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에 가까운 정원

  

이선영(미술평론가)


 

이존립은 낙원같은 정원을 그린다. ‘파라다이스’의 어원은 ‘고대 아베스타어로 장벽을 두른 곳이라는 뜻의 pairidaēza’(나무 위키 참조)에서 왔다고 한다. 낙원은 담장이 둘러쳐진 정원이라는 의미가 있으니, 낙원과 정원은 본래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낙원같은 정원의 풍경은 상상에 기반하지만 낙원의 또 다른 은유적 장소인 하늘(heaven)보다는 땅에 더욱 가깝다. 그가 그린 낙원에 담장은 없다. 정원을 가득 채우는 식물은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는 구도라서, 그의 작품에서 정원의 규모를 한정짓는 유일한 요소는 캔버스의 크기일 따름이다. 작은 캔버스는 작은 정원이 대형 캔버스는 큰 정원이 된다. 정원을 화면 안에 담는다기보다는 그림 자체가 정원이 된다. 대형 작품의 경우 관객을 그 안에 들여놓는 효과가 있다. 이 전시는 1994년 첫 개인전 이래 화업 40년이 넘어가는 시점에 열리지만, 회고전 스타일을 지양하고 2000년 이후, 즉 세상에 대한 좀 더 긍정적인 세계관을 정원에 투사하기 시기에 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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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0년 이전의 작품에 대해 ‘우리 사회가 겪은 아픔과 분노, 슬픔을 「야상곡」이라는 테마를 통해, 현실의 고단함을 악기의 소리로 환원시키려 했다’고 요약한다. 세기 전환기에 그의 작품은 다소간 암울한 분위기에서 탈피한다. 작가가 몸담고 있는 사회가 밝아졌다기 보다는 스스로 밝아지려 한 것은 아닐까. 자연은 인간 사회의 거짓 새로움과 달리, 진정한 새로움으로 다가온다.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깨달음이 현재까지 정원을 주제로 한 작품을 하게 된 이유다. 이후 그의 미학은 ‘순수함, 깨끗함, 편안함’을 추구하게 된다.  이전 전시에도 사용한 부제들인 ‘정원愛 스미다’, ‘정원에서 꿈꾸다’ 등은 정원에 대한 작가의 사랑이 여전함을 알려준다. 이존립의 작품에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정원에서 ‘자연을 만끽하는 순간’을 맞이한다. 활짝 핀 다양한 꽃, 시원하게 뻗어있는 큰 이파리들, 개를 비롯한 친근한 동물, 유년 및 청춘을 구가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자리한다.  


이번 전시의 작품 제목들은 대개 [A HAPPY DAY- ]로 시작되고 뒤에 세부 부제가 붙은 방식이다. 부제 안에는 그가 1989년 이래 살고 있는 여수의 사계절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보고 그리지는 않는 그의 풍경은 재현이 아니라 상상이다. 가령 그의 작품에서 책을 무릎에 펼친 채 잠든 여인 주변의 식물들은 그녀의 꿈속 풍경으로도 보인다. 연주되는 악기 근처의 꽃들은 공(共)감각적이다. 음악은 꽃의 형태와 색과 향기를 퍼져 나갈 것이다.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입은 주변으로 시각적 메아리를 발생시킨다. 꽃 풍선을 들고 날아다니는 연인도 보인다. ‘상상하고 추억하는 이상적인 자연의 모습’을 담은 정원에는 ‘나무, 새, 꽃 그리고 사람들을 가장 편안한 공간에 배치’된다. 겉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정확한 해부학과 원근법은 잘 지켜지지 않는다. 현실과 조형 언어 사이에는 간극이 있고, 그에게는 현실만큼이나 조형적 조화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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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그의 미학은 ‘편안한 의자같은’ 작품을 꿈꾸었던 20세기 초의 마티스의 예술정신과 연결된다. ‘안락의자’와 비교됐다고 해서 조형 의식이 느슨했던 것은 아니다. 마티스는 모더니즘의 시조 중로 평가되는 대가이다. 내용적으로 연결되는 작품은 낙원에 대한 상상을 표현한 마티스의 작품 [화사함, 고요, 관능]이다. 그 작품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유토피아로의 여행을 떠나자고 권유하는 보들레르의 시에서 왔다. 보들레르는 자신의 시 [여행으로의 초대]에서 그곳은 ‘모든 것이 정연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곳으로 풍요롭고, 소란스러운 갈등이 없이 평온하며, 감각적인 욕망을 죄의식없이 충족시킬 수 있는 곳’으로 묘사한 바 있다. 조형언어의 자율성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마티스의 작품에서 자연의 대변자 격인 식물적 소재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이존립에게 낙원은 정원과 중첩된다. 가브리엘 반 쥘랑은 [세계의 정원-작은 에덴 동산]에서 유럽 정원의 기원은 성서의 신화적 정원인 에덴으로 조각상들이 놓여있고 신들에게 바쳐졌던 고대 그리스의 신성한 정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지적한 바 있다. 


‘태초에 하느님이 정원을 창조하시었으니 그 이름은 에덴이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에덴은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장소였으며...인류는 끊임없이 신화에 나오는 이러한 낙원을 재창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가브리엘 반 쥘랑) 이존립의 작품은 현대인을 짓누르는 시공간의 압박으로부터 해방된 낙원같은 장소라는 점에서 서구의 모델처럼 초월적이다. 그래도 최소한의 개연성을 위해 봄과 여름이 많다. 겨울 풍경일 경우에도 눈 속에서 꿋꿋하게 붉은 꽃봉오리를 맺는다. 꽃들의 조화라기 보다는 색의 조화이며, 다양한 녹색 계열의 색이 펼쳐지는 이파리 부분도 공을 쏟는다. 2000년 이전 그의 주요 색상이 브라운 계열이었던 것과 대조된다. 정원은 숲과 농경지 사이에 있으며, 자연과 인공이 협업하는 공간이다. 인간이 숲을 찬양하게 된 것은 그곳이 공포의 대상이 더 이상 아니게 된 시기부터이다. 산업혁명을 비롯해서 자연을 대규모로 착취하고 변형할 수 있게 된 근대시대에 숲은 소풍을 갈만한 쾌적한 풍경의 요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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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잃어버린 곳, 어쩌면 ‘어디에도 없는’ 유토피아적 공간이며 도시의 정원이라 할 수 있는 공원 등의 모델이 됐다. 그 이전의 숲은 신화와 종교의 무대였다. 농경은 현대 도시인의 관점에서만 자연에 속한다. 지방 소멸이 말해지는 현시대에 농촌을 목가적인 관점으로 보는 것은 기만적이다. 농경은 문명을 가능하게 한 최초의 생산력의 혁명을 가능하게 했다. 농경은 제대로만 된다면 세 끼 식사를 보증하는 일상성을 가능하게 한다. 농경 이전의 생산양식인 수렵이나 채취는 안정적이지 못한다. 농경지는 숲같이 무엇이 뛰쳐나올지 모를 공포의 대상은 아니지만, 실낙원의 주제처럼 죄와 벌이기도 한 노동 현장이다. 생산력이 낮은 단계든 높은 단계든 농경은 늘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어릴 때 전라도의 기름진 곡창지대에서 자란 이존립에게 농촌이 아닌 정원이 등장하는 이유는 그가 누구보다도 농업의 현실을 알기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그가 어른이 아니었던 시기의 농촌은 삶의 현장이기 보다는 자연에 대한 원형적 의식을 제공했을 것이다. 정원을 그자체로 보기보다는 그와 비슷하지만 다른 범주(농경지, 숲)와의 관련 속에서 더 명확해질 것이다. 정원은 논밭보다는 야생적이나 숲보다는 문명에 가깝다. 하인리히 롬바흐는 [살아있는 구조]에서 자신만의 정원의 철학을 논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경작지는 정원의 반대 그림이다. 그것은 노동을 의미하고 대지에 대한 폭력, 땀, 괴로움, 법규, 인공적 질서, 많은 조건들에게 복종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것은 풍부한 수확물과 법과 공공성과 공동체를 가져다준다. 즉 문화를, 보다 높은 단계의 안정성과 자의식을 갖는 삶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지속적이고 감지가능한 일방성이 수반된다...’ 하지만 인간은 경작지로만 충분하지 않다. 이존립의 작품은 모든 존재에게 필요한 정원에 대한 이상적 상이다. 그의 작품은 ‘정원적 삶의 양식’(롬바흐)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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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존립의 작품은 유년기의 추억과 밀접하다. 당장 눈앞에 있는 풍경을 그린다고 친다면 바다가 보이는 그의 작업실 앞보다 멋진 풍경이 있을까. 귀여운 강아지들이 뛰노는 너른 마당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현재 지각되는 풍경은 따스한 자연이라는 맥락으로 종합될 뿐이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자기 안에 깊숙하게 있는 것을 꺼내어 펼쳐 보인다. 그에겐 자기 안에 있는 것만 작품으로 나올 수 있다. 만약 그가 지금 여기를 떠나게 된다면 그때야 비로소 목전 풍경이 작품화되지 않을까. 그의 정원은 비슷해 보이지만 반복은 없다. 기억은 정확히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상상의 과정을 따른다. 평야 지대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산무덤에서 미끄럼을 타고 동물들과 같이 놀던 기억을 말한다. 돼지가 달갈 껍질을 씹는 소리, 소가 여물 먹는 소리를 기억할 만한 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정원이라는 무대에서 서사를 이끄는 주인공들도 현재적이지 않다. 


그는 ‘나의 그림은 추억을 소환시키고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하는 행복한 순간을 보여주는 동시에 애틋한 젊은 시절을 연상하게 하려는 의도로 표현한다’고 말한다. 2000년 이후 왕성한 전시에 한결같이 등장하는 정원은 두려움과 경이(숲), 노동과 일상(농경지) 사이에 있는 별천지다. 1989년 이후 정착한 여수, 바다가 보이는 화실에서 작업하면서도 바다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앞서 인용한 롬바흐의 정의대로 바다가 숲에 가까운 위상을 가지기 때문은 아닐까. 생명의 기원인 바다는 종착지이기도 해서 여전히 두려움을 준다. 그에게는 자연 그자체 문명 그자체가 아니라, 그 중간단계가 필요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개나 새 등은 자연을 대표하여 그 자리에 있지만, 야생이기보다는 전 인구의 1/4 가량이 반려동물을 키우는 일상과 더 밀접하다. 등장인물들도 자연인은 아니다. 유행에 민감한 예쁜 의상은 물론이고 스마트폰, 책 등의 소품은 현대의 산물이며 산책이나 소풍 중인 그들의 한가하고 행복한 시간을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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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속 사람은 서사를 이끈다. 서사는 공간과 시간을 연결시킨다.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여러 단계의 여성이 등장하는 작품은 한 화면에 한 인간의 성장 과정을 표현하는 듯하다. 비슷한 인물이 등장하는 다른 작품에서도 시공간의 연결관계를 상상할 수 있다. 인간은 전경으로도 후경으로도 배치되면서 작품마다 그 비중이 다르다. 기승전결을 가지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작가가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정감을 담고 있다. 그는 이번 전시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 희로애락을 통해 관람객들과 공감하고, 휴식과 치유의 시간을 선물하고 싶다’고 말한다. ‘자연 안에서 가장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한편 지극한 생의 즐거움이 어떤 것 인지를’ 보여주려 한다. 야생과 문명 사이의 공간은 작가에게 예술에 대한 은유가 되었다. 예술은 양자의 가교이며 예술가는 매개자이다. 정원은 인간이 심고 가꾸지만 그 결과까지는 장담 못한다는 의미에서 중간에 있다. 예술 또한 마찬가지다. 시작의 자유는 예술의 중요한 덕목으로 널리 상찬되는 대목이다. 


결과의 불확실성은 고뇌를 낳지만, 이를 통해 열린 예술 작품이 가능하다. 이존립의 작업은 매뉴얼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며, 타인의 손을 빌릴 수도 없다. 정원 풍경을 수십년 그려왔어도 매일이 새롭다. 잠시 긴장을 늦추면 맥락을 놓치고 몰입할 수 없는 섬세한 과정이다. 작업실에 오전 9시에 와서 8시에 집에 가는, 거의 출퇴근하는 식의 엄격한 일정 관리는 몰입을 위한 것이다. 그러한 엄격함은 작업의 양과 질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다. 물론 그것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어서, 작가는 매작업마다 행운도 기대한다. 작업에 공백을 가지면 당장에 물감을 섞어서 색을 내는 단계부터 차질이 생긴다고 한다. 그는 운동선수가 매일 훈련을 하듯 색을 만들고 칠하는 과정에 가장 감도가 높은 상태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말한다. 결과는 낙원에 가까운 정원이지만, 노동과 유희, 필연과 우연 등이 교차하는 그의 작업에는 양극 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있다. 


출전; GS 칼텍스 예울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