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 작가가 애정하고, 관찰하고, 만난 사람들


고충환 | 미술평론가


꽃을 든 여자. 꽃을 든 남자. 목도리를 한 남자. 스카프를 두른 여자. 핸드폰을 보는 남자. 가방을 멘 남자. 핸드백을 든 여자. 안경 쓴 남자. 책을 든 여자. 만세를 부르는 아이. 포옹하는 연인. 잰걸음으로 걷는 남자. 말을 탄 남자. 꽃 위에 앉은 남자. 꽃을 붙잡고 바람에 흔들리는 남자. 꽃을 부둥켜안고 있는 남자. 꽃에 기댄 남자. 빨간 넥타이를 맨 남자. 빨간 모자를 쓴 여자. 빨간 꽃문양이 있는 셔츠를 입은 여자. 줄무늬 상의를 입은 남자. 제복을 입은 남자. 새를 탄 남자. 재주를 부리는 남자. 호랑이를 타고 있는 남자. 
여기에 삶의 질과 꼴이 다른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있고, 천태만상의 사람들이 있다. 이웃이라고 해도 좋고, 보통 사람들이라고 해도 좋고, 선남선녀들이라고 해도 좋고, 현대인의 초상이라고 해도 좋다. 작가가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신화에서 불러낸 사람도 있고, 상상으로 지어낸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리운 사람도 있고 미운 사람도 있다고 했다. 그리운 사람도 미운 사람도 하나같이 귀한 인연들이고, 인연치고 의미 없는 인연은 없다고도 했다. 

그 인연 중에는 꽃을 들고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도 있다. 벤치 끝에는 여자가 돌아앉아 있다. 프러포즈를 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화해할 순간을 엿보고 있는 것일까. 지긋한 중년인 것으로 보아 꽃을 들고 있는 것이 조금은 뻘쭘하기도 할 것이다. 대부분 흔한 사람들이고 무심결에 스치는 사람들이지만, 작가는 이처럼 무심한 사람들의 유심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평소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관찰이 있었기에 포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을 애정하고 관찰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고, 작가가 조각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예사로운 사람들의 조각이 예사롭지 않다. 그 사람들은 다 어디에서 왔을까. 꼭두에서 왔다고 했다. 유년 시절 작가는 우연히 본 꼭두가 잊히지 않았고, 이후 자신의 조각으로 되살아났다고 했다. 아마도 사람이 죽어 나가는 상여를 봤을 것이다. 꼭두는 그렇게 죽은 사람의 죽음에 동행하는, 상여에 동행하는, 저승길의 안내자이면서 보호자이기도 할 것이다. 삶과 죽음을 매개하는 신의 메신저라고 해도 좋고, 작은 무당이라고 해도 좋다. 

옛날 사람들은 그 작은 무당에게 때깔 좋은 옷을 입히고, 해학적인 표정을 그려 넣었다. 어떤 문명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고도 하는데, 저승길을 산 자를 위한 잔칫날로 만들고, 뿔뿔이 흩어졌던 산 자들이 화해하고 통합하는 계기로 만들고, 삶이 만든 한을 해학으로 승화하는 사람들의 삶의 지혜를 반영하기도 할 것이다. 장례는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의 일이다. 산 자는 장례를 삶의 축제로 전환한다. 그렇게 장례는 산 자를 갱신하고 삶을 갱신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장례도, 애도도 죽은 자가 산 자에게 주는 축복일지도 모른다. 때깔 좋고 해학적인 표정의 꼭두는 이처럼 산 자가 죽은 자를 대하는 이중적인 양가감정을 반영하고, 여기에 삶이 죽음을 대하는 역설적인 의미를 반영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이처럼 이중적인, 양가적인, 역설적인, 꼭두에 내포된 의미를 어떻게 삶의 축제로 바꿔놓는지, 현대인의 초상으로, 그러므로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의 표상으로 전환해놓고 있는지 볼 일이다. 나무를 소재로 한 조각, 그러므로 목조가 어느 정도 그런 부분이 없지 않지만, 작가의 조각은 한눈에도 소박하고, 질박하고, 검소하고, 소탈하고, 해학적이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대략적이다. 대략적이지만, 표정이며 제스처가 살아 있을 만큼 섬세해서 설핏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고, 안쓰럽게도 하고, 꼭 저마다 자신을 보는 것 같이 공감하게 만든다. 

나무의 몸통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나무의 성정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최소한의 표면만을 조각한 것인데, 관련해서 작가는 나무 속의 형태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나무 속의 형태? 나무 속에 잠자고 있는 형태, 그러므로 잠재태를 의미하고 가능태를 의미할 것이다. 고대 그리스 조각가들은 나무 속에, 돌 속에 이미 그 자체로 완전한 형상(에이도스)이 깃들여 있어서, 조각가가 하는 일이란 다만 불필요한 부분을 걷어내 그 형상이 자기를 발현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소재 속에 잠자고 있는 잠재태를, 가능태를, 완전한 형상을, 에이도스를 알아보는 것이 관건이다. 

아마도 작가가 나무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무 저마다의 생김새와 성정에 맞는 이런 사람과 저런 형상이 꿈틀대는 것이 보일 것이다. 앞서 얘기했지만, 평소 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찰이 있었기에, 그리고 여기에 나무와 돌과 같은 소재의 성정에 대한 감각적 이해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는 톱으로 조각한다. 직소로 자르고, 엔진 톱으로 조각을 하는 것인데, 앞서 말했듯 거칠고 소박하고 대략적이면서도 표정과 제스처가 오롯한, 작가의 조각에서 받는 인상에도 부합하는, 그러므로 작가의 작가적 아이덴티티를 결정하는 방법론이고 과정이라고 해도 좋다. 형식과 내용이 부합한다고 해도 좋다. 거친 사람들, 소박한 사람들, 그러면서도 섬세한 사람들을 향한 평소 작가의 애정과 관찰에 꼭 맞는 형식을 찾았다고 해도 좋다. 

작가는 그렇게 나무에서 캐낸 사람들에게 옛날에 꼭두가 그랬듯 곱고 화려한 단청 색깔을 입혔다. 거칠고 투박한 표면 질감과 대비되면서 오히려 더 곱고 더 화려해 보이기도 하는데, 옛날 사람들이 꼭두에 부여해준, 삶이 죽음에 부여해준 이중적이고, 양가적이고, 역설적인 의미 그대로 현대를 사는 보통 사람들의 삶 속으로 불러와 되살려내고 있다고 해도 좋다. 이처럼 거친 마감과 때깔이 고운 색깔이 대비되는 사람들을 통해서 작가는 삶을 위로한다. 겉보기에 곱고 화려한 사람도 알고 보면 저마다 말 못할 속사정이 있다고. 보통 사람들도 알고 보면 곱고 화려한 꿈을 꾼다고. 그렇게 꿈을 꾸는 한, 보통 사람은 없다고. 그렇게 다만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라고. 

때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푸시킨) 토닥여주는 작가의 손길이 느껴지고 눈길이 느껴지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사람들보다 오히려 작가의 심성이 느껴지는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