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스미, 달항아리를 통해 본 기억의 연대기


고충환 | 미술평론가


기억의 흔적. 기억은 흔적을 남긴다. 아픈 기억이 상처로 남고, 그리운 기억이 향수를 부른다. 아픈 기억이든 그리운 기억이든 기억을 되불러오는 일은 자기와 대면하는 일이며, 자기반성적 행위일 수 있다. 자기에 아로새겨진 보이지 않는 문신과 대면하는 일이라고 해야 할까. 여기에 기억은 욕망이 매개되면서 현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그렇게 현재 위로 소환된 기억의 흔적은 흐릿하고, 희미하고, 불분명하고, 애매하다. 그리고 중의적이다. 작가는 이런 기억의 흔적을 삼면화로 그렸다. 기억의 세 단계(전개)라고 해도 좋고, 기억의 세 국면(부류)이라고 해도 좋다. 그 기억의 한가운데 달항아리가 있다. 기억을 담는 그릇이라고 해도 좋다. 작가의 초상이며, 분신이며, 얼터에고라고 해도 좋다. 그 기억의 흔적이, 그러므로 자기의 흔적이 숨은그림찾기라도 하듯 자기를 숨기면서 드러낸다. 숨김을 통해서 드러낸다. 그리고 그 위로 추상표현주의적인 현란한 붓질이 포개진다. 파토스의 표현일 수 있겠다. 빛으로 화한 기억의 색감일 수도, 그리고 빛바랜 기억의 질감일 수도 있겠다. 

자아에 스미는 무의식의 표상. 그렇게 기억은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그 흔적이 자아에 스며들어 무의식을 형성시킨다. 무의식인 만큼 자기마저도 의식할 수 없는, 자신에 무겁게 가라앉은(그러므로 억압된, 억압되었으므로 의식할 수도 없는) 침전물이라고 해도 좋다. 이처럼 개인적인 차원에서 기억이 무의식을 형성시킨다면, 개인의 기억을 넘어선 아득한 기억이 집단무의식을 형성시키고, 그 집단무의식이 원형적 이미지를 만든다(칼 융). 작가가 자신의 그림에 들여온 달항아리가 그럴 것이다. 자신과 무관하게 이미 자신의 일부가 된 것, 그렇게 자기를 형성시켜준 것, 그러므로 원형적 이미지라고 해도 좋다. 작가가 달항아리를 소재로 하게 된 개인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와 무관하게 이런 또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스미는 무의식, 그러므로 스미는 기억이라고 했다. 작가는 이처럼 스미는 기억을 달항아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크고 작은 색역(색의 구역)으로 표시했다. 그리고 그 색역 위로 무수한 단자들(모나드들)을 심어놓았다. 달항아리로 표상되는 자기를 형성시켜주러 오는 무의식의 단자들이고, 기억의 모나드들이라고 해도 좋다. 

작품1과 작품2. 작품1과 작품2를 통해 작가의 달항아리는 또 다른 의미 있는 국면을 맞는다. 먼저 작품1을 보면, 화면 중앙에 자신을 표상하는 달항아리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달항아리에 대한 집중도를 흩어놓기라도 하듯 다른 모티브들이 등장해 그림을 다중적이고 다층적으로 만드는데, 신문과 광고 전단지와 같은 생활 오브제가, 팝 버전의 마요르카 인형이, 양식화된 꽃문양이, 만화에서 차용한 뭉게구름이, 비정형의 얼룩으로 조성된 바탕화면이, 그리고 여기에 표면에 부유하는 분방한 드로잉이 하나로 중첩돼 있어서 그림을 역동적으로 만든다. 아마도 다중적인, 다층적인, 다의적인 관계(망)에 열려있는 자기를 표현한 것일 터이다. 

그리고 작품2를 보면, 작은 그림들이 모여 하나의 전체 그림을 일구는 모자이크 작화 방식을 예시해주고 있는데, 색동 띠와 같은, 색색의 자잘한 꽃과 같은, 문양들이 정교하게 수놓아진(프린트된) 비단 천을 입혀 바탕을 만들고, 그 위에 마치 흑백이 대비되는 피아노 건반을 각색한 것도 같은 형태의 달항아리를 얹어 대비시켰다. 그렇게 작품1이 팝 버전을 떠올리게 한다면, 작품2에서 작가는 전통의 재해석을 시도한다. 이로써 향후 작가의 작업에서 팝이, 그리고 전통이 자기로 표상되는 달항아리를 어떻게 해체하고 재구성하는지, 그렇게 자기를 어떻게 재정의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