) 다카무라 고운, 〈박문사 석가여래좌상〉, 1933, 목조
우) 박문사 석가여래좌상 개안식 사진, 1933.9.17, 가장 왼쪽 다카무라 고운
이 불상을 조각한 다카무라 고운은 메이지 시대 일본이 제국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함께한 예술가였다. 그의 조각칼은 예술혼뿐 아니라,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도 함께 깎아내고 있었다.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에 출품된 조각 <노원(老猿)>은 문명국 일본을 서구에 증명하였다. 1898년의 우에노 공원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상>, 1900년 황거(皇居) 앞 광장의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 상>은 내부적으로 일본의 국가주의를 강화하는 장치로 활용되었다. 또한 그가 깎은 불상은 호국과 애국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1931년 도쿄 대원사 소장 불공견색관음보살상, 허공장보살상은 전몰자를 위로하기 위해 제작된 기념물이었다. 그가 비슷한 시기에 제작한 박문사의 불상 역시 단순한 종교적 존상을 넘어서는 제국 일본의 표상이었다.
박문사의 불상은 그저 법당에 놓인 장식품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움직이는 선동의 무대장치였다. 불상 앞에서는 이토의 기일마다 성대한 추도식이 열렸고,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의 전사자들을 위한 위령제가 거행되었다. 불상을 향해 모은 두 손과 경건한 합장은 어느새 이토를 향한 추모, 나아가 제국을 향한 충성 맹세와 뒤섞였다. 불공을 드리는 염불 소리는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염불이 되었다.
이처럼 불상은 동상과 다른 방식으로 기능했다. 외부에 직접 노출되지 않고 사찰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반복적인 의례와 언론 보도를 통해 그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지속시켰다. 박문사는 불상을 통해 이토의 통치 업적을 기념하고, 일본과 조선 불교의 통합을 명분으로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제국주의의 상징 공간으로 기능했다. 불상의 온화한 미소 뒤에서, 식민 통치는 종교의 이름으로 교묘하게 정당화되고 있었다.
1945년 해방 이후, 제국의 욕망이 서렸던 박문사는 허물어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렇다면 거장의 손에서 태어나 한 시대를 증언했던 석가여래좌상은 어디로 갔을까. 안타깝게도 불상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 행방은 오늘날까지도 묘연하다. 육신은 사라졌지만, 그 존재는 지금 우리에게 서늘한 질문을 던진다. 아름다움은 과연 순수할 수 있는가. 예술은 권력의 도구라는 운명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가. 우리가 무심코 감탄하며 마주하는 오늘의 이미지들 속에는, 또 어떤 시대의 욕망이 은밀히 깃들어 있을까. 사라진 불상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역설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 정다영(1994- ) 명지대 미술사학과 박사수료.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