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현실 사이의 완충적 시공간
이선영(미술평론가)
정지인이 화면 가득 그린 꽃송이는 아직 꽃잎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살짝 건드려도 우수수 꽃잎을 떨궈낼 것같다. 내부 꽃술이 보일 정도로 만개한데다가 자세히 보이지 않는 꽃의 부분까지 조명하는 해부대같은 즉물성 때문이다. 빛의 과다로 휴식할 수 없는 문명의 식물은 향기도 모두 날려버린다. 시각에 호소하는 그림은 향기도 촉감도 소리도 상상에 맡겨진다. 꽃이 지면 열매를 기약하지만, 꽃과 어울릴만한 배경을 지워버린 꽃은 자연과 단절되어 있다. 활짝 핀 아름다움을 다소간 연장시켜줄 줄기가 안보이는 것도 있다. 꽃들은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도려내진 존재처럼 튄다. 화병의 꽃이라면 곧 뽑아내야 하는 끝물이다. 꽃밭을 그린 작품도 있었지만, 모노톤 배경에 한 송이만 덩그라니 있는 작품들이 더 많았다. 굳이 꽃의 외관을 변형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채 죽은 잘 말린 꽃다발처럼 아름다운 외관을 유지하고 있지만, 꽃에 대한 통상적인 기대치에 부응하지 않는다.

믿기지 않던 시간 Acrylic on Canvas 70x70 cm 2025
이쯤 되면 굳이 왜 꽃을 그렸는지도 불분명하다. 누구나 좋아하고 누구나 그리는 꽃은 그에게 선택의 부담을 줄였을 것이다. 그저 그리는 행위에만 신경 써도 될 것이다. 마침 꽃은 그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색의 보고 아닌가. 모노톤의 배경은 여러 꽃들이 그려진 작품들이 배색 실험의 장이 되게 한다. 색은 단독으로가 아니라, 늘 다른 색과의 관계 속에서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꽃 한송이는 유아독존같지만, 색이라는 조형적 언어를 통해서 주변과 관계를 맺는다. 늘 관계가 문제다. 타인과 함께 해야 하면서도 자기를 유지하기 위한 싸움이 누군가에게는 매우 힘들 수 있다. 캔버스 한가운데에 배치한 도상은 그것이 무엇이라도 초상의 성격을 가지기에 굳이 꽃이 아니어도 상관은 없다. 최근 작품에서는 하늘이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의 작품에서 꽃을 인물로 치환한다면 그 인물은 정면이나 하늘을 보고 있다. 마주하거나 위에 있는 존재와의 잠재적인 시선의 교환이 있다.
절대적 타자와의 이러한 교감은 그의 작품에서 아름다운 꽃과 아름다운 예술을 단지 동일화된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꽃의 섬세함은 그만큼의 취약함을 표현하기에 충분하다. 가령 그것은 돌이나 뿌리 깊은 나무, 사회의 지배적 상징처럼 굳건하지 않다. 정면성에 충실한 꽃은 마치 문장(紋章)같이 기념비적이지만, 단순하게 처리된 배경 때문에 곧 말려들어갈 꽃잎의 가는 선은 도드라진다. 활짝 핀 꽃은 그만큼 아름다워야 할 생을 노래하기보다는 무덤덤한 편이다. 외침도 비명도 남은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 바닥을 친 상태의 존재에겐 비표현적 표현만 남았다. 아름다움만큼이나 상실감과 부재가 느껴지는 그의 작품은 상처와 치유라는 이전 전시 내용의 연속이다. 프로이트가 논의 한 바의 정신적 깊은 상처(trauma)는 ‘자아의 방어벽이 무너져 항상성이 유지될 수 없을 때 발생’(페미니즘과 정신분석학 사전)한다. 단적으로 트라우마는 안전감의 상실이다. 안전한 모체로부터 출생이 원초적 트라우마의 순간이다.

나와 현실 사이의 완충적 시공간 Oil on Canvas 70x70cm 2025
제이 그린버그와 스테판 밋첼의 [정신분석학적 대상관계이론]에 의하면 현실은 곧 사회적 현실을 뜻하며, 생물학에서 빌려온 적응이란 개념은 신체적 생존 욕구에 그 뿌리를 둔다. 대상관계 이론에 의하면 잘 적응하는 사람은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데, 그 방식은 ‘환경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autoplastic), 환경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alloplastic), 보다 호의적인 환경을 찾는 것’(하트만)이다. 그 모두가 안정된 관계에 대한 욕구와 관련된다. 사회적 관계 속의 인간에게 주변의 인정과 지지에 대한 욕구는 자기의 안전감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인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안전은 ‘불안으로부터의 자유’(설리반)이고 ‘욕동 긴장들이 통제되고 조절된 상태’(프로이트)로 정의된다. 안전을 요구하는 이는 위험한 세계로부터 도망쳐 방어적인 덮개 안으로 숨는다.
퇴행적으로 보일 수 있는 숨기는 상실한 관계 경험을 되찾고자 하는 시도다. 삶으로부터 도피한 퇴행한 자아는 보다 좋은 환경에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출생 이전에 경험했던 안전한 자궁 속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퇴행은 도피와 재생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다. 정지인의 작품에서 꽃송이나 천 등의 도상은 그러한 요구를 나타낸다. 죽을 때는 모르지만 태어날 때는 누구나 강보에 싸인다. 또한 식물은 인류에게 재생이라는 상상을 가능하게 해준 종적 특징을 가진다. 난자와도 같이 생긴 둥근 꽃은 삶과 죽음을 순환시킬 것이다. 이불 속에서 모태 속 아이의 자세로 죽은 듯이 푹 잘 수 있을 때 그는 진정 재생할 것이다. 정지인의 꽃이나 이불은 지상이나 실내를 벗어나 하늘에도 자리한다. 비좁은 밀폐된 환경으로부터 탈주는 퇴행에서 승화로의 도약이다. [정신분석학적 대상관계이론]은 식물이 흙, 물, 햇빛과 접촉하면서 자라나듯이 자아는 현실 또는 내적 대상관계를 통해 자란다고 비유한다.

나와 현실 사이의 완충적 시공간 Oil on Canvas 70x70cm 2025
‘하지만 좋은 대상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나쁜 대상과의 관계를 통제하기 위해 자아를 분열시키는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인간이 타자와 관계를 맺는 이유는 그것이 생존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과제가 도전받을 때, 개인은 분리된 존재라는 사실을 잊게 해주고 아직도 자신이 안전하고 행복한 자궁 속에 살고 있다는 환상을 갖고 싶어한다.’(대상관계이론) 이같은 맥락에서 이번 전시의 또 다른 소재 이불은 꽃만큼이나 환상적이다. 2021년경 여행지의 설렘부터 2022년에 병상의 이불로 급변하는 와중에 다양한 은유로 펼쳐지는 중이다. 그의 이불은 정적이지 않고 움직인다. 복잡한 주름의 흐름은 기이한 풍경으로 변모한다. 우선 이불은 피로한 심신을 보호해준다. 하지만 그의 이불은 보호의 층이라는 점에서도 동적이다. 그것은 수면이라는 깊은 몰입의 상태와 유사한 작업의 과정에 의한다. 꽃과 이불은 다양한 색과 형태로 펼쳐지거나 접혀진다.
꽃에서 이불, 전혀 다른 소재같지만, 이리저리 주름 잡힌 표면은 꽃잎과 이불의 공통점이다.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는 꽃이 있는 작품은 빨래줄에 말리는 이불보처럼 상쾌한 바람과 빛을 받고 있다. 주름은 수용 능력에 융통성이 있다. 식물의 경우 씨앗으로부터 자라나기 위해 주름이 접히고 펼치는 과정을 거친다. 무궁화나 나팔꽃같은 부류는 꽃의 마지막 국면에서 다시 접히기까지 한다. 정지인의 작품 속 이불은 정갈하게 펼쳐있거나 개켜져 있지 않다. 그래서 주름이 더욱 불규칙적이고 형태 변형이 다양하다. 꽃이 은유적 초상이듯 이불은 사용자가 전제된다. 그의 이불 안에 사람은 없다. 있다고 해도 누군지는 모른다. 본래 이부자리는 가장 사적인 공간이며, 수면은 온전히 자신일 수 있는 시간이다. 대낮의 이성이나 노동이 아닌 꿈과 무의식의 시공간이다. 여기에서 상대할 타자는 오직 자신 안의 타자일 뿐이다. 작가는 자신의 예술 또한 그러한 위상을 가지길 바란다.

나와 현실 사이의 완충적 시공간 Oil on Canvas 90.5x117cm 2025
개인적으로는 ‘불안의 센서가 켜지면 예민해지고 잠을 못 자던’ 불면증의 기억과 관련되는 이불은 푹 자고싶은 바램과 뒤척거린 듯한 흔적이 겹쳐있다. 이불에 대한 최초의 영감은 집의 이부자리가 아닌 여행지이다. 숙소 창으로 가득 들어온 빛을 받는 자리였다. 그는 어수선한 이불의 주름이 만들어낸 형태에 매혹됐다. 산과 물처럼 흐르는 주름진 선은 풍경처럼 다가왔다. 공간적 흐름이자 시간적 흐름이다. 휴식을 시간을 포함한 시간의 흐름은 감당하기 힘든 사건과 충격을 완화시키는 역할도 한다. 그에게 흐르는 시간은 무엇보다도 상처가 아무는 시간을 의미한다. 꽃송이가 여럿 나오는 작품에는 정지된 매체인 그림에 시간을 넣는 방식이 잘 나타나 있다. 작은 송이부터 만개한 단계까지 한 덩어리로 표현된 작품은 꽃이 피어나는 과정이 잠재적 운동감으로 나타난다. 여행 중의 침구는 휴식 중의 휴식의 시공간이다. 이불로 상징되는 숙면은 의학적으로도 뇌 안에 쌓인 노폐물을 씻어내고 활력을 되찾게 한다. 하얀 이불은 상처를 감싸는 붕대처럼 회복을 도울 것이다.
같이 등장하곤 하는 구름은 푹신한 이부자리에서처럼 좋은 꿈을 기대한다. 핑크빛 구름이 살짝 드리워진 작품에서 꽃은 낭만적인 몽상으로 피어오른다. 잠은 전형적인 몰입의 상태를 말한다. 예술 또한 그렇지만, 예술이 이성과 노동을 초월하여 마술처럼 뚝딱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민과 고통의 자리인 자아와 의식을 뒤로하고 무의식의 흐름에 맡기는 과정으로서의 공통점이다. 평소에 열심히 그림을 그려왔다면 무의식은 도약과 비약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작가는 꿈과 잠, 몰입, 그리고 작업 그것이 수렴되는 지/시점을 향한다. 커튼이 젖힌 창밖으로 푸른 하늘이 보이는 작품의 실내에는 천이 가득하다. 천의 주름과 접힘으로 인해 미로와도 같은 복잡한 지형이 떠오른다. 잠이 가능하게 했을 꿈과 무의식 또한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시공간을 통과하는 과정이다. 지름길이 권해지는 시대, 미로같은 공간은 낭비이고 부조리일 것이다. 그러나 꿈이 없다면 이성도 노동도 없다. 무의식이 없다면 의식도 없다. 잠이 없다면 치유도 없다. 예술 또한 그 연장선 상에서 이해된다. 즉 예술이 없다면 문명도 없다.

나와 현실 사이의 완충적 시공간 Acrylic on Canvas 90.5x117cm 2025
[정신분석학적 대상관계이론]에 의하면 환상은 현실에 대항하는 마술적 요새로서 작용한다.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환상(fantasy)은 환각(illusion)의 경험에 의존한다. 환각의 순간에 안정된 정서 상태에서 외부세계와 교류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 현실로부터 철수하는 환상은 퇴행적이지만, 거시적으로 볼 때 환상은 개인이 현실과 관계맺는 우회로이다. 환상은 새롭고 창조적인 적응 능력과 현실로 돌아올 수 있는 숨 쉴 공간을 만들어낸다. 현실을 직시하라는 예술사조도 있지만, 그만큼의 강도와 빈도로 현실도피의 사조도 있게 마련이다. 도피적인 예술 또한 현실적 예술만큼이나 삶과의 역학관계에서 그 필연성이 생겨난다. 도피적 예술은 현실적 고통이 원인이고, 고통을 완화시켜 준다. 정지인의 작품에서 해질녘에 실제로 볼 수도 있는 핑크빛 구름은 작가에게 로맨틱한 상상을 의미한다. 달콤한 솜사탕 같은 구름은 쓰디쓴 현실에 대한 반대급부이다.
구름 위에 떠 있는 꽃 주변의 천 주름은 춤추는 듯 활력이 있다. 나를 소외시키는 낯선 추상적 공간이 아니라, 거칠 것이 없는 나의 자리다. 꽃 아래의 천 색깔은 배경의 분홍빛 구름의 색과 비슷하다. 양자의 시각적 연결은 꽃의 자리 또한 구름처럼 포근할 것이라는 기대로 이어진다. ‘꽃구름’이라는 낭만적 어휘도 있지 않은가. 꽃과 같은 색감으로 천을 배열의 작품은 망가지기 쉬운 섬세한 꽃송이를 보호하는 듯하다. 그의 꽃은 얼굴을 떠올리는데, 특히 꽃의 내부기관까지 노출된 형태는 외부를 향해 활짝 열려있다. 대지가 아니라 하늘에 떠 있는 듯한 꽃의 위치는 지상적인 염려로부터의 초월이다. 그의 작품 속 풍경은 평원부터 우주에 이른다. 초록색 계열 천은 드넓게 펼쳐진 평원을, 어둠 속에 핀 꽃은 어두운 배경 때문인지 성운성단의 모습이 겹쳐진다. 실제로 천문학에서는 5000광년 떨어져 있는 장미성운이라고 불리우는 별의 무리를 기록하고 있다.

나와 현실 사이의 완충적 시공간 Oil on Canvas 93x185cm 2025

나와 현실사이의 완충적시공간 Oil on Canvas 38x71cm 2025
정지인의 꽃 역시 ‘뜨거운 성단별에서 나오는 자외선으로 주변 성운이 빛나듯이’(장미성운 설명문 참조) 미광(微光)을 발한다. 작가에게 빈 하늘은 지상의 크고 작은 번뇌로부터 휴식을 준다. 푸른 하늘에 먹구름이 끼는 것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한 현상이다. 세상사의 많은 부분이 운에 맡겨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에게 작업은 운을 필연으로 바꿀 수 있는 장(場)이다. 꽃과 침구류, 그리고 핑크 구름과 푸른 하늘이 보이는 정지인의 작품이 행복이나 휴식에 대한 바램을 담고 있다면, 그 또한 삶과의 역학관계에서 나온다. 삶자체가 예술과 완전히 겹쳐진다면? 이 하나된 상태는 천국이자 지옥일 것이다. 예술은 미적 거리감을 통해 작동한다. 아이가 현실과 직접 닫지 않듯이 중간지대가 있다. 피터 풀러는 [모더니즘 이후의 미학]에서 예술을 아기-엄마 관계의 연장이라는 관점을 피력한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취약하게 태어나는 존재에게 엄마의 위상은 엄청나다.
피터 풀러는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코트를 참조하면서 허기진 아이가 맞는 젖가슴을 가상(illusion)의 순간으로 체험한다고 한다. 자기가 젖가슴을 창조해낼 수 있고 그리하여 자기에게 식량을 제공하고 도움을 주는 하나의 외부세계를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가상 말이다. 인간의 상상력을 생존의 입장에서 해석한 급진적 관점이다. 만족은 만족되지 않는 또다른 현실, 즉 현실에 대한 각성을 야기한다. 인간이 환경과 우호적인가/아닌가는 그의 상상력과 현실에의 각성과 연결된다. 위니코트의 이론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가혹한 현실에 대한 각성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지각되는 것과 주관적인 것 사이의 중간 영역에 속하는 ‘일시적인 사물들’을 활용이다. 위니코트는 장난감이나 인형, 넝마 등의 예를 든다. 완전한 만족을 주었던 세계의 물러남에 대한 위안으로서 아기(또는 아이와 다름없이 위험에 처한 어른)는 중간의 매개적인 경험영역이나 내면적 현실과 외부의 삶이 모두 그에 이바지하는 ‘잠재적인 공간’을 설정한다.

나와 현실 사이의 완충적 시공간 Acrylic on Canvas 70x70 cm 2025
그리하여 아기는 상징들을 활용함으로서 잠재적인 공간을 꽉 채워서 격리 상태를 모면하려고 한다. 이 잠재적인 공간은 아이와 가족 사이에서, 개인과 사회 혹은 세계 사이에서 관념적으로 재생된다. 예술 또한 이와같이 도전받지 않는 중간 영역에 속한다는 가설이다. 정지인의 작품들 또한 타인의 필요와 자신의 독립성 사이의 투쟁 속에서 탄생했다. 그의 작업 또한 주관과 객관 사이의 완충지대를 만들면서 현실 원칙의 쓰라림을 완화시킨다는 점은 마찬가지다. [정신분석학적 대상관계이론]에서도 중간대상과 예술과의 관련에 대한 위니코트의 이론을 중시한다. 그에 의하면 인격 발달 과정에서 중간대상(transitional object)이 가지는 중요성은 그 대상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전능하다는 환각으로부터 객관적인 현실인식으로 발달해가는 중간 지점이라는 성격에 있다. 정지인의 작품에서 꽃이나 이불같은 대상은 중간대상 처럼 ‘일차적 창조성과 현실 검증에 기초한 객관적 인식’ 사이에 있다.
‘우리는 중간 영역에서 주관적인 유아론적 사고에 빠지지 않은 채 현실세계의 논리와 타당성을 떠나 자유로운 생각을 펼칠 수 있다’(대상관계이론). 이러한 중간영역의 대표적인 것은 놀이지만, 예술 또한 해당된다. 정지인처럼 유희와 치유를 동시에 필요로 하는 이의 작품이 그렇다. 그의 작품은 모든 창조적인 과정의 밑바닥에는 중간 대상과의 관계가 있다는 가설로 해석된다. 하지만 ‘잠재적 공간’이나 ‘가상적 세계’는 현대미술에서 배척받는다. 재현주의에서 벗어나려는 현대미술은 중간 매개 단계를 삭제하고, 날 것의 무언가를 제시하려 한다, 생경한 것을 추구하는 현대미술은 은유나 해석이라는 중간과정을 거부하지만, 정작 온갖 이론적 틀로 감싸여 있다, [모더니즘 이후의 미학]은 모더니스트들의 ‘물질에의 충실성’이라는 이론에 기울어진 관점을 통해 훌륭한 예술이라면 응당 제공하는 창조적인 ‘가상의 순간’이 소멸됨을 비판한다. 하지만 ‘물질 그자체’는 얼마나 많은 이론적 담론의 지원을 받는 역설적 개념인가.

나와 현실 사이의 완충적 시공간 Acrylic on Canvas 70x70 cm 2025
재현적 예술은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정지인의 작품은 재현적 요소의 조합을 통해 말한다. 도상과 도상 사이의 도약과 간극은 새살이 돋은 듯한 생성의 자리이다. 공중으로 솟구친 천과 그 위의 꽃은 강한 바람을 맞고 있는 작품에 밝은색 천은 미세한 주름의 명암을 더욱 강조한다. 그 안에는 아무도, 또는 아무것도 없다. 거기에서 부재의 슬픔, 또는 날아갈 것같은 홀가분함을 느끼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붉은색 꽃에서 불타는 열정을 느끼든 피흘리는 희생을 느끼든 그것도 관객의 몫이다. 하늘에서 초월적 존재를 느끼든 세상으로부터의 격리를 느끼든 그것도 관객의 몫이다. 예술은 직시하기에 너무나 가혹한 현실에 대해 은유를 만들어냈다. 세상에 몇 안되는 자기주도형 작업이 바로 예술이다. 시작과 끝의 자유, 여러 갈림길에서 선택의 자유, 그것은 예술이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하는 필연성을 준다. 시작도 끝도 없는 무간지옥(無間地獄), 선택의 여지가 없는 긴 터널같은 일방통행 속에서 푸른 하늘은 쉼표같은 여백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