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담다, 오늘을 담다

  

이선영(미술평론가)

 


‘빛을 담다, 오늘을 담다’라는 기획전 제목은 한국등잔박물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조형예술이 기반하는 감각인 시각과 빛의 관련을 보여준다. 얼마 전 공개된 한 전시는 AI 기술을 이용하여 세계 명화를 입체화시켜 시각장애인도 손으로 만져가며 감상할 수 있게 한 작품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모더니즘에서 절정을 이룬 시각성의 강조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빛없이 가능한 미술작품은 극히 드물다. 특히 어두컴컴한 전시 공간일수록 빛의 역할은 더욱 크다. 영화관과 다를 바 없는 영상 작품 전시부터, 넓은 장소에 관객을 몰아넣고 첨단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여 공간 전체를 몰입형으로 연출하는 경우가 그 예이다. 미술작품이 무엇인가를 담는다면, 가장 중요한 매개는 바로 빛이다. 빛은 매개이자 그자체가 중요한 내용이 된다. 이 전시의 작품들에서 빛은 소재이자 주제이며 내용이자 형식을 규정한다. 자연의 규칙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과학기술은 가장 고등한 감각으로 평가되는 시각에 기반한다.


과학과 미술이 중첩되던 시대에는 빛을 화면에 가시화시키는 체계적 방법론이 탐구되었다. 지상에 발을 딛고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존재인 인간에게 천상으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빛은 오랫동안 형이상학적 주제였다.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에서 형이상학의 역사는 애초부터 더 이상 소재적인 맥락으로는 포괄될 수 없는 궁극적인 주체를 가리키는 적절한 준거를 확보하기 위해 빛의 은유가 지니는 특징을 활용해 왔다고 지적한 바 있다. ‘빛은 소비되면서도 줄지 않는다. 빛은 공간, 거리, 방향, 고요한 명상을 강조한다. 빛은 대가 없는 증여이며 강제 없이 지배할 수 있는 계몽이다.’(한스 블루멘베르크) 지상적 삶의 절대적인 조건인 빛은 초월적 위상을 가지며, 그것이 보다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불이다. 물론 이러한 불 역시 가스통 바슐라르의 [촛불의 미학]이 그렇게 썼듯이 형이상학의 주제가 될 수도 있다. 


이 전시가 열리는 한국등잔박물관의 소장품들은 일상으로 빛을 끌어들이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였을 것이다. 이전 시대의 유물은 이제 생활 속 기능을 접고 심미적 향유의 대상이 된다. 인간의 야생의 조건을 극복하고 문명을 일군 것은 불의 발견이었다. 이 위대한 발견에 대해 얼마나 많은 신화가 유래됐는가. 하지만 전기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기술이 발전되기 전까지 인류는 불안과 공포를 야기하는 어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기술은 어둠의 길이를 점차 줄였고 마침내 24시간 시대를 열었다. 물론 24시간의 시대가 인간을 더 행복하게 했는지 더 훌륭한 예술 작품을 낳게 했는지 등의 문제는 별개다. 빛이 지나치게 많은 휴식이 없는 시대, 간혹 정전같은 사고가 나야 비로소 그 부재를 깨닫는다. 빛을 어딘가에 담아 필요할 때 필요한 곳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오늘’로 대변되는 현대문명의 바로미터이다. 빛의 사용은 예술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 전시의 작품들은 여러 형식을 통해 예술의 다양한 충분조건을 탐구한다.  

    






양점모의 작품은 ‘빛을 담다, 오늘을 담다’라는 전시 제목에 두 번이나 반복된 ‘담다’에 주목한다. 빛은 유사이래부터 관련되지만, 공예 부문에서 ‘오늘’은 특별한 화두이다. 그의 작품은 용기(容器)의 형태로 무언가 담으려 한다. 예술작품 자체가 무언가를 담는 형식이다. 물론 담는 형식과 담길 내용이 따로 구별되는 것만은 아니다. 금색 은색 등 빛의 색을 띈 양점모의 작품에서 내용과 형식은 밀접하다. 빛과 색은 호환된다. 움푹한 작품의 형태는 빛을 담는 용기로 다가온다. 나뭇가지 위에 배치될 때는 마치 새둥지같이도 보인다. 마 끈으로 형태를 엮고 그 위에 옻칠을 여러 번 반복한 독특한 기법의 [둥지] 시리즈는 나뭇가지같은 길쭉한 것들을 모아서 보금자리를 꾸미는 습성이 반영된 새집에서 영감을 받아 빛과 온기가 넘칠 보금자리나 휴식에 대한 상징을 담아냈다. 여러 가지가 얽혀서 만들어진 새집이 그렇듯이, 빛이 투과되는 형태이며, 여러 구멍이 있는 형태는 독특한 질감을 만든다. 그의 작품은 공예지만 조각적 양감과 회화적 질감을 내장한다. 

 

안이 비어 있는 반원 형태는 등잔의 갓이 되어 빛을 담을 수 있을 것이다. 등잔의 갓은 필터처럼 광원의 세기와 분위기를 조율한다. 놓이는 방향에 따라 ‘담는 빛’과 ‘내리는 빛’을 연출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전통과 현대의 만남이라는 지향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이전 시대의 쓸모를 넘어선 사물은 예술이 됨을 보여준다. 예술의 쓸모는 사용이 아니라 상징에 있다. 하지만 상징 또한 변화한다. 사용되는 물건이든 상징이든 이전 시대의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심미적인 사물로 변화한다. 특히 한국처럼 전통이 단절되고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는 얼마 전 물건들 조차 같은 운명에 놓인다. 시간의 시험을 버티지 못한 대상, 물건, 상품, 사물 등이 빛의 속도로 사라진다. 하지만 그는 선택된 유물로 충격과 경이를 연출하는 초현실주의의 방식 대신에, 현대적 실험을 택한다. 전통적으로는 옻이 칠해질 수 없는 마끈, 삼베, 실같은 섬유질 재료에 옻칠을 적용하여 독특한 표면 질감과 빛 반사 효과를 자아낸다.


  


정재은, [리아의 시간여행], 138x60cm, 영상 3분 35초, 디지털 프린팅, 판넬 위 혼합재료, 2024년,



[구조에서 속력으로], D 60cm, 캔버스 위 혼합재료, 2024년



[사이 re-2], D 40cm, 캔버스 위 혼합재료, 2024년


정재은은 오래된 단독주택 이미지를 만들어 벽에 붙이고, 집과 연결된 전봇대의 조명을 밝힌다. 가로등 조명은 관객이 서 있는 현실 공간에 켜있다. 그의 작품에서 빛은 여러 시공을 잇는다. 집의 문 옆에는 영상작품 [리아의 시간여행]이 흘러나오며, 그 옆에는 실제 모델이 된 집의 영상도 나온다. 집이 나의 연장이라면, 집 안의 영상으로 대변되는 시간과 서사를 품고 있다. 고급 주택이지만 요즘의 감각에 비하면 70-8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했을 모델이며, 영상 속 기와집들보다 더 짧은 기대 수명을 가질 것이다. 젤스톤과 중첩 드로잉을 활용한 대형 캔버스 작품에서 기하학적 패턴의 조합으로 나타나는 미래도시의 이미지와도 비교된다. 그의 작품에서 도시는 기하학적 이미지로 구축되며, 동영상에서 주인공이 초고속으로 통과하는 환경화 된 빛으로 나타난다. 문명이 빛을 도구에 담아낸 이래 낮과 밤, 현실과 가상의 구별은 최소화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이제 둘의 관계는 역전되어 현실은 가상의 문을 통과해야 가능해지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시대적 주거 양식들의 연결고리는 빛이다. 


작품 속 주인공이 동물 친구와 함께 여기저기를 날아서 이동하면서 ‘시간도 공간도 이상하게 흐르는 것 같아’라고 말할 때, 빛은 그 이상한 감각을 극적으로 전달하는 매개체가 된다. 영상 작품 속 고건축들은 AI나 챗GPT 등 첨단 정보기술에 의해 전달되며, 양옥집은 집 안팎을 밝히는 전기에 의해 빛난다. 회화 작품은 동영상으로 다시 만들어져 시간 여행에 합류한다. 4분 분량의 영상 작품은 고풍스러운 한복은 입은 여자아이가 멀리서 날아온 영험한 독수리와 함께 전통과 현대의 이곳저곳을 여행한다. 하늘의 독수리와 바다의 돌고래와 소통하는 아이는 여러 공간 뿐 아니라, 과거부터 미래까지 자유롭게 왕래한다. 방마다 등잔을 갖췄을 기와집과 넓은 창마다 빛을 담은 아파트 숲, 그리고 작가의 회화에 등장하는 미래도시와 건축들을 두루 통과하면서 인류 문명사를 압축적으로 재현한다. 문명과 자연 조화는 유토피아 풍경이지만, 아직 아이의 순수한 꿈으로 남는다. 빛은 그러한 서사를 이끌기도 하고 따라가기도 하는 움직이는 궤적이 된다. 




황은화, [땅의 노래], 72.7cmx60.6cm, 캔버스 위에 아크릴과 나무, 2025



황은화, [다른 오늘], 72.7cmx60.6cm, 캔버스 위에 아크릴과 나무,2024


황은화는 평면과 입체를 결합한 ‘공간회화’를 통해 관객의 시점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인다. 그의 작품은 시각과 개념 사이, 즉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움직인다. 두가지 항 중에서 어느 하나가 아니라 양자의 관계 자체가 주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표현은 인식과 시각의 밀접한 관련을 말한다. 작품 [땅의 노래]는 구상적으로는 풍선이나 공 또는 추상적으로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을 미시적 입자가 동시에 연상되는 이미지가 화면 가장자리에 배치된다. 중심부로 뻗어나온 용기 형태와 그아래로 드리워지는 그림자가 보인다. 땅이라고 하기에는 가볍고, 노래라고 하기에 소리의 출구는 기계적이다. 중력도 광원의 방향도 혼란스럽다. 화면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일부는 실제이고 일부는 환영이다. 통상적으로 3차원을 2차원으로 번역하는 회화는 차원의 변조와 더불어 여러 가지 눈속임 기법(trompe-l’oeil)이 내재한다. 작가는 환영인 이미지가 현실로 착각하게 만드는 그림자나 시점 등을 조율한다. 


눈앞의 대상을 관객에서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회화의 형식적 장치는 그 투명성을 잃는다. 그에게 ‘공간회화’는 회화의 형식적 요소를 조금씩 비틀어서 전체적으로 이상하게 변모시키는 게임의 장(場)이다. 현실과 환영 사이에서 작업하는 화가에게 빛은 중요한 요소였다. 빛의 조율을 통해 3차원적 현실은 평면 위에 그럴듯하게 안착된다. 원근법이나 명암법은 재현주의를 지원한다. 그의 작품에서 밝고 화사한 파스텔톤 색상은 빛을 포함한다. ‘노래’에 포함된 공(共)감각성은 청각이 시각에 비해 다(多)중심적이다. 추상회화는 아니지만 모든 조형적 요소가 추상적으로 작동한다. 원 또는 구의 반복적 배열이 주는 리듬감이나 여러 색이 사용되었지만 조화롭다. 이러한 특성들은 그가 특정 대상이나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을 넘어서 형식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는 의미이다. 이번 작품은 그동안 사용해온 [Another View]라는 전시부제를 보다 대중적인 언어로 번역한다. 그의 작품은 피상적 시각이 아닌 개념적이고 인식론을 겨냥하면서도 딱딱함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출전; 한국등잔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