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에 쟁여진 시공을 펼치다

  

이선영(미술평론가)

 


양희숙의 [씨앗의 목소리] 전은 퍼포먼스를 통해 소리가 들리기도 하지만 미술작품 특유의 말없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오래된 음향기기인 나팔관을 떠올리는 만개한 꽃은 소리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내부로 응축시키는 씨앗의 소리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동물과 달리 자체적으로는 소리를 낼 수 없는 식물의 ‘목소리’란 다름 아닌 작가의 목소리다. 씨앗은 낮은 곳으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바램이 담긴 소재다.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멀고 대단하고 위대한 것보다는 가깝고 소박함 안에서 가치를 찾아가고 싶다. 텃밭에서 잉태된 씨앗 하나, 바람결에 날아온 내 정원의 꽃씨 한 톨에 담긴 이야기를 건낸다’고 밝힌다. 씨앗의 외피가 아니라 그 안에 쟁여진 시간과 공간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작품은 다양한 변주로 거듭난다. 씨앗은 설치와 평면작품에 주인공과 조연을 번갈아 맡아가며 여러 소리를 매개한다. 그 소리는 음울한 독백이 아니라 대화이며 합창이다. 또한 소리는 시각중심주의를 극복하려는 작가의 선택이며, 조형예술에 서사를 넣는 자연스러운 방식이다. 



뮤즈세움 전시 전경


그는 메시지 전달의 한 축이기도 한 제목을 통해 서사를 풍부하게 한다. 한자와 한글로 동시에 읽히는 동음이의어의 구사는 다양한 상징 가(價)를 가진다. 양희숙의 작품에는 들어가는 입구도 나오는 입구도 다양해서, 입구와 출구를 단선적으로 연결시키는 논리적 화법을 비켜간다. 작가의 의도는 정확하게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때와 곳에 따라 다르게 재연(再演) 될 수 있다. 가령 바닥에 살짝 놓인 듯한 느낌을 주는 설치작품은 언제라도 다르게 배치될 수 있다. 예술의 자율성을 확보한 근대시기에 성립된 시각중심주의 및 서사의 억압은 미술의 진정한 뿌리를 잘라낸 오류였다. 모더니즘은 그 오류를 인정하지 않은 채 자기만의 방에 갇혀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는 소리를 외쳐댔던 것이다. 하지만 방을 벗어나 자신만의 정원을 개척한 부러워할만한 이가 우울할 이유가 없다. 그가 속한 환경과의 관계는 우호적이고 작품 또한 그러한 관계의 산물이다. 어쩌면 당연할 수 있는 관계지만, 자기가 설 수 있는 입지가 점점 좁아져 허공에 둥 떠 사는 많은 현대인에게 정원은 잃어버린 시공간이다. 


양희숙은 2013년 울산 근교 시골로 이사 한 후 자연에 더 깊숙이 들어가게 됐다. 폐가를 직접 수리한 바닷가 집의 텃밭과 정원에서 나온 산물이 작업에 사용되었다. 개복숭아, 호두, 아보카도, 파, 알리움, 천일홍, 레이스 플라워, 허브 등의 씨앗이 그것이다. 그외에 식물 줄기, 마사, 흙, 천 등이 함께 사용되었다. 대개 1년 주기의 식물의 전 과정을 직접 지켜본 부산물이라는 점에서 각별하다. 씨앗들을 비롯한 그의 재료는 정원의 햇살과 바람을 품고 있다. 하지만 정원을 적극적으로 가꾸지는 않는다. 돌담 안의 정원에는 심지 않아도 크게 자라는 식물도 많고 어디선가 홀씨가 날라와 자리잡아도 그대로 둔다. 작가는 이러한 닫힘과 열림의 관계 속에서 더 큰 조화를 발견한다. [오래된 미래]라는 작품도 있지만, 양희숙은 자신이 선 자리를 중심으로 과거와 미래를 넘나든다. 가까이는 할머니의 너른 마당이 그것이다. 작가는 시골 할머니 집의 큰 탱자나무나 대청마루, 고무신들을 기억한다. 할머니가 직접 만들어 사람들에게 선물로 주던 염주나 수놓아진 베개 옆에서 들려오던 천수경(千手經) 읊는 소리도 기억한다. 



(80x125)-유주(流注)의 시간



(60x94)-천이(遷移)



(30x47)-시간의 지고(志高)


할머니의 큰 품은 이번 전시의 작품에도 등장한다. 씨앗으로 응축된 식물적 자연의 계보에서 모계(母系)는 중요한 축을 이룬다. 그 기억들은 문화적 유전자가 되어 발현되곤 한다. 유전자는 입력된 프로그램을 기계적으로 실행하지 않는다. 현실화 되지 않은 잠재된 코드들이 더 많으며, 이 잠재성 속에 다른 종과의 내적인 유대가 있다. 잠재적인 것을 현실화하는 것, 그것이 작가가 씨앗을 이번 전시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다. 질 들뢰즈가 [주름]에서 썼듯이, 씨들은 러시아 인형처럼 무한히 하나가 다른 하나에 감싸여 있다. ‘바로 최초의 파리는 이후 등장할 모든 파리들을 포함하여 이 모든 파리들은 때가 되면 자신의 차례에 자신의 고유한 부분들을 펼치도록 호출된다. 그리고 하나의 유기체가 죽었을 때 이 유기체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말아 넣어지고 다시 잠들어 있는 배 안으로 단계를 건너뛰면서 갑자기 되접힌다’(들뢰즈). [주름]은 주름이라는 특징을 가진 씨앗의 특징에 대한 가설 중 하나를 소개한다. 


‘신체가 미리 형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씨 안에 영혼이 미리 실존한다. 곳곳에 생명체가 있을 뿐 아니라 물질 안 곳곳에 영혼들이 있다. 그러면 어떤 유기체가 자신의 고유한 부분들을 펼치도록 호출될 때, 자신의 동물적인 또는 감각적인 영혼은 무대 전체를 향해 열리고. 그것은 자신의 운명을 특징짓는 일종의 봉인된 증서를 유전자 안에 담아 옮긴다.’(들뢰즈) 마누엘 데란다는 들뢰즈의 철학에서 잠재성과 현실성의 관계를 핵심으로 보며, 이를 집중적으로 논의한다. 그는 [강도의 과학과 잠재성의 철학]에서 ‘잠재성으로부터의 현실과 또는 분화는 언제나 진정으로 하나의 창조다’라는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것이 하나의 문제가 점진적으로 특화해 가는 방식이라고 풀이한다. 예술 또한 이러한 펼침을 통해서 무엇가를 말한다. 씨앗은 작으면서도 크다. 하지만 씨앗(과 그 연장인 열매)은 대도시에서 애물단지 취급을 맡는다. 은행나무에서 떨어지는 노란 열매는 빨리 치워야 하는 쓰레기가 된다. 



(43x64)-공명하는 빛



(43x64)-바람의 숨결 속으로


환절기에 날아다니는 포자는 저항력 약한 이에게 거부반응을 야기하기도 한다. 인간의 필요에 따라 제멋대로 심어지고 베어지는 도시의 식물은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널리 확산되지 못한다. 그러는 한편에 생물의 멸종을 걱정하면서 지구 깊숙한 모처에 종자들을 모아 노아의 방주같은 프로젝트가 진행되기도 한다. 인간의 식물과의 관계는 자연스러움을 잃은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식물을 예술이라는 무대에 올리는 행위 자체가 심미적이기 보다는 사회적으로 다가온다. 또는 심미성과 사회성을 더 근본적으로 연결시키는 종교적 층위에 자리한다. 특정 종교라기 보다는 종교(religion)의 어원에 내재한 ‘잇다’에 해당되는 넓은 의미의 종교성이다. 굳이 따진다면 작가가 평소에 생각했던 것이 불교에도 이미 있었다고 한다. 양희숙은 절이든 성당이든 종교가 주는 고요하게 침잠하고 사색하는 공간을 좋아한다. 그에 의하면 명상은 ‘우리의 신체 변화와 마음의 흐름을 따라가며 자신에게 집중하는 행위’이다. 이번 전시에서 이러한 경향은 자연과 녹아드는 분위기의 퍼포먼스에서 잘 드러난다.

 

평면 작품에서도 ‘잇기’는 이어진다. 에폭시 수지와 혼합재료를 이용한 평면 작품은 대개 3-4개의 시공간을 합쳐서 만들어진 것으로, 작업 자체가 잇기의 과정이다. 작품 [원(原)] 하늘과 식물, 그리고 인간이 중첩된 이미지는 수직 방향으로의 중첩도 보인다. 머리를 포함한 자연물의 층들이 그것이다. 작품의 중심에는 대개 작가로 추정되는 여성이 있지만, 그는 익명적이다. 작품이라는 세상의 중심에는 내가 있지만 동시에 나를 비우려 한다. 비워진 존재는 구별되는 여러 차원에 동시에 스며든다. 씨앗의 확장이라 할 수 있는 원의 이미지는 여러 형식을 통해 메아리처럼 반향된다. 또 다른 [원(原)]에서 둥글게 배열된 씨앗들과 바탕 색조가 유사한 것은 씨앗의 잠재력이 현실화를 위한 환경을 강조한다. 그에게 씨앗은 평면 위에 찍힌 점같은 것이 아니다. 점은 추상적 공간에 있지만, 씨앗은 구체적인 자리에 있다. 여러 씨앗들이 등장하는 [빛] 시리즈는 씨앗 하나하나를 정사각형 바탕 한가운데 놓은 이미지로, 마치 초상처럼 그 존재감이 있다. 작가의 정원에서 구한 이런저런 씨앗의 모양새는 모두 다르다. 



(80x125)-회‪(回)



(80x125)-오래된 미래



(80x125)-품


씨앗은 앞으로 어떻게 자신의 잠재성을 현실화할 것인지의 방향성이 내재한다. 접혀있는 개체는 펼쳐져 현실화될 것이다. 작가가 씨앗 하나하나를 다른 색 화면으로 표현한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씨앗의 목소리’라는 부제와 연관되어 각 개체마다 고유의 진동수가 다름을 말한다. 양희숙은 소설가 한강의 [흰돌]에서 ‘침묵을 가장 단단한 사물로 응축시킬 수 있다면 그런 감촉일 거라고 생각했다’는 대목을 인용하면서, 묵직한 돌조차도 무수한 진동과 파동이 있음을 강조한다. 돌의 단단함은 씨와 비슷해서, 씨앗 작업에는 돌이 함께 등장한다. 씨앗과 돌은 인간이 볼 수 없는 시간이 압축되고 응축되어 있다. 색 또한 마찬가지다. 물리학적으로 푸른색 계열은 붉은색 계열보다 단파장이며 에너지가 더 크다. 어떤 파장의 빛이든 색과 연관된다는 의미에서 각각의 씨앗 형태는 부기된 숫자로 차이화 된다. 가령 작품 [빛3]에서 씨앗이자 곡식인 쌀은 하얀 바탕에 부조처럼 돌출되어 보인다. 씨앗이 대지라는 평면을 뚫고 나오는 것과 같다. 


씨앗으로 표현된 잠재성과 현실성의 관계는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에 간극을 말한다. 성급하게 겉으로 판단하는 문명과 달리, 자연은 층층의 우회로를 거치며 자신의 법칙을 펼쳐나간다. 씨앗은 현실적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이다. 양자의 관계에서 시간은 중요한 요소다. 작품 제목에 시간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것도 많다. 양희숙은 질 들뢰즈의 [시간, 운동, 에너지]를 언급하면서, 시간은 직선이 아님을 말한다. 재현주의의 기반이 되는 단선적 시간개념을 비판하는 질 들뢰즈가 식물학에 집중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현실원칙의 지배 아래 있는 현실적 대상들은 어느 곳에 있거나 어디에도 없다는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라캉)고 전제하면서, 현실성과 잠재성을 비교한다. 그에 의하면 ‘잠재적 대상은 자신이 있는 곳, 자신이 향하는 곳에 있으면서 있지 않는 속성을 지닌다. 잠재적 대상의 본질적 특성은 잃어버린 대상이라는 데 있다.’ 예술작품 또한 잠재성 안에 잠겨있다. 



(25x25)-천이(天耳)



(25x25)-원(原)



설치작품



설치작품 부분


‘예술작품은 자신의 발생적인 미분적 요소들, 잠재화된 요소들, 배아적 요소들을 통해 형성되는 어떤 구조, 완결적으로 규정된 구조를 끌어들인다.’(들뢰즈) 양희숙의 설치작품에서 중심으로부터 발산하는 선들이 바로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는 과정이다. ‘잠재적인 것은 언제나 차이, 발산, 또는 분화를 통해 현실화된다’(들뢰즈). ‘현실화는 세 계열에 따라 이루어진다. 공간 안에서, 시간 안에서, 그러나 또한 어떤 의식 안에서 진행된다’(들뢰즈). 그리고 ‘사물은 잠재적 상태에서 현실적 상태로, 그리고 다시 잠재적 상태로 변화해 간다’(들뢰즈). 화면에 단독으로 등장하는 씨앗이 다소간 추상적이라면 더불어 등장하는 인간은 서사의 물꼬를 튼다. 작품 [공명하는 빛]에서 식물 의상을 걸치지 않은 여인은 그자체가 씨앗 같은 모습이다. 타원형 거울의 틀처럼 배치된 씨앗들은 그녀를 비추지 않는다. 거울의 사회적 요구가 인간. 특히 여성에게 가한 압박을 생각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 여성은 꽃이기 보다는 씨앗이다. 


잠재성으로 충만한 씨앗은 발아를 촉진시킬 따스한 빛을 받는다. 작품 [유주(流注)의 시간] 씨앗을 비롯한 식물들을 둥글게 배열한 바탕에 신비롭고 이국적인 의상을 한 여인이 마주한다. 만다라 앞에서 명상하는 듯한 모습은 둥근 배열의 중심에 사람의 머리가 겹쳐있다. 모든 것이 발산하는 중심으로 수렴하는 과정은 또 다른 발산과 수렴이라는 무한의 움직임이다. ‘유주(流注)의 시간’은 흐르는 시간이며, 시간은 한 방향이 아니라 여러 방향으로 흐른다. 양희숙의 평면 작업은 여러 시공간의 층위가 겹쳐있다. 명상이나 작업은 서로 다른 차원들 사이의 도약과 비약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장이다. 자연에서 대상이 아닌 과정을 감지하는 것은 물활론(物活論)적 사유이다. 작품 [바람의 숨결 속으로]에서 바람은 단지 공기층의 온도와 밀도 차이에 의거한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현존을 일깨운다. 바람은 누군가의 호흡이며 숨결이다. 다양한 식물로 의상을 갖춰 입은 여인에게 불어오는 바람은 홀씨들을 안고 온다.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은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어 움직인다. 



(35x35)빛1



(35x35)빛2



(35x35)빛3



(35x35)빛4



(35x35)빛5


산종(散種)하는 우주 속에 나무처럼 서 있는 여성은 어디선가 온 또다른 개체와 만난다. 낮과 밤이 공존하는 듯한 배경은 이질적 타자와의 만남이 낮을 밤으로 바꿀 정도의 극적인 변화를 낳는다. 작품 [시간의 지고] 정원에서 거둔 식물의 여러 부분을 걸친 여성은 마치 여신과 같은 자태이다. 농경 이전에 채집이 있었고 그 담당자는 남편을 사냥터에 내보낸 여성이었을 것이다. 자크 브로스는 [식물의 역사와 신화]에서 최초 인간의 주된 양식은 사냥에 의한 동물이 아니라 식물이었다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영장류는 매일매일 양식을 구해야만 하는 필요성 때문에 먹기 좋은 과일과 열매, 새순과 연한 줄기, 구근 등을 감별하는 방법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곡식의 재배로 말미암아 여러 해에 걸쳐서 씨앗을 비축 해둘 수 있게 되자 인간은 안정감을 얻게 되었다. 씨앗 속에 나무가 자란 모습이 들어있듯이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크 브로스는 속씨 식물의 시대가 포유류의 시대와 일치하는 것은 포유류가 열매, 특히 곡물에 의존해서 살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전시장 벽에 걸린 평면 작품에서 의상을 통해 식물과 일체화된 모습은 자연과 여성의 친화성을 말한다. 물론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 따라 그러한 친화성의 장단점이 있었다. 자연이 대상화, 도구화될 때 여성-자연도 같은 운명에 놓였다. 가장 공격적인 산업화 시대에 여성의 자리는 협소했다. 한편 거대한 주기가 돌아와 다시 자연이 중요시될 때 여성-자연은 대안이 된다. 그의 작품은 기후 위기를 포함한 여러 재난에서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한 모델일 수 있다. 일방적인 생산주의와 발전주의에서 벗어날 때 삶의 속도는 보다 느려지고 부자연스러운 속도감에서 놓친 것들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한다. 자연은 늘 우리 곁에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 뒷모습만 보이는 여성은 깨어있지만 행동하지 않는다. 그는 생산 아니면 죽음라는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현대문명에서 접혀있는 시간에 있다. 예술은 이 접힌 시간을 활짝 펼친다. 마치 식물이 개화하듯 말이다. 작품 [회(回)]에서 올해 환갑을 맞는 양희숙은 거대한 순환 주기를 마치고 다시 한 살로 시작한다는 환갑의 본래적 의미를 짚는다. 그는 최근 10년간 전시 돌아보면서 새롭게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을 갖는다. 





소리 테라피


작품 속 인물의 머리는 씨앗을 가득 품고 있는 꽃의 구근이 된다. 작가는 맨드라미의 복잡한 외곽선에서 무정형적인 구름을 본다. 지상과 하늘을 연결시키는 것은 나무의 신화에 나오듯이 직립한 인간이다. 공간적 연결은 시간적 연결을 동시에 의미한다. 작품 속 여성은 격세유전(隔世遺傳)적이다. 작품 [품]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작품 모델로 등장한다. 작품 [오래된 미래] 자연과 공존하는 미래상을 주장한 동명의 책자는 생태적 사고를 향한다. 평면과 설치는 연동되는데 자연채광이 잘되는 전시장 바닥에 놓인 둥근 설치작품 [천이(天耳)] 흙과 식물들로 이루어진 원형 설치물은 마치 만다라를 닮았다. 모래로 그려지는 만다라는 결국은 흩어진다. 전시기간 동안 전시장 한켠에 자리할 이 작품도 마찬가지다. 만다라가 기하학적이며 진리의 여정과 관련된 미로같은 상징이 있다면 양희숙의 작품은 거대한 꽃을 닮았다. 설치작품에 활용된 뽕나무는 지하로 뿌리를 널리 뻗는 식물로 중심에 배치됨으로서 발산하는 모양새를 가진다.


‘노래하는 그릇’이라는 뜻의 싱잉볼(singing bowl)은 ‘진동의 에너지를 만들어 내는 기구’로, 진동을 통해 주변으로 소리를 전한다. 이 설치작품은 그의 정원에 대한 압축적 상징이다. 정원으로부터 출발한 작품으로 세상과 소통한다. 평면 작품으로 구현된 동음이의어 제목 [천이(遷移)]는 모든 기호를 코드로 환원시키려는 기계문명에 거슬러 올라간다. 오래된 문자는 다양한 상징가를 가지며 미끄러지는 기호의 유희를 행한다. 마른 식물들 사이의 환한 의상의 사람은 새로운 주기의 삶을 시작한다. 마당이 있는 전시장은 여러 진동을 통해 소리를 내는 악기(싱잉볼, 레인스틱, 쉐이크, 코시차임, 윈드차임 등) 연주를 위한 작은 무대다. 퍼포먼스 작업인 [Sound Therapy]에 등장하는 소품은 겉으로는 여러 크기의 그릇처럼 보이지만 가벼운 스침같은 조그만 행위를 보태서 여러 강도의 울림을 내는 일종의 악기이다. 여러 재료로 만들어진 풍경(風磬)들은 퍼포머의 연주 행위를 바람결과 같은 차원에 놓는다. 바람 소리 빗소리 등을 메아리처럼 울리는 햇빛이 드는 마당은 예술과 치유를 만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